책소개
소설로 다시 보는 중국의 역사
5천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오랜 역사는 중국인들이 크게 자부하는 문화유산이다. 여기에 더해, 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직전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중국인들은 역사 기록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여 왔다.『소설로 읽는 중국사』는 중국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중국소설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그 배경이 된 중국 역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소설은 허구와 사실이 함께 녹아 있지만, 독자들은 소설 속 수많은 사건들에 담긴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중국의 역사와 당대 문화를 알 수 있다.
『소설로 읽는 중국사』2권은 중국 근대 이후부터 현대시기를 아우르며, 아큐정전에서 폐도까지를 중점적으로로 살펴보고 있다. 중국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속에 담긴 중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매력적인 일이다. 7할의 사실과 3할의 허구를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읽어낼 수 있으며, 당대의 사회 현실과 동시에 그 시대를 관통하는 의미로서의 다큐멘터리(documentary)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중국소설들은 중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사전문학으로, 소설이 배경으로 하는 역사시대를 들여다보는 매개체로서 해당 작품들을 들여다 보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일러두기
현대 중국인의 슬픈 자화상 -아큐정전
전진하는 역사 / 잠수함 속의 토끼, 쇠로 만든 방에서의 외침 / 아큐, 전형적인 환경에서의 전형적 인물 / 위대한 정신 승리법 / 청년들이여, 나를 딛고 오르라 / 자기 부정으로서의 근대
하류 인생의 분투기 -뤄퉈샹쯔
군벌의 시대 / 베이징의 아들 / 낙타는 죽어서 가마를 탄다 / 현실주의 문학의 위대한 승리
중국 자본주의의 형성과 민족자본의 몰락 -새벽이 오는 깊은 밤
국민정부의 수립과 남북대전 / 상하이,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모순의 축도縮圖 / 마오둔, 1930년대의 화가 / 어둠이 짙게 깔린 캄캄한 한밤중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지식 청년들의 고난과 분투 -청춘의 노래
‘9·18 사건’에서 ‘대장정’까지 / 일본군의 북부 중국 장악과 ‘12·9 사건’ / 작가의 경험은 창작의 원천 / 혁명의 꽃으로 다시 피어나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민중의 힘 -이가장의 변천
‘루거우챠오 사건’과 중일전쟁 / 마오쩌둥의 옌안 문예강화 / 「문예강화」의 창작 실천 / 어느 농촌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들
신중국의 수립과 ‘토지개혁’ 운동의 어려움 -태양은 쌍간허에 비친다
일본의 패망과 항일 전쟁의 승리 / 최후의 결전과 신중국 수립 / 지식 여성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 / ‘경자유전’耕者有田으로의 길
새로운 사회 건설의 지난한 여정 -산향거변
신중국의 수립과 주변 환경들 / 제1차 5개년 계획과 ‘대약진운동’ / 정책을 작품으로 / 토지개혁의 험난한 여정
문화대혁명, 광기와 파괴의 역사 -부용진
주자파의 대두와 마오쩌둥의 권토중래捲土重來 /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 무엇을 위한 혁명이고 개혁인가? / 역사의 흐름에 유린된 개인의 삶
반복되는 역사의 아이러니 -상흔
사인방의 부상과 제1차 톈안먼 사건 / 문혁의 종결과 ‘4개 현대화’의 제기 / 문혁이 남긴 상처의 흔적들 / 화궈펑 체제에서 덩샤오핑 체제로의 전환
먼 길 에둘러 돌아온 그 자리엔 -사람아 아, 사람아, 중년에 들어섰건만
새로운 도약으로의 길 / 새로운 시기의 문학 / 지식인들이 걸어온 고난의 길에 대한 반추 / 중년이 되어 돌아본 세월들에 대한 회한의 기록
전통으로의 회귀와 문학의 상업화 -장기왕, 사회주의적 범죄는 즐겁다
변화의 기로에서 / 머나먼 민주화의 길, 그리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표방 / 또 하나의 모색, 뿌리 찾기 / 1980년대의 아이콘, 왕숴 현상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조종 -폐도
1990년대 인문정신 논쟁 / 황폐해 가는 도시 / 지식인의 파멸 / 진정한 혁명으로의 길, 계몽啓蒙인가 구망救亡인가?
저자
조관희
출판사리뷰
중국인은 소설로 역사를 말한다!
역사에 대한 중국인들의 편향은 유별난 데가 있다. 5천여 년 동안 이어져 온 오랜 역사는 중국인들이 크게 자부하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더해 전 왕조가 끝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직전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었을 정도로 역사 기록에도 남다른 애착을 보여 왔다. 이렇듯 역사를 소중히 여기고 나아가 애호하는 중국인들의 태도는 중국문학사에서 역사와 문학 작품을 결합한 ‘사전문학’(史傳文學)이 발달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 책은 중국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대표하는 중국소설 작품들을 일별하면서 그 배경이 된 중국 역사를 공부한다. 소설은 허구와 사실이 함께 녹아 있지만, 독자들은 소설 속 수많은 사건들에 담긴 ‘의미’를 해석함으로써 중국의 역사와 당대 문화를 알 수 있다. 소설 작품은 당대의 사회 현실을 충실하게 묘사한 하나의 ‘기록’이자, 이를 통해 그 시대를 관통하는 의미를 읽어 내는 ‘텍스트’이다.
중국소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읽는 거울이다!
-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중국소설은 무엇일까? 아마도 『삼국지』(三國志)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국내 작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각색되기도 한 『삼국지』를 외국문학이라고 하면 어색해할 한국인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삼국지』는 이미 중국소설 이상의 의미 있는 텍스트이다. 『삼국지』를 통해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를 이해함은 물론, 삼국시대 인물들의 각축을 보며 그 속에서 인간관계와 리더십을 읽어 내고, 무수한 사건들과 고사를 읽고 암기하며 한자문화권의 교양으로서 소중하게 여긴다.
-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리한 사람은 역사 속에 미화되고 영웅이 된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삼국시대 위, 촉, 오의 전쟁에서 실질적인 승자는 조조다. 그렇다면 소설 속 조조는 어떠한가? 그는 간악하고 잔인한 소인배로 묘사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친구도 서슴없이 죽이는 잔인한 면모가 부각된다. 반면에 유비와 손권은 당대의 영웅으로 묘사된다. 즉, 실제 역사와 달리 심리적인 승자는 유비, 그리고 손권인 것이다. 『삼국지』가 지금까지도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역사에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숨겨진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중국학자들 중에는 『삼국지』의 내용이 실제 삼국시대의 역사와 비교할 때 그 사실 관계가 어떠한가를 연구하는 이들이 많다. 대표적 인물인 청대(淸代)의 유명한 학자 장쉐청(장학성章學誠, 1738∼1801)은 『삼국지』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7할은 사실에 바탕했고, 3할은 허구”(七實三虛)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 이 책은 중국소설을 읽음으로써 그 속에 담긴 중국사를 공부하는 책이다. 이 책은 7할의 사실과 3할의 허구를 모두 중국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읽어내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부터 현대 중국까지 7할의 중국사를 시대순으로 읽어냄은 물론, 3할의 허구 속에서 숨겨진 역사까지도 소중하게 읽어낸다. 중국소설은 당대의 사회 현실을 충실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그 시대를 관통하는 어떤 의미를 읽어내는 다큐멘터리(documentary)이다.
역사를 보완하는 사전문학(史傳文學)으로서의 중국소설
- 중국에는 사전문학(史傳文學)이 발달해 있다. 사전문학을 말 그대로 풀면 ‘역사를 전하는 문학’이라는 의미이다.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소설이나 희곡과 같은 문학 작품들 역시 역사의 일부이며, 정식 역사에서 다루지 못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는 것(正史之補)이라 생각했다. 소설 작품을 단순히 여가를 즐기기 위한 오락물 정도로 여기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중국소설들은 중국의 역사를 소재로 한 사전문학이다. 실제 그 소설이 집필된 시점의 다양한 변수가 당연히 소설의 내용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이 책에서는 그 소설이 배경으로 하는 역사시대를 들여다보는 매개체로서 이 소설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열국지에서 폐도까지, 25편 이상의 소설로 중국사를 읽는다
- 이 책에서 다루는 중국소설은 총 25편 정도이다. 이 책에 수록된 소설을 중국사의 시대순으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1권 근대 이전, 열국지에서 라오찬 여행기까지]
동주(東周) 시대~춘추전국시대 → 열국지
진한(秦漢) 교체기 → 초한지
삼국시대 → 삼국지
당(唐)나라 → 서유기
송(宋)나라 → 수호전
명(明)나라 → 의화본 / 금병매
청(淸)나라 → 유림외사 / 홍루몽
근대(近代) → 20년간 내가 목격한 괴이한 일들 / 라오찬 여행기
[2권 근현대, 아큐정전에서 폐도까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 아큐정전
1920년대 군벌(軍閥)의 시대 → 뤄퉈샹쯔(낙타상자)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국공 내전 → 새벽이 오는 깊은 밤(자야子夜) / 청춘의 노래
1940년대 공산당 세력 강화, 마오쩌둥의 옌안 문예강화 → 이가장의 변천
1950년대 신중국의 수립과 토지개혁 → 태양은 쌍간허에 비친다 / 산향거변
1960년대 문화대혁명 → 부용진
1970년대 문화대혁명의 종결과 제1차 천안문 사건 → 상흔
1980년대 덩샤오핑 체제 → 사람아 아, 사람아 / 중년에 들어섰건만 / 장기왕 / 사회주의적 범죄는 즐겁다
1990년대 인문정신의 논쟁 → 폐도
-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소설들을 보면 『열국지』, 『초한지』, 『삼국지』 등 익숙한 책들도 있고, 『유림외사』, 『라오찬 여행기』, 『뤄터샹쯔』, 『폐도』 등 낯선 소설들도 등장한다. 이것은 중국사도 마찬가지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중국사는 근대 이전, 1911년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사에 한정될 것이다. 근현대의 중국사는 근대 이전의 중국사만큼은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다. 한 편 한 편의 소설을 읽듯 시대순으로 짜인 글들을 읽다보면 어느새 고대의 춘추전국시대부터 1990년대의 중국까지 오게 된다.
1. 종교의 판테온 당나라를 배경으로 한 『서유기』
『서유기』는 명나라 때 쓰여진 소설이지만, 그 내용을 보면 쉬안장(현장)으로 대표되는 불교가 있고, 쑨우쿵(손오공)으로 대표되는 도교가 있다. 이처럼 다양한 종교가 혼재한 이유는 당나라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서유기』는 중국의 역대 왕조 가운데서 가장 국력이 강성했던 당나라 태종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당나라의 수도 창안(장안)은 세계 각국의 문화가 흘러들어오는 국제도시로,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했다. 이 시기, 젊은 승려 하나가 큰 뜻을 품고 창안을 떠나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가 바로 우리에게 ‘삼장법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서유기』의 주인공 쉬안장이다.
세계 제국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당나라는 온갖 종교가 혼재했다. 유교, 불교는 물론이고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기독교의 일파가 유입되어 일시 번성하기도 했다. 근대 이후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전까지 중국에서 기독교가 유행한 것은 바로 이때가 유일하다. 이렇듯 당 왕조는 불교와 도교에 대해 관용적이었는데, ‘삼장법사’의 취경(取經)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서유기』에 다양한 종교가 어우러져 있는 것은 당시 시대상으로 볼 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2. 중국 현대문학의 특징 : 정책문학 → 상흔문학 → 반사문학 → ‘뿌리 찾기’문학
1911년의 신해혁명으로 중국은 2천 년 넘게 명맥을 이어 온 전제 왕조가 사라졌다. 새롭게 출범한 중화민국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군벌(軍閥)들의 내전에 이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결은 중국 대륙을 광풍으로 휩쓸었다. 이후 마오쩌둥이 1949년 신중국을 수립하고, 문화대혁명과 톈안먼(천안문) 사태 이후 덩샤오핑 체제로 전환하기까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중국의 근현대 역사를 수놓고 있다. 이 강렬한 시기를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는 중국 근현대의 소설들은 시기별로 독특한 특징이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 중국공산당의 정책을 그대로 소설로 실천한 문인이 있었다. 저우리보의 『산향거변』이 대표적인 경우로, 이 소설은 중국공산당의 정책인 ‘토지개혁’을 다루고 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토지를 받게 된 농민이 개별경제로부터 사회주의적인 집체경제로 나아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을 묘사했다.
1970년대 문화대혁명과 톈안먼(천안문) 사태를 거치면서 중국소설 또한 변모하기 시작한다. 특히 문화대혁명 이후 문혁을 비판하는 소설들이 봇물처럼 나타나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이것을 ‘상흔문학’이라고 한다. ‘상흔문학’은 과거에 대한 애도(哀悼) 문학과 과거에 입은 상처의 아픔을 다룬 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상흔문학의 대표작이 바로 1978년에 발표된 루신화의 『상흔』이다.
1970년대의 ‘상흔문학’이 문혁으로 인한 상처를 드러내 보이고 확인한 것이었다면, 그 뒤를 이어 등장한 것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이 나오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한 성찰이었다. 작가들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과오가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그 근본 원인을 깊이 있게 성찰하고 반성함으로써 문학이 갖고 있는 고유한 주체성을 회복하려 했다. 1979년부터 1984년까지 쏟아져 나온 이런 류의 작품들을 ‘되돌아보기 문학’ 즉 반사(反思) 문학이라 부른다. 이러한 ‘되돌아보기’ 과정을 통해 그들이 얻은 결론은 역사의 동란 가운데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사 문학의 대표작은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 천룽의 『중년에 들어섰건만』이다.
문혁 기간 중 입었던 ‘상처의 흔적’(傷痕)을 확인하고, ‘지나온 시간들을 되돌아 본’(反思) 뒤 문학의 흐름은 크게 ‘뿌리 찾기’(尋根)와 ‘모더니즘’으로 나아갔다. 양자는 모두 문혁 기간 중 집중적으로 비판당했던 대상들이었다. 중국의 전통 문화를 숭상하는 일은 낡아빠진 봉건문화에 덜미가 잡혀 허우적대는 한심한 작태로 여겨졌고, 서양의 문학작품을 읽고 그들의 문학이론을 학습하는 일은 타락한 부르주아 문학에 투항하는 것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문혁이 끝나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자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구의 모더니즘 문학에 대한 경도가 나타났고, 전통문화에 대한 탐구를 축으로 하는 뿌리 찾기 문학이 대두했다. 이러한 문학의 대표작이 아청의 『장기왕』, 왕숴의 『사회주의적 범죄는 즐겁다』(원제는 『절반은 불꽃, 절반은 바닷물』一半是火焰, 一半是海水)이다.
3.『초한지』라는 이름의 중국소설은 없다
『초한지』는 진한 교체기, 즉 진시황이 죽고 이후 혼란한 진나라가 한나라로 통일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등장한 샹위(항우)와 류방(유방)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이다. 『초한지』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소설 중 유일하게 중국소설이 아닌 우리 소설이다. 독자들에겐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중국에는 『초한지』가 없다. 중국의 고대소설을 어지간히 모아놓은 『중국고전소설총목제요』(中國古典小說總目提要)라는 책에도 『초한지』라는 서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초한지』는 어디서 유래한 것이며, 언제, 누가 쓴 것인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초한지』라는 제목의 소설을 펴낸 팔봉 김기진의 『초한지』(어문각, 1984) 머리말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천하장사 항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고, 불량소년들의 조롱을 받고 그 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꾹 참아내었다가 후일에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항우를 무찌른 한신의 이름도 그에 못지않게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러나 이런 것들을 알기는 해도, 그저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일화로서 수박 겉핥기로 알고 있을 뿐이요, 역사적인 배경이나 시대적인 조류, 등장인물들의 인간적인 특성이나 업적에 관해서는 거의 백지상태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나는 이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던 끝에, 우리 생활에 밀착되다시피 한 중국 고전 가운데 하나를 널리 알리려는 의도 하에, 『서한연의』(西漢演義)를 원본으로 하여 『통일천하』(統一天下)라는 제명으로 오래 전에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이번에 이를 다시 『초한지』(楚漢誌)로 개제하면서, 그 문장과 내용에도 새로이 손질을 많이 하고 편집 체재도 현대감각을 살려서 보기 좋고 읽기 좋도록 다듬었다.
곧 중국 소설 『서한연의』를 김기진이 『초한지』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펴낸 것이니, 당연하게도 중국에는 『초한지』라는 책이 없는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서한연의』는 여러 판본이 있는데, 모두 저자를 알 수 없다. 명대에 처음 나온 『서한연의』는 모두 8권 101회로 되어 있으며, 이후에 나온 판본들 역시 이와 비슷한 체제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