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송나라의 멸망은
한 문명의 멸망이었다!
중국 문명을 처절할 정도로 성찰한 현대판 『성세위언盛世危言』
중국 정부가 금서로 지정한 책, 무삭제 원본으로 번역·출간!
- 송나라 문명이 최고의 문명인 이유와 멸망한 이유
- 신본문화의 맥이 일찌감치 끊어져 권력이 인간에게 집중
- 폐쇄적인 내륙 환경이 가져온 강권 정치
- 농업 종사가 정보의 교류, 논쟁, 언어적 주도권 막아
- 낮을 수밖에 없는 농업생산력이 전쟁의 반복 불러
- 시장 리스크와 경쟁 없는 사회가 만든 종법 규율의 역설
오늘날까지 많은 이는 송나라가 전제적이고 부패하고 낙후했으며, 가난하고 쇠약했던 왕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나라가 화약·나침반·활자인쇄술 등의 위대한 발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또 송나라의 상품경제가 그렇게나 번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송나라 사람들이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가 다 기뻐한 후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는 위대한 정서를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풍부한 학식과 예리하고 생동감 넘치는 필체로 많은 사료를 분석해 중국 문명의 흥망성쇠를 풀어낸다. 동서양의 경험을 결합해 중국의 일원화 문명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어떻게 발전하고 강화되었는지를 설명하고 중국 문명 전환이 실패한 과정과 이유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고찰한다.
목차
서문
제1장 하늘에 태양은 하나, 백성의 군주도 하나
: 고대 신화 전설과 중국 문명의 기원
천지인 전설과 원시문화 | 대동사회 전설과 원시 민주제도 | 소강小康사회의 전설과 왕권의 형성 | 요·순·우의 ‘선양禪讓’ 전설과 성인의 시대 | 강권과 폭력이 형성된 원인
제2장 위대한 시대의 비극
: 춘추전국과 전제주의의 승리
서주 분봉 자치제도의 인권 보호 | 춘추전국시대 인권의 신장 | 춘추전국이 민주사회로 나아가지 못한 원인 | 상앙의 변법과 전제 독재자의 굴기 | 백가쟁명과 학술사상의 역사적 국한성
제3장 폭력과 전제로 비롯된 재난
: 진나라의 대일통大一統과 일원화 문명의 확립
6국을 멸한 진나라의 불의 | 정치 구도 설계의 사상적 실패 | 진나라 법률의 인권 박해 | 국제 외교 경쟁을 말살한 대일통 | 국제 무역 경쟁을 말살한 대일통 | 인재 경쟁을 말살한 대일통 | 진시황의 극단적 부패와 폭정이 가져온 대일통 | 관료체제의 암흑시대와 대일통
제4장 번영 그 배후의 위기
: 강성한 한나라, 번성한 당나라 그리고 황권의 강화
몽구의 둥지 짓기가 보여주는 시사점 | 황권 전제를 수용한 중국인의 심리과정 | 황권 강화를 위한 주요 조치 | 황제와 승상의 분권과 상호 견제의 설계 및 결점 | 지방 관리제도의 폐단 | 한나라와 당나라의 흥망성쇠는 인치人治의 결과 | 한나라와 당나라 경제의 붕괴는 인치가 가져온 필연
제5장 고대 중국 문명의 정점
: 송나라의 위대함과 그 소멸
부정할 수 없는 찬란한 대송大宋 문명 | 문치주의와 중앙집권에 인정仁政이 결합한 제도적 설계 | 송나라 정치 설계의 성과와 한계 | 평화를 지향한 송의 기본 국책이 가져온 득실 | 공전의 번영을 이룩한 상품경제와 물질문명 |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적극적이고 건강한 다원화된 사회
제6장 황권지상 인권 추락의 시대
: 원, 명, 청의 암흑정치와 문명의 쇠락
몽골군의 대학살 | 명·청 사회의 암흑적 전제정치 | 황권 강화와 우민정책 | 전제 황권의 인권 박해 | 황권 강화와 폐관쇄국
제7장 기형의 사회
: 전제제도와 중국인의 생존 방식
온갖 악의 근원인 궁정제도 | 야만스런 환관제도 | 세속의 암흑적 습성과 건달 문화의 확산 | 관핍민반官逼民反과 주기적 대반란
제8장 실패로 끝난 문명 전환
: 근대 중국과 문명 혁신
중체서용中體西用의 파산 | 무술변법과 1차 문명 전환의 실패 | 입헌군주제와 2차 문명 전환의 실패 | 민국의 수립과 3차 문명 전환의 실패 | 신해혁명의 뼈아픈 교훈과 심각한 부작용 | 5·4운동과 4차 문명 전환의 실패 | 연성자치聯省自治와 5차 문명 전환의 실패 | 1946년 헌정운동과 6차 문명 전환의 실패 | 1949년 국공평화 회담과 정협에 대한 고찰
결론_ 인정人政에서 헌정憲政까지
후기
주
찾아보기
저자
샤오젠성
출판사리뷰
장구한 역사를 돌아보고 파헤치면서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인 중국 문명을 본원적으로 반성하는 중국 내부로부터의 성찰이 제기되었다. 중국 『송나라의 슬픔: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한 중국 문명을 반성한다』(원제: 中國文明的反思)는 소수민족 투자족土家族 사람으로 [후난일보湖南日報]의 기자인 샤오젠성蕭建生이 20여 년간의 자료 조사와 뼈를 깎는 노력으로 저술한 책이다.
중국 대륙에서 2007년 출판될 뻔했다가 정부의 검열로 무산된 이 책은 2009년 홍콩에서 출간되었으며 출간되자마자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단숨에 베스트셀러로 뛰어올랐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찬란하고 화려하고 장구한 중국 문명이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명확한 맥을 잡아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공한 원본으로 번역한 한국어판을 만나는 독자들 또한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중국사를 바라보는 탁 트인 관점을 형성할 수 있으며 오늘날 중국이 권위주의 체제로 흘러가는 이유를 잘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왜 송나라의 슬픔인가
원제가 “중국 문명을 반성한다”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어판 제목을 “송나라의 슬픔”으로 지은 이유는 이 책에서 가장 강조되는 대목이 “송나라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중국 문명이 최고조로 고양되었던 때가 바로 송나라 때다. 정치에서부터 경제, 문화, 사회, 복지, 무역, 외교, 의료체계 등 모든 면에서 송나라는 당시의 어떤 문명 세계도 도달하지 못한 정점에 올라섰다. 그야말로 그대로 100년만 더 갔으면 근대는 세계적으로 몇 백년이나 앞 당겨졌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송나라의 체제는 훌륭했다.
황제가 존재하는 상태였지만 실질적인 통치 내용으로는 민주주의의 여러 씨앗이 잉태되었으며, 부의 분배에 있어서도 오늘날보다 훨씬 나았다. 상업문명은 화려했으며 사회복지 제도 등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있었고,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장치도 잘 작동했다. 중앙에 권력이 몰리지 않고 지방분권이 이뤄졌으며 문화면에서도 사상적 다양성이 분출했으며 성리학이 지배적이었을 것이라는 후세의 인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울러 문학적·과학적 성과도 특출했다.
말하자면 송나라는 황제 전제제도가 그 틀을 깨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물질과 정신적인 문명 형태로 구현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국방 분야에 소홀했고, 과학문명 또한 산업혁명에 도달할 만큼 한단계 나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 외부의 침입에 문명이 철저하게 짓밟혔다. 송나라의 멸망은 한 문명의 멸망과도 같았다. 송대 이후 중국은 한 번도 그와 같은 문명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과잉된 황제 중심, 중앙 중심, 권위주의적인 사상 중심 사회로 검열과 폭력으로 일관하다가 서양에 의해 왕조 시대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읽어도 좋지만, 저자의 절창이 드러나는 제5장 “고대 중국 문명의 정점: 송나라의 위대함과 그 소멸”부터 읽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부터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중국 문명의 첫 단추가 어떻게 끼워졌고,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수많은 노력이 어떻게 좌절을 맞게 되었는지 세세한 역사적 맥을 짚어보는 것도 방법이 될 것이다.
신이 땅 위에서 자라난 사회의 저주
반고와 여와의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원시문화는 신본문화였다. 이 점에서는 세계 각 문명의 원시문화와 방향을 같이한다. 하지만 문화의 발전과정에서 이 신본문화는 점차 인본문화로 대체되었다. 인간을 신격화하고 신을 인간의 위치에 두었기 때문에 인간과 신의 관계는 혼란스러워졌고 조물주와 피조물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도 흐려졌다. 이것이 이후 중국 문명의 비극적 잠재 요소가 된다.
서구 현대 문명은 기독교 문명의 산물, 곧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산물이었다. 『성경』에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한 과정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유대교와 천주교, 기독교 모두가 인본문화로 대체되지 않았고 신본문화를 간직해 내려올 수 있었다. 서양인들은 성인을 맹신하지 않았고 광폭함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바로 이런 관념상의 차이 때문에 서구 사회는 개인 숭배라는 관념이 생기지 않았고 강권에 극력 반대하게 되었다. 하느님을 제외한 그 어떤 권위도 믿지 않았고 모든 권력에 제약을 가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권력으로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서구 사회는 정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데 치중했다.
그런데 중국인은 인간 세상에서 신과 같이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성인이 나타나고 그들이(인간 세상의 신) 사회를 다스리기를 바라며 동시에 강권과 폭력에 대해서도 참고 견딘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 중국의 신화가 가지는 중요한 의의 중 하나가 생겨난다. 바로 ‘성인이 나라를 다스린다聖人治國’는 고대의 권위와 황권 강화에 최초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용’의 전설을 꺼내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유행처럼 중국인을 ‘용의 후예’라고 부르고 있다. 용은 중국인의 조상인가? 먼 옛날 중국인들은 용을 토템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자신들을 용의 자손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장자는 용을 상상 속의 동물이며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용이라는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장자』 「도용술屠龍術」) 『산해경山海經』과 굴원의 시 그리고 『역경易經』 『좌전左傳』 등도 용을 언급하기는 했으나, 불의 신 축융祝融은 ‘용 두 마리를 타고 다닌다’ ‘하夏나라의 계啓 또한 두 마리 용을 타고 다닌다’ 등과 같이 용을 상상 속에서 구름과 안개를 타고 하늘을 날며 바람과 비를 부르는 초능력을 가진 동물로 묘사한 것이었다.
용을 사람에 비유하기 시작한 것은 진秦나라 때다. ‘금년 조룡祖龍[진시황의 별칭]이 죽어 땅이 갈라졌다’는 전설이 당시 생겨난 데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은 진시황을 흉포한 용에 빗대어 생각했다. 양한兩漢 시대를 거치며 용의 전설은 나날이 늘어났다. 하지만 용은 여전히 흉포한 동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용은 점점 중국 황권의 상징이 되었고 황실 가족은 용의 자손이 되었다. 강권과 폭력, 부패와 탐욕은 용의 특징이다. 용의 전설은 고대인들이 황(왕)권에 대해 가졌던 공포와 증오 그리고 황실에 대한 복종과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한 심경을 담고 있다. 이런 모순된 현상은 중국 문명의 기원이 지닌 복잡성을 보여준다.
저자는 중국인은 반고(신)와 여와(신)의 후손이지 용의 후예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중국의 원시문화는 인본문화도, 용 문화도 아닌 신본문화였다. 또한 강권과 폭력, 기만의 문화가 아닌 평화와 관용의 문화였다. 인본문화가 발전할 때 신본문화가 삭제되면서 중국 문명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폐쇄적인 내륙 환경이 가져온 강권 정치
정위精衛가 바다를 메운 신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염제에게는 여와女娃라는 딸이 있었다. 여와는 동해를 건너려 했지만 아주 커다란 바다였던 동해에서 결국 익사하고 만다. 그녀의 영혼은 정위조精衛鳥가 되어 매일같이 서산에서 돌과 나무를 물어다가 동해에 던져 그 바다를 메우고자 했다. 하지만 여와는 결국 동해를 메우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다시는 동해의 물을 마시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산해경山海經』 「북차삼경北次三經」, 『술이기述異記』)
이 신화는 바다를 정복하고자 했던 선인들의 강렬한 욕망과 증오를 동시에 반영한다. 바다를 건널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그들은 그저 육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중국 문명의 발원지는 확실히 바다와 단절되어 있다.
이런 단절은 고대 중국인이 상업이 아닌 육지에서의 농사로 생계를 도모하게 만들었다. 해상무역이 발달하지 못하자 상업 경쟁과 정보의 교류도 제한되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육지에서의 운송 비용이 높아 교통과 정보가 발달하지 않아 상품의 대규모 운송이 힘들었다. 때문에 농업을 주업으로 삼았다. 아주 먼 태고 시대부터 하 왕조가 세워지기 전까지 간단한 시장무역이 있었다고는 전해오지만 거상이 있었다는 고사는 없다.
모든 신화와 전설은 기본적으로 농업을 그 소재로 하고 있다. 유소씨와 신농씨에서부터 황제와 우를 거쳐 서주西周의 정전제井田制에 이르기까지 모든 전설은 농업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중국 태고 시대에 부락과 가정 경제를 지탱해주었던 주요 산업은 무역이 아닌 농업이었다.
농업 종사가 정보의 교류, 논쟁, 언어적 주도권 막아
농업에 종사하는 것은 분산경영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아침에 해 뜨면 나가서 일을 시작하고 해가 지면 일을 마치고 쉬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보의 교류나 논쟁, 언어의 주도권은 필요 없었다. 오로지 조화로움과 평온함을 필요로 하는 그들은 공공장소를 욕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날씨와 수확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정치에는 별다른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공공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집정자가 민중에게 연설하고 자신의 정치 이념을 알리며 민중을 이해시키고 토론을 펼칠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국정은 완전히 공개되지 못했다.
민중 또한 자신의 권력을 충분히 행사하고 개성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은 민주정치의 싹을 밀어올리지 못했고 이로써 ‘천하는 만인의 것이며 백성이 직접 어질고 유능한 관리자를 뽑았던’ 고대의 원시적 민주제는 계승되지 못했다. 이는 지중해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상업이 크게 발전했던 것과 완전한 대조를 보인다.
고대 그리스는 해상교통의 발달로 상업이 번영했고 사람들이 도시로 모여 독특한 시민사회를 형성했다. 시민들은 도시 내 광장 등 공공장소에 모여들었고 거기서 상업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정치를 논했다. 이런 시민사회의 기초 위에 시민들의 격렬한 논쟁을 통해 도시 관리자를 선출하는 정치 구도가 형성되었고 이는 민주정치의 발전을 촉진했다.
고대 중국인이 부를 추구하는 수단은 상업이 아닌 농업이었다.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은 독특한 도시 시민사회를 형성하기 어려웠다. 또한 정보를 투명하게 교류하고 시민이 의견을 표현하며 논쟁을 펼 수 있는 공공장소도 생겨나지 않았다. 민중에게는 정치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혈연으로 왕위를 계승하는 세습제도와 소수의 사람이 정치를 독점하는 상황은 깨뜨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민주정치가 발전할 수 없었고 대신 강권과 전제가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이 만들어졌다. 우가 죽은 뒤 계가 부락연맹의 선거 제도를 폐지하고 왕권 세습을 시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중국에 강력한 도시 시민사회가 부재했고 민주공화정치의 사회적 기초도 없었기 때문이다. 계는 민중의 뜻을 헤아릴 필요가 없었다.
낮을 수밖에 없는 농업생산력이 전쟁의 반복 불러
게다가 농업생산 도구가 발달하지 않았던 태고 시대의 농업생산력은 매우 낮았다. 때문에 당시 사회는 물질적으로 빈곤했고 통치자들이 국가 기관을 운영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수요를 충당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켜 다른 부락을 점령해 생존 자원을 약탈하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게다가 지나치게 높은 상업의 운송비용과 다르게 육지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싸워 이기면 무역을 통한 것보다도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통해 다른 부락을 굴복시키고 공납을 받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얻는 가장 빠르고도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것이 태고사회에서 부락 간 전쟁이 그렇게 빈번히 일어난 까닭이다.
물질적인 이익을 둘러싼 다툼은 옛 사회 통치자들이 전쟁을 일으키는 주요 동기였다. 또한 중국 사회가 ‘우두머리가 없는 용의 무리’에서 ‘우두머리 있는 용의 무리’로 전환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이러한 내륙 문명의 형식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탓에 고대 중국 문명은 고대 바빌론, 이집트, 인도 문명과 마찬가지로 성숙한 민주정치로 발전하지 못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만이 특수한 예로 지중해의 상업 발달이 고대 그리스 도시의 민주정치를 형성시킨 것이다.
특별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혈연 기반의 종법 세습 제도가 농업 문명과 연관을 갖는다는 것이다. 농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상업에 종사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상업은 늘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닐 일이 많고 독립적으로 시장 리스크를 부담해야 하며 고도의 자주성과 독립심이 있어야만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고 이윤을 남길 수 있다.
그 누구도, 부모나 윗사람이라 할지라도 상인의 판단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상인에게 돈을 벌고 이윤을 남기는 것은 최고의 목표였으며 이윤을 남길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면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윗사람의 명령만을 받들어야 하는 종법윤리 관계는 성립되지 않았고 혈연 내에서 예의를 기강으로 삼을 수도 없었다.
시장 리스크와 경쟁 없는 사회가 만든 종법 규율의 역설
하지만 농업 생산으로 자급자족했던 사회에서는 한 가족이 열심히 노동해 필요한 물자를 생산하고 소비하면 됐으므로 시장 리스크를 부담할 필요도, 사방으로 바쁘게 다닐 필요도 없었고 시장 경쟁의 부담도 없었다. 그저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장유유서의 도리를 지키며 웃어른을 공경하고 봉양하면서, 윗사람의 가르침을 지키고 조상들 제사를 모시기만 하면 되었다. 이런 사회 환경에서 통치자들은 국가와 가정을 연결시켜 노인을 공경하라는 도리와 국가에 충성하라(곧 통치자에게 충성하라)는 도리를 긴밀하게 연관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친친親親[종친 사이의 항렬]’과 존존尊尊[벼슬에 따른 지위]’, 즉 가족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가치관이 종법사회의 도덕 규범으로 쉽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통치자들은 제사, 장례, 혼례, 관례, 빈객, 점占 등 각종 예법을 통해 혈연 조직이라는 모델을 국가 조직에 이식시켰다.
또 ‘충’과 ‘효’를 근본으로 하고 혈연관계를 주축으로 하는 권력 구조를 확립해 가족 간 왕위 계승을 실현했다. “군주가 권력을 세습하는 것을 예로 하게 되었고大人世及以爲禮”, 혈연 제도와 국가의 조직 구도를 융합하자 국가와 가정이 하나가 되어 서로 분리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가정의 ‘예’는 곧 국가의 ‘법’이 되었고 ‘예’를 어기는 것은 가장과 군주의 통제에 불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치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로 여겨져 형법의 다스림을 받았다. 이 또한 중국 고대 정치가 보이는 특징 중 하나다. 폐쇄적인 내륙 환경은 고대 중국에 강권과 폭력의 전제 통치를 가져온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진한 제국의 제도부터 명청의 타락, 근대의 분투와 절망
이 책은 이러한 선진 시대의 기초 논의부터 시작해 진한 시대, 당송 시대, 명청 시대, 민국 시대 등을 큰 틀로 하여 중국사를 통관한다. 진한 시대는 황제 중심의 중국의 권력 제도의 씨앗이 뿌려지고 제도적으로 완성을 본 시기다. 명청 시대는 중국 문명이 가장 타락한 시대였고 그 구체적인 실상은 우리를 아연하게 할 정도다. 그리고 서양의 충격 이후 중국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서 거듭나고자 했으나 그때마다 과거의 악령이 되살아나 발목을 잡았다. 저자는 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구체적인 일화와 함께 서술해줌으로써 독자가 끝까지 몰입해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