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원본 체제를 되살린 정본 열국지를 지향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가 글항아리의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1964년에 김구용의 『열국지』 번역본이 출판되었으므로 무려 반세기 만에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진 셈이다. 『동주열국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바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다. 수백 개의 제후국이 명멸하고, 수많은 사상가가 온갖 꽃을 피웠으며,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이 역사의 무대를 수놓았다. 지금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오월동주吳越同舟, 대의멸친大義滅親, 화씨지벽和氏之璧, 순망치한脣亡齒寒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사성어도 바로 이 시대에 출현했다. 그야말로 사람의 자취, 즉 인문학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국지연의』의 허구가 3할이라면 『열국지』의 허구는 채 1할이 되지 않는다. 『열국지』의 마지막 정리자인 채원방蔡元放도 「열국지독법列國志讀法」에서 이 소설을 “완전히 정사正史로 간주하여 읽어야지 꾸며낸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서는 안 된다全要把作正史看, 莫作小說一例看了”고 했다.
『열국지』는 정사의 내용을 그대로 채록했음에도 나름의 문학적 배치와 윤색을 통해 소설로서의 읽는 재미를 배가했다. 따라서 『열국지』를 읽으면 채원방의 장담처럼 『춘추』 『좌전』 『국어』 『전국책』을 모두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목차
머리말
해제_ 반세기 만에 『동주열국지』 새 완역본을 내며
서序
제1회 무도하고 어리석은 임금아
제2회 용의 침에 숨은 재앙
제3회 견융의 무리에게 쫓기다
제4회 이것은 무슨 새인가?
제5회 풀을 베어내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제6회 대의를 위해 친아들을 죽이다
제7회 기묘한 정 장공의 지모
제8회 난신적자
제9회 사랑의 계절
제10회 폐위와 옹립
제11회 아버지를 위해 남편을 버리다
제12회 미녀와 개망나니
제13회 침대에서 벌어진 일
제14회 혼비백산한 제 양공
제15회 왜 공자 규를 도왔던가
제16회 날개가 접힌 고니
제17회 절세 미녀를 빼앗다
제18회 제 환공의 화려한 등극
제19회 관중의 시대가 열리다
제20회 여색으로 패망한 진 헌공
제21회 북벌의 시대
제22회 삼환의 등장
부록_ 주요 왕실 계보도
저자
채원방정리,풍몽룡 저자(글),김영문 번역
출판사리뷰
원본 체제를 되살린 정본 열국지를 지향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가 글항아리의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1964년에 김구용의 『열국지』 번역본이 출판되었으므로 무려 반세기 만에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진 셈이다. 『동주열국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바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다. 수백 개의 제후국이 명멸하고, 수많은 사상가가 온갖 꽃을 피웠으며,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이 역사의 무대를 수놓았다. 지금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오월동주吳越同舟, 대의멸친大義滅親, 화씨지벽和氏之璧, 순망치한脣亡齒寒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사성어도 바로 이 시대에 출현했다. 그야말로 사람의 자취, 즉 인문학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주열국지』(이하 『열국지』)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아류 정도로 취급되어왔음도 사실이다. 기실 『열국지』는 다루고 있는 역사가 무척 장구하고 등장하는 인물도 매우 방대하여 소설의 일관된 흐름이나 플롯이 『삼국지』에 비해 조금 약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열국지』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가 장구하고 등장인물이 방대하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처럼 3할의 허구조차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춘추春秋』에 정통했던 풍몽룡馮夢龍은 여소어余邵魚의 『열국지전列國志傳』을 개편하여 『신열국지新列國志』를 간행하면서 『춘추좌전春秋左傳』 『전국책戰國策』 『국어國語』 『여씨춘추呂氏春秋』 『사기史記』 등의 역사책에 게재된 사실史實을 소설의 본문으로 채용했다. 물론 그사이에 풍몽룡의 첨삭과 윤색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의 허구가 3할이라면 『열국지』의 허구는 채 1할이 되지 않는다. 『열국지』의 마지막 정리자인 채원방蔡元放도 「열국지독법列國志讀法」에서 이 소설을 “완전히 정사正史로 간주하여 읽어야지 꾸며낸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서는 안 된다全要把作正史看, 莫作小說一例看了”고 했다. 이것이 글항아리가 『동주 열국지』를 소설이 아니라 인문 고전으로 분류한 이유다.
우리가 『춘추좌전』이나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완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열국지』는 정사의 내용을 그대로 채록했음에도 나름의 문학적 배치와 윤색을 통해 소설로서의 읽는 재미를 배가했다. 따라서 『열국지』를 읽으면 채원방의 장담처럼 『춘추』 『좌전』 『국어』 『전국책』을 모두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열국지전』 언해본이 유행한 이후 1964년에 나온 김구용 번역본이 거의 유일한 완역본으로 『열국지』 독서 시장을 점유해왔다. 따라서 이번 새 번역본에서는 우선 원본 체제에 더 가까운 완역본을 지향하면서 기존 『열국지』 번역본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반세기 전 우리나라에서 『동주열국지』를 처음으로 완역한 김구용은 서문에서 『열국지』를 서양의 그리스 신화에 비견했다.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신화는 서양 인문학의 원천 중 하나다. 서양에서는 나라를 막론하고 그리스 신화를 그들 학문과 사유의 중요한 출발점의 하나로 삼는다. 그렇다고 그리스가 그리스 신화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학자들이 사대주의나 외세 의존주의로 매도되지도 않는다.
체계적이고 다양한 신화가 부족한 중국이나 동아시아에서는 오히려 풍부하게 기록된 역사에 기대 인간 사회의 온갖 양태를 조감하고 해석해왔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와 사상은 그 이후 동아시아 전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마치 그리스 신화가 서양 전체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화제나 논리의 증거로 삼으면 자칫 중화주의나 사대주의로 매도하기도 하는 듯하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는 춘추전국시대나 중국 고전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며 국수주의적 발언을 내뱉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얼마나 편협한 태도인가? 춘추전국시대 역사는 그리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보편적인 공동 유산일 뿐이다. 특히 오늘날 동아시아 인문학에 깊은 자취를 남긴 인간 삶의 중요한 궤적 중 하나다. 그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소설화한 작품이 바로 『동주열국지』다. 우리가 서양인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한 원천을 그리스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동아시아인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한 원천은 『동주열국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글항아리 판 『동주열국지』의 특징
이번 『동주열국지』 번역본의 저본은 중국 청대淸代 광서光緖 14년(1888) 상하이 점석재點石齋에서 간행한 『東周列國志』를 저본으로 삼았는데, 점석재 간행본은 청 건륭乾隆 원년을 전후하여 채원방蔡元放이 정리한 판본을 정교한 석인본으로 재간행한 것이다. 이번 번역에서는 점석재본을 저본으로 했지만 한국 독서 상황에 맞게 소설 원문을 제외한 채원방의 평어나 협주夾註는 모두 생략했다. 책의 앞에 삽입된 인물 그림과 본문의 상황도 또한 점석재본의 것이다.
또, 번역 과정에서 근래에 출판된 판본으로 중국 런민문학출판사에서 1978년에 출판한 『東周列國志』(上·下)를 참조했다. 근래 중국 대륙의 판본이 대부분 간체자로 출판된 것에 비해 이 판본은 번체자(한국 한자 정자)로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인명과 지명 및 서명 옆에 옆줄이 그어져 있어서 정교한 번역을 위해 유용하게 참고했다. 이외에 단락을 나누고 점석재본의 원문을 교감하기 위해 중화서국, 상하이고적출판사, 제노서사齊魯書社, 악록서사岳麓書社 등의 판본을 참조했다.
좀더 자세히 책의 특징을 서술하자면, 인명과 지명은 모두 우리 한자음으로 표기했는데, 작품의 배경이 춘추전국시대이라 현대 중국어보다 우리 한자음이 훨씬 더 중국 고대어 발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대 지명을 표기할 때는 해당 지명을 쓰고 옆에 중국 현대 지명을 병기했으며 설명이 필요할 경우 각주로 처리했다. 더러 상고할 수 없는 지명은 원래의 지명만 썼다. 아울러 중국 고대 인명을 표기할 때 통상적인 한자음과 다르게 읽히는 경우, 고대의 주석서와 한자 자전字典 및 현대 중국어 발음에 의거하여 일일이 근거를 밝혔다. 예를 들면 ‘겸장자鍼莊子’ ‘위엄?掩’ ‘투누오도?穀於?’ ‘양보梁父’ ‘상영向寧’ ‘하무저夏無且’ 등이 그것이다. 성姓은 물론이고 이름 첫 글자에도 모두 우리말 두음법칙을 적용하여 읽었다. 예를 들면 ‘공영孔寧’ ‘채약蔡略’ ‘순역荀?’ ‘피이被離’ 등이 그것이다. 어떤 인명이나 지명이 장마다 처음 나올 때는 먼저 우리말 발음을 표기하고 해당 한자를 병기했다. 또한 각 장 안에서 단락이 자주 바뀌면서 인명이나 지명이 혼동될 우려가 있을 때도 한자를 병기했다.
제후국 이름과 제후의 시호諡號는 제후국의 특징과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모두 띄어 썼다. 예를 들면 ‘진晉 문공文公’ ‘진秦 목공穆公’ ‘진陳 여공?公’ ‘위衛 영공靈公’ ‘위魏 혜왕惠王’ 등이 그것이다.
본문 번역에서 중국 고대 장회소설章回小說에서 쓰이는 상투어 ‘화설話說’ ‘각설却說’ ‘재설再說’ ‘단설單說’ ‘차설且說’ ‘부재화하不在話下’ ‘하문복견下文復見’ ‘불필세설不必細說’ ‘자불필설自不必說’ 등은 따로 직역하지 않고 문맥 속에서 다른 접속사로 처리하기도 하고,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을 때는 생략하기도 했다.
주周나라 천자를 부르는 호칭은 ‘상감’ ‘아바마마’ ‘주상’ 등 우리 왕조 시대의 호칭을 상황에 맞게 사용했다. 그러나 제후국 군주를 부르는 호칭은, 춘추시대 자국의 제후를 부르는 경우 주로 ‘주상’ 또는 ‘주상전하’를 사용했고, 타국의 제후를 부를 때는 ‘군주’ ‘군후’ ‘현후’ ‘명공’ 등을 상황에 맞게 사용했다. 제후가 자신을 지칭하는 경우는 ‘과인’을 사용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에 들어 모든 나라가 ‘왕’을 칭할 때는 자국 타국을 막론하고 ‘대왕마마’란 호칭을 사용했고 경우에 따라 ‘주상’이란 호칭을 섞어 썼다. 두 사람의 대화가 두 번 이상 반복되며 ‘아무개 왈曰’ ‘답왈答曰’ 등의 말이 계속될 경우, 독서의 편의를 위해 ‘아무개 왈’ ‘답왈’을 번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도록 했다.
주 왕실 천자의 계승자는 ‘태자’, 제후국 계승자는 ‘세자’로 구분했지만, 전국시대 후반기에는 모든 나라의 계승자를 ‘태자’로 호칭했다. 마찬가지로 춘추시대 제후국 세자 이외의 아들은 ‘공자公子’, 전국시대 제후국 태자 이외의 아들은 ‘왕자王子’로 호칭했지만 더러 섞어 쓰기도 했다. 제후국 군주의 부인은 ‘부인’ 또는 ‘군부인’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사성어의 경우 해당 부분에서 상세한 설명을 하고 원래의 출처를 밝혔다.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시대 인물의 경우 해당 부분에 주석을 달아 비교적 상세하게 보충 설명했다. 춘추전국시대 인물에 대해서는 『동주열국지 사전』 중 「인물 사전」에서 중요한 행적과 특징을 밝히고 각 등장 장회를 명기했다. 각 제후국에 대해서도 『동주열국지 사전』 중 「제후국 사전」에서 한데 모아 흥망성쇠의 과정을 간단하게 보충 설명했다.
이번 『동주열국지』 번역에서는 기존 번역본의 장회 나눔이 원본과 다른 경우 모두 원본의 형태로 바로잡았고, 기존 번역본에서 빠진 부분과 잘못된 부분도 모두 보충하고 정정했다. 기존의 어떤 번역본보다 원본에 더 가까운 형태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향후 독자들의 질정을 받아 이번 판본을 정식 한국어판 ‘정본’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동주열국지』는 어떠한 고전인가?형성부터 다양한 판본과 인문학적 특징까지
1. 『열국지』의 형성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이하 『열국지』)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하 『삼국지』)와 함께 중국 역사 연의소설演義小說을 대표하는 대하소설의 하나다. 『열국지』는 명대明代 문인 여소어余邵魚에 의해 『열국지전列國志傳』이라는 이름으로 정본화된 이래, 그보다 앞서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정본화된 『삼국지』와 함께 거론되면서 지금까지도 중국 역사소설의 대표작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삼국지』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간행된 것은 명나라 홍치弘治 갑인년甲寅年(1494)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 간행본이다. 『열국지』의 정식 간행본은 이보다 조금 늦은 가정嘉靖·융경隆慶 연간에 여소어余邵魚가 『열국지전』이란 이름으로 간행했다. 지금 남아 있는 『열국지전』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여소어의 족질族侄 여상두余象斗가 만력萬曆 병오년丙午年(1606)에 『열국지전평림列國志傳評林』이란 이름으로 펴낸 중간본重刊本이다. 이후 『삼국지』가 만력 연간에 이탁오李卓吾의 비평을 거쳐 120회본으로 정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국지』도 명말 숭정崇禎 연간(1640년대)에 이르러 풍몽룡馮夢龍의 손을 거치면서 『신열국지新列國志』란 이름의 108회본으로 정착된다. 그러나 『삼국지』 ‘이탁오 비평본’이나 『열국지』 ‘풍몽룡 정리본’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두 소설의 최종본은 아니다. 다시 『삼국지』는 청초淸初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에 의해 지금의 판본으로 완성되었고, 『열국지』는 청 중기 건륭乾隆 원년(1736)을 전후하여 채원방蔡元放에 의해 『동주열국지』란 명칭의 최종 판본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삼국지』는 ‘모종강본’이고, 『열국지』는 ‘채원방본’이다.
이처럼 『열국지』와 『삼국지』의 정본화 과정을 일별해보면 『삼국지』가 조금 앞서고 『열국지』가 그 뒤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가 중국 역사 연의소설의 선하先河를 열었음을 상기해보면 이는 아주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전개 순서로 따져보면 이와는 정반대다. 『열국지』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대체로 주周 선왕宣王 39년(기원전 789)에서 진왕秦王 정政 26년(기원전 221)까지 선진先秦시대 약 550년의 역사다. 『삼국지』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이보다 훨씬 더 늦어서 대체로 후한後漢 말 영제靈帝중평中平 원년 황건적黃巾賊 봉기(184) 때부터 진晉이 오吳를 멸하는 태강太康 원년(280)까지 100년이 채 안 되는 역사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발생은 『열국지』가 최소한 400여 년에서 최대한 970여 년 빠르고, 소설의 완성은 『삼국지』가 대략 70여 년 빠른 셈이다.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이야기의 전승 역사로만 판단해보면 춘추전국시대의 파란만장하고 다양한 인물 및 고사故事가 위魏, 촉蜀, 오吳 삼국시대의 인물이나 고사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부터 중국 민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이 삼국시대의 시작보다 1000년 가까이 일렀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이는 아주 당연한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기가 더 오래된 역사라고 해서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아니며, 시기가 늦다고 해서 모든 이야기가 민간의 환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중국 역사에서 혼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 남북송시대 등을 비교해보더라도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인 춘추전국시대 이야기가 다른 어느 시대의 이야기보다 지금까지 훨씬 더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관포지교管鮑之交, 순망치한脣亡齒寒, 와신상담臥薪嘗膽 등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춘추전국시대 고사성어를 상기해봐도 이런 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문학 서사 텍스트만 들춰봐도 이와 관련된 더욱 분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야기와 삼국시대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는 텍스트로는 『전상평화오종全相平話五種』을 들 수 있다. 『전상평화』는 우리에게 『삼국지』의 가장 오래된 모본母本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元나라 지치至治(1321~1323) 연간에 건안建安(지금의 福建省 建?)에서 우씨虞氏가 간행한 이 판본은 맨 위 3분의 1이 그림으로 되어 있고, 아래 3분의 2는 본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전상평화』의 내용은 나관중이 정본화한 『삼국지통속연의』의 10분의 1 정도에 그치지만 그 주요 내용과 플롯 및 서사의 뼈대는 『전상평화』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삼국지』의 작가로 알고 있는 나관중은 바로 원대에 나온 『전상평화』본 『삼국지』를 바탕으로 내용이 더 풍부하고 세련된 『삼국지통속연의』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전상평화』본에는 『삼국지』의 내용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이 판본의 공식 명칭은 『원지치본전상평화오종元至治本全相平話五種』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상평화』에는 『삼국지』와 간행 형태는 같지만 스토리는 완전히 다른 4종의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삼국지』를 포함한 총 다섯 종의 이야기는 『무왕벌주武王伐紂』 『악의도제칠국춘추후집樂毅圖齊七國春秋後集』 『진병육국秦倂六國』 『여후참한신呂后斬韓信: 續前漢書』 『삼국지三國志』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섯 편 가운데 앞의 3편이 『열국지』와 관련된 내용이고, 『여후참한신』은 지금 우리나라에 출간되어 있는 『초한지楚漢志』와 관련된 내용이다. 평화平話가 창唱 없이 이야기로만 진행하는 민간 공연 양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원대元代와 명대明代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 민간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공연 형식으로 존재했고, 특히 『열국지』와 관련된 내용도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미 당대唐代에 속강俗講의 형태로 공연되던 『오자서변문伍子胥變文』의 대본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춘추전국시대 이야기가 오랜 기간 끊임없이 민중에게 환영받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열국지』의 난점
문제는 삼국시대 이야기보다 훨씬 더 빨리 발생했고 그 이후로도 중국 민간에 오랫동안 다양하게 전해지던 춘추전국시대 이야기가 왜 삼국시대 이야기보다 늦게 정본화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역사 연의소설로서의 『열국지』와 『삼국지』가 각각 어떤 기본 특성을 지니는지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첫째, 두 시기 역사의 길고 짧음과 관계가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지금 『열국지』에서 다루고 있는 기간만 해도 550년에 달한다. 게다가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를 처음 소설로 정본화한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달기?己를 궁궐로 불러들이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므로 무려 800년이 넘는 역사를 소설로 다루고 있다. 이에 비해 『삼국지』가 다루고 있는 기간은 100년이 채 안 되는 97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최단 550년에서 최장 800여 년의 역사를 하나의 소설 흐름에 넣어 플롯을 장치하고 스토리를 꾸려가기 위해서는 숙련된 필력과 끈질긴 노력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산만하고 지루한 구성으로 독서의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당唐·송宋·원元·명明을 거치면서 춘추전국시대 이야기와 삼국시대 이야기가 함께 강사講史 형식으로 공연되었지만, 결국 『삼국지연의』가 가장 먼저 역사 연의소설의 기본 형식과 내용을 갖추게 된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 5~8배 정도 짧은 역사 기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수호전水滸傳』은 명실상부한 역사 연의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두 소설이 다루고 있는 제후국의 숫자도 『열국지』가 『삼국지』보다 텍스트화가 늦어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터이다. 『삼국지』는 제목 그대로 위魏·촉蜀·오吳 세 나라가 중원을 놓고 패권을 다투는 이야기다. 여기에 한漢나라, 진晉나라를 포함하고 남만南蠻 등 주변국을 다 보태도 등장하는 나라는 10여 국에 불과하다. 그러나 『열국지』에는 『삼국지』에 비해 열배가 넘는 110여 국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주요 제후국만 해도 수십 나라에 달한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공연되던 개별 ‘역사 이야기講史’가 하나의 텍스트로 정본화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장기간에 걸친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지』 판본의 최종 완성자인 모종강은 이미 완성된 텍스트 『열국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후인들이 『좌전』과 『국어』를 합하여 『열국지』를 완성했지만 나라가 많고 사건이 번잡하여 그 단락이 나뉘는 곳마다 도대체 앞뒤 맥락을 일관되게 이어갈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삼국연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맥락이 단절되는 곳이 한 곳도 없으므로 그 책 또한 『열국지』의 윗자리에 있는 것이다.”(毛宗崗, 『三國志演義』 「讀法」)
이미 완성된 『열국지』에 대해서조차 이와 같은 지적이 있는 것을 보면 110여 제후국의 역사를 하나의 텍스트에 융합해 넣는 『열국지』의 정본화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삼국지』는 역사 전개의 기간이 채 100년도 안 되고 스토리의 구조도 위, 촉, 오 세 나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열국지』보다는 훨씬 더 쉽게 수미일관한 소설 텍스트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복잡하고 다양한 등장인물도 『열국지』 소설의 정본화가 늦어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단순한 숫자로만 집계해보면 『열국지』에는 무려 2500여 개의 인명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중복된 인명과 전설상의 인물 및 춘추전국시대 이외의 인물을 제외하면 대체로 16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1190여 명이 등장하는 『삼국지』, 830여 명이 등장하는 『수호전』, 970여 명이 등장하는 『홍루몽紅樓夢』과 비교해봐도 인물의 규모가 훨씬 더 방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50년 이상 되는 장구한 역사에 110여 나라의 1650여 명이나 되는 인물을 하나의 텍스트 속에 버무려 넣고 서로 일관된 맥락을 부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열국지』의 최종 판본을 완성하여 『동주열국지』란 이름을 붙인 채원방도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주나라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여정呂政(秦始皇)에 이르기까지 상하 500여 년의 역사에 수십 개의 나라가 명멸했다. 그 수많은 변고와 복잡한 사건, 그리고 잡다한 인물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입으로 쉽게 읽히지도 않아서, 이 시기 역사 읽기의 어려움은 다른 시기의 역사에 비해서 몇 배나 심하다고 할 만하다.”(蔡元放, 『東周列國志』 「序」)
『열국지』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삼국지』보다는 50~80년 늦게 연의소설로서의 정본화 작업이 완성된다. 스토리의 발생은 『열국지』가 『삼국지』보다 400~900년 이상 앞섰지만, 민간 연예로부터 소설 텍스트로 완성된 시기는 『열국지』가 『삼국지』보다 50~80년은 늦은 셈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아 『열국지』는 바로 앞서 연의소설의 선하를 연 『삼국지』의 영향 아래 탄생한 소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몇 가지 난점으로 인해 소설의 구성이나 전개 방식에서는 『삼국지』와 다른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3. 『열국지』의 특성
『열국지』는 『삼국지』와 함께 지금까지도 역사 연의소설의 대표작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정본화의 난점으로 인해 『삼국지』와는 구별되는 수사修辭 전략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실마리는 『삼국지』를 평한 장학성章學誠의 다음 명구에서 찾을 수 있다. “7할은 사실이고 3할은 허구여서, 독자들을 혼란하게 한다.”(章學誠, 『丙辰箚記』)
『문사통의文史通義』 「내편內篇」에서 “육경은 모두 역사다六經皆史”라고 주장한 장학성의 입장에서는 경전뿐만 아니라 문학까지도 모두 역사 또는 사실에 근거해야 함을 역설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청대 고증학의 폐단으로 인해 경전 연구가 자구字句에 대한 지리멸렬한 훈고에 빠졌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육경은 모두 역사다”라는 장학성의 외침은 경전의 역사성과 현실성을 회복하기 위한 선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장학성이 안타까워했던 3할의 허구(상상력)가 『삼국지』의 ‘삼국지다움’을 보증해주는 관건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촉한蜀漢 중심의 연의소설로 재해석하고, 『삼국지』 영웅들의 형상에 문학적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야말로 3할의 허구가 빚어낸 창작 행위였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이 무작위로 점철된 과거의 사건이 상상력에 의해 플롯을 부여받으며 문학으로서의 완전한 구조를 갖추
게 되었다.
그러나 『열국지』는 550년의 장구한 역사, 110개에 달하는 다양한 제후국, 1650명이 넘는 방대한 인물군을 한 부의 소설로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일관된 소설 구조로 플롯을 장치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열국지』는 『삼국지』나 『수호전』처럼 허구 또는 상상력에 의지한 일관된 플롯이나 구조를 버리고 역사적 사실 중심의 스토리 서술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채원방의 진술이 이런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열국지』는 여느 소설과 다르다. 다른 소설은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다. 예컨대 『봉신연의封神演義』 『수호전』 『서유기西遊記』는 완전히 가공으로 꾸며낸 것이다. 『삼국지』가 그래도 사실과 가장 가깝지만 그 속에도 꾸며낸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열국지』는 그렇지 않다. 어떤 역사 사실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진술했고, 어떤 역사 기록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기록했다. 실제 사실조차도 모두 기록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조작된 이야기를 보탤 겨를이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열국지』를 읽는 독자들은 이 소설을 완전히 정사正史로 간주하여 읽어야지 꾸며낸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서는 안 된다”(蔡元放, 『東周列國志』 「讀法」)
소설을 정사로 간주해달라는 이 요청이야말로 『열국지』의 고충이며, 『열국지』의 특징에 다름 아니다. 위에서 채원방도 언급하고 있듯이 “실제 사실조차도 모두 기록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조작된 이야기를 보탤 겨를이 있었겠는가?” 말하자면 『열국지』는 소설이기를 포기하는 자리에서 문학성이 담보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어쩌면 춘추전국시대의 역사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이다. 당시는 수많은 제후국이 다양한 인재를 초빙하여 정치·경제·외교·군사·문화의 역량을 키우고 전쟁을 일삼던 시대였다. 이 때문에 온갖 학파가 다투어 자기 학설을 내세우던 때였으며, 다양한 학문과 뛰어난 인재가 일제히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이 자신의 욕망·권력·이익을 위해 갖은 권모술수와 하극상을 일삼던 시대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형상의 특성이 춘추전국시대에 집대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비록 『열국지』는 『삼국지』처럼 상상력을 발휘할 공간은 부족했지만, 갖가지 역사적 사실과 온갖 인물 군상을 채록하는 것만으로도 문학적 형상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따라서 『열국지』는 전체 플롯은 약하지만 개별 스토리는 강한 ‘옴니버스 대하소설’ 형식의 서사 전략을 채용하고 있는 셈이다.
4. 『열국지』의 정리자
이와 같은 서사 전략으로 『열국지』 정본화 작업을 직접 수행한 문인은 앞서 소개한 대로 여소어, 풍몽룡, 채원방 세 사람이다.
여소어는 대체로 명대 가정·융경 때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생졸년과 활동 상황은 미상이다. 호는 외재畏齋이며 건양建陽(지금의 福建省 建陽) 사람이다. 그의 집안 조카 여상두余象斗가 만력 34년 병오년(1606)에 『열국지전』 중간본 『열국지전평림』 8권본을 간행하면서 그를 가경·융경 때 사람으로 기록했고 융경의 마지막 해가 1572년이므로 적어도 16세기 중후반 중국 동남부 건양 일대에서 활동한 문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그가 활동한 건양은 원대 『전상평화오종』이 판각된 건안 바로 이웃에 위치해 있다. 『전상평화오종』에 포함된 『전상평화삼국지』가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의 모본이 되었음을 상기해보면, 같은 간본刊本에 포함된 『무왕벌주』 『악의도제칠국춘추후집』 『진병육국』 평화본平話本도 여소어의 『열국지전』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오늘날의 통행본인 『동주열국지』와는 달리 주 무왕이 은 주왕을 정벌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진시황이 전국시대 여섯 나라를 병합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여소어의 『열국지전』 초간본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여상두가 다시 펴낸 『열국지전평림』은 그 간행 형태가 『전상평화』본과 거의 같다. 즉 서책 한 면의 윗부분 3분의 1은 그림으로, 아래 3분의 2는 본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내용뿐만 아니라 판각 형태에서도 『전상평화』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여상두의 중간본 외에 진계유陳繼儒가 교감하고 비평한 『진미공비평열국지전陳眉公批評列國志傳』 12권본도 있다. 흔히 『진비열국지전陳批列國志傳』으로 불리는 이 판본은 명 만력 43년 을묘년(1615)에 진계유가 쓴 서문이 붙어 있다. 『진비열국지전』은 진계유의 평어評語를 제외하고는 여상두의 『열국지전평림』과 대동소이하나 판본의 형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상두의 판본이 여소어의 초판 형태를 따라 『전상평화오종』과거의 같은 원시적인 모습으로 되어 있는 반면, 진계유의 판본은 권마다 맨앞에 전면 그림 10폭씩을 판각하여 모두 120폭의 그림을 선보이고 있다.
진계유는 여소어와 여상두의 판각 형태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이후 『열국지』 판본의 전형典型을 확립했다고 할 만하다. 게다가 『진비열국지전』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조선시대 모든 『열국지』 번역본(언해본諺解本)의 저본이 되었다.
『진비열국지전』이 판본 형태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면, 내용면에서는 풍몽룡의 『신열국지新列國志』가 참신한 면모를 드러내 보였다. 여소어가 『열국지전』에서 서주 초기 무왕 시대를 소설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는 것과는 달리, 풍몽룡은 『신열국지』에서 주 선왕宣王의 중흥 시기와 주 평왕平王의 동천東遷 시기를 소설의 들머리로 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풍몽룡은 여소어의 『열국지전』에 포함되어 있는 황당무계한 전설이나 근거가 부족한 사실史實을 『춘추좌전』과 『사기』 등의 정사와 비교하여 교감·삭제한 후 전체 내용을 사실 중심의 108회본으로 정리했다. 풍몽룡에 이르러『열국지』는 명실상부하게 춘추전국시대 열국列國의 역사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열국지』의 편찬자 풍몽룡(1574~1646)은 명말의 학자로 유명한 소설가 겸 민간문학가다. 풍몽룡은 장성하면서 양명학 좌파의 유명한 사상가인 이탁오의 학설에 심취하여 가식과 허례를 배척하고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중시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스런 감정에서 우러나온 민간문학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고, 숭정 3년(1630, 57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공생貢生이 되었다. 숭정 7년(1634) 복건福建 수령壽寧(지금의 福建省 壽寧)의 지현知縣으로 임명되었으나 4년 만에 사직하고 귀향했다. 이후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망하고 의종毅宗이 자결하자 반청反淸 투쟁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고, 청 순치順治 3년(1646) 결국 울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일설에는 청나라 군사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풍몽룡의 관직생활은 불우했지만 학자, 소설가, 민간문학가로서는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명말 민간에서 유행한 민요를 채집하여 『괘지아?枝兒』와 『산가山歌』라는 민요 모음집을 편찬했고, 전기傳奇 공연을 위한 희곡도 직접 써서 『쌍웅기雙雄記』 『만사족萬事足』 등의 창작 극본을 남겼다. 그는 또 명 천계天啓 연간(1621~1627)에 『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驚世通言』 『성세항언盛世恒言』이라는 세 권의 단편 백화소설집을 편찬했다. 이 소설집에는 송, 원 시대 이야기꾼의 대본인 화본과 풍몽룡 자신의 창작이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집은 흔히 『삼언三言』으로 불리며, 이보다 조금 늦게 능몽초凌?初가 편찬한 『양박兩拍』, 즉 『초각박안경기初刻拍案驚奇』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와 함께 『삼언양박』으로 병칭되고 있다. 이 『삼언양박』은 중국 고대 백화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집으로 유명하다. 풍몽룡은 단편소설뿐만 아니라 장편소설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증보삼수평요전增補三遂平妖傳』 『신열국지』 『반고지당우전盤古至唐虞傳』 등을 정리하여 간행했다. 풍몽룡은 또 유가 경전 중에서 『춘추』 연구에도 일가를 이루어 『춘추형고春秋衡庫』 『인경지월麟經指月』 『춘추별본대전春秋別本大全』 『춘추정지참신春秋定旨參新』 등의 저작을 집필했다. 특히 숭정 말년(1640년대)에 이르러 『춘추』에 대한 해박하고 심오한 학식을 바탕으로 여소어의 『열국지전』을 개편하여 이후 『열국지』가 『삼국지』와 더불어 중국 역사 연의소설의 대표작이 되게끔 했다. 이밖에도 풍몽룡은 역대 모사들의 지혜를 정리한 『지낭智囊』이라는 책과 역대 필기소설 및 기타 저작에 보이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모아서 『정사情史』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풍몽룡의 『신열국지』가 나오자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자취를 감췄고, 이후 『신열국지』는 청 중기 건륭 원년(1736)을 전후하여 채원방의 『동주열국지』가 나오기까지 『열국지』 통행본의 주류를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풍몽룡의 『신열국지』를 『동주열국지』로 개편한 채원방은 본명이 오?, 자는 원방元放, 호는 야운주인野雲主人 또는 칠도몽부七都夢夫다.
자세한 생졸년은 미상이며 대체로 말릉?陵(지금의 江蘇省 南京)에서 태어나 청 건륭 연간을 전후하여 말릉과 그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채원방은 『열국지』 최종본인 『동주열국지』를 간행한 것 외에도 진침陳?의 『수호후전水滸後傳』에 평어를 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채원방은 풍몽룡의 통행본인 『신열국지』 108회본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신열국지』의 명백한 오류 몇 가지를 바로잡았으며, 특히 소설 본문의 취지에 맞지 않는 삽입 시 80여 수를 삭제했다. 또한 독자들을 『열국지』의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쓴 「서문」과 「독법」을 소설 맨 앞에 배치해 넣었다. 뿐만 아니라 채원방의 『동주열국지』 판본에는 ‘새로 판각한 정교한 삽화新鐫繡像’가 들어가 있고, 역사 사건에 대한 채원방의 적절한 평어가 비주批注 형식으로 달려 있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더욱 돋운다. 채원방이 정리한 『동주열국지』 판본이 나온 뒤 풍몽룡의 『신열국지』 판본은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동주열국지』에 근거한 수천 종의 방각본이 간행되어 『열국지』 독서계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5. 『열국지』의 조선 전래와 언해본
조희웅曺喜雄의 조사에 따르면 『열국지』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등장하는 조선시대 문헌은 황중윤黃中允(1577~1648)의 「일사목록해逸史目錄解」다. 황중윤이 1577년에 태어나 1648년에 작고했으므로 적어도 1648년 이전에 『열국지』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다음은 홍만종洪萬宗(1643~1725)의 『순오지旬五志』 하下에 『열국지』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몇몇 측면을 종합해보면 『열국지』는 최소한 1648년 이전에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 확실하다. 앞에서도 진술했듯이 여소어의 『열국지전』 중간본은 명 만력 34년 병오년에 나왔고, 또 다른 중간본인 진계유의 『진비열국지전』은 명 만력 43년 을묘년(1615)에 나왔으며, 풍몽룡의 『신열국지』는 명 숭정 말년인 1640년대에 간행되었다. 이에 비추어보면 우리나라에 전래된 『열국지』 판본은 여소어의 『열국지전』 초간본이나 중간본임이 거의 확실하다. 대체로 1640년대에 간행된 풍몽룡의 『신열국지』가 1648년 이전에 시차 없이 조선에 전래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열국지』에 관한 언급이 있는 조선시대 기록으로는 송상기宋相琦(1657~1723)의 『옥오재집玉吾齋集』 권16에 실린 「제망아문祭亡兒文」(1708), 『조선왕조실록』 영조 28년(1752) ‘이양제李亮濟 투서 기사’,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표암유고豹菴遺稿』 권5에 실린 「제열국지題列國志」, 심재沈(1722~1784)의 『송천필담松泉筆譚』에 실린 「삼국연의三國演義」, 이규경李圭景(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제7권에 실린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 등이 있다. 이후 조선 후기에 유행한 『열국지』 번역본(언해본)도 모두 『진비열국지전』 계열의 『열국지전』 중간본을 저본으로 사용했다. 흥미롭게도 풍몽룡의 『신열국지』 판본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채원방의 『동주열국지』가 나온 이후에는 『동주열국지』 계열의 다양한 판본이 전래되어 국내 『열국지』 독서 시장을 석권했다.
무악고소설자료연구회의 『한국고소설관련자료집 2(18세기)』에 따르면 조선시대 『열국지』 번역본의 존재를 알려주는 가장 이른 기록은 송명희宋命熙(?~1773)의 『태우집太愚集』 권3에 실린 「서열국지전후書列國誌傳後」다.
“이 『열국지』 15책은 우리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언해본으로 누가 지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패관잡설로 귀착됨을 벗어나기는 어렵다. 그러나 주나라 시대의 자취를 상고하고자 한다면 이 책을 버려두고 무엇으로 할 수 있겠는가.”
『열국지』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 대체로 1648년 이전이고, 위의 글을 쓴 송명희가 활동한 시기는 1700년대 중반 무렵이므로, 『열국지』 언해본이 나온 시기는 적어도 1700년대 중반 이전이 되는 셈이다. 대체로 추정해보면 『열국지』가 전래된 뒤 100년 정도의 유통 기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열국지』에 대한 우리말 번역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 중후기 민간에는 『열국지』 언해본이 널리 유통되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6~7종의 언해본이 전해지고 있다. 민관동閔寬東과 이재홍李在弘의 연구에 따르면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선문대학교 중한번역문헌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녈국지』 잔본,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츈츄녈국지』(표제: 列國誌) 17권 17책본, 일본 동양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녈국지』(표제: 列國誌) 42권 42책본,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列國誌』 30권 30책본 등이다. 선문대 소장본은 1책 영본零本인데 대체로 전체 17권 중 권14만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열국지』 언해본 중에서 가장 이른 판본으로 확인되며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7책본보다 한 세기 정도 빠른 것으로 추정된다. 이재홍의 연구에 따라 국립중앙도서관 17권 17책본의 필사가 헌종 9년 계묘년(1843)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면 선문대 소장본은 대체로 1700년대 중반쯤 필사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민관동과 이재홍은 위의 판본이 모두 여소어의 『열국지전』 중간본인 진계유의 『진비열국지전』을 번역 저본으로 사용했음을 밝혔으며, 국립중앙도서관 17책본과 일본 동양문고 42책본은 동일한 언해본 계열이고, 영남대 소장 30책본은 또 다른 계열의 언해본임을 입증했다. 『열국지전』이 일찍부터 번역되어 필사 언해본으로 널리 유통된 것과 달리 풍몽룡의 『신열국지』는 언해본뿐만 아니라 원본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열국지전』 계열의 원본과 언해본이 이미 『열국지』 독서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판본인 풍몽룡의 『신열국지』가 그 틈새를 파고들기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1800년대 이후 채원방의 『동주열국지』 판본이 전래되자 언해 필사본을 제외한 『열국지전』 판본도 자취를 감춰 지금 국내 각급 도서관에는 『동주열국지』 계열의 각종 판본만 소장되어 있는 실정이다.
6. 『열국지』의 현대 번역본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채원방의 『동주열국지』가 『열국지』독서 시장의 주류가 되었으나 해방 전후까지 『열국지전』 언해본 이외의 『동주열국지』 우리말 번역본은 나오지 않았다. 『동주열국지』 번역은 1960년대에 들어서야 이루어지기 시작해 먼저 김구용의 『丘庸列國志』(전5권, 語文閣, 1964~1965, 1978), 김동성金東成의 『列國志』(上中下, 乙酉文化社, 1965), 송지영宋志英의 『列國誌』(전5권, 弘新文化社, 1984)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 세 번역본 중 김구용의 번역본이 완역에 가깝고, 나머지 두 번역본은 발췌역에 불과하다. 김구용은 이후에도 출판사를 민음사(10권본, 1995)와 솔(12권본, 2012)로 옮겨 거의 같은 판본을 수정·보완하고 장정을 새롭게 하여 출간을 거듭했다. 이밖에도 이주홍李周洪의 『소설 열국지』(전6권, 語文閣, 1990), 최재우崔宰宇의 『동주열국지』(전8권, 여강출판사, 1991), 김영金榮의 『열국지』(전4권, 배재서관, 1992), 유재주의 『평설 열국지』(전13권, 김영사, 2001), 최이산의 『이산 열국지』(전12권, 신서원, 2003), 고우영의 『고우영 열국지』(전6권, 자음과모음, 2005), 이수광의 『열국지』(전10권, 대산출판사, 2008), 이인호의 『열국지』(큰방, 2012) 등이 출판되었다. 여기서 최재우의 번역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원본 완역과는 거리가 먼 발췌역이거나 평역본 또는 재창작본들이다. 다만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것은 최재우의 번역본이다. 최재우는 중국 국적 조선족 동포 학자로 1985년을 전후하여 중국에서 우리말 번역본을 출간했고, 1991년 그 판본을 서울로 가져와 재출간했다. 말하자면 『동주열국지』 중국 동포판이라고 할 수 있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그는 먼저 김구용의 어문각 번역본을 참고했으므로 그의 번역본에서는 어문각 번역본에 나타난 오류가 많이 바로잡혀 있다. 또한 김구용이 번역하지 않은 매 회回의 제목도 꼼꼼하게 번역하여 명실상부한 완역본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한자로 된 인명이나 지명을 우리말로 읽는 부분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예컨대 차우문且于門은 ‘저우문’으로, 봉축부逢丑父는 ‘방축보’로, 투곡어도鬪穀於?는 ‘투누오도’로, 원파?罷는 ‘위피’로 읽어야 마땅하다. 또 일반명사 역시 연형連衡은 ‘연횡’으로 읽어야 한다. 이런 오류는 무척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아울러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부록이나 참고자료가 매우 부족하다. 앞뒤 속표지에 들어 있는 ‘춘추열국도春秋列國圖’와 ‘전국칠웅도戰國七雄圖’ 및 각권 차례 다음에 제시된 ‘춘추전국 열국흥망표’가 고작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크게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김구용의 번역본과 마찬가지로 『동주열국지』 자체의 오류에 대한 주석도 전혀 없다. 이러저러한 문제점과 사정들로 인해 최재우의 번역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절판되었고, 지금은 시중에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다.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된 『동주열국지』 번역본을 검토해보면 김구용의 『동주열국지』만이 현재 유통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완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김구용의 어문각 번역본이 나온 것이 1964년이므로 현재까지 무려 반 세기 동안 독자들에게 읽혀온 셈이다. 원본에서 벗어난 발췌역, 평역, 재창작본이 만연한 상황에서 김구용의 완역본은 『동주열국지』 원본 이해에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고귀한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고졸古拙한 번역 문체는 화려하고 과장된 수사가 넘쳐나는 다른 번역서에 비해 훨씬 더 진실하고 고아高雅한 맛을 느끼게 해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유일한 완역본’이란 말은 한편으로는 명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유일함으로 인해 『동주열국지』 번역 부문에 끼친 공헌이 독보적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 번역의 오류까지 지속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이번 번역을 위해 솔출판사에서 최근 출간한 새장정본을 꼼꼼하게 검토한 결과 적지 않은 오류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번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에 포함되어 나온 『동주열국지』에서는 김구용이 번역하지 않은 108회의 모든 제목까지 번역했고 김구용 번역본에서 발견된 오류도 고쳐 최대한 원본의 체제에 더 가깝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번역의 독자성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일부러 김구용 번역본을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번역한 뒤 나중에 김구용 번역본과 대조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김구용 번역본의 오류와 이번 번역본의 오류를 서로 비교하여 정확하게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것은 물론 선학의 노고에 힘입은 후학의 편리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 번역본이 김구용 번역본보다 뛰어나다고 감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오류는 훨씬 더 줄였다고 확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