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열국지 세트 - 전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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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세트 - 전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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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 수령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독막로31길 9, 2층
ISBN
9788967352080
출판사
글항아리
저자
풍몽룡
발행일
2015-07-14
동주 열국지 세트 - 전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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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반세기 만의 새로운 번역
고전번역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린 역작
국내 최초이자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동주 열국지 사전』 제작
기존 번역은 물론 원전의 오류까지 잡아낸 정본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가 글항아리의 동양고전 시리즈로 완역되었다. 1964년에 김구용의 『열국지』 번역본이 출판되었으므로 무려 반세기 만에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진 셈이다. 『동주열국지』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바로 중국 춘추전국시대 550년의 역사다. 수백 개의 제후국이 명멸하고, 수많은 사상가가 온갖 꽃을 피웠으며, 각양각색의 인물 군상이 역사의 무대를 수놓았다. 지금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관포지교管鮑之交, 오월동주吳越同舟, 대의멸친大義滅親, 화씨지벽和氏之璧, 순망치한脣亡齒寒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사성어도 바로 이 시대에 출현했다. 그야말로 사람의 자취, 즉 인문학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 『동주열국지 사전』을 별도의 단행본으로 편집하여 독서의 편의를 제공했다.
2) 중국문학 전공자의 장점을 살려 『동주열국지』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백화체白話體 문장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힘썼다.
3) 각주를 통해 가급적 『동주열국지』 자체의 오류를 밝히고자 했다.
4) 통상적인 한자 발음과 달리 읽히는 인명과 지명의 근거를 각주로 밝혔다.
5) 기존 번역본의 장회 나누기가 원본과 다른 경우 모두 원본의 체제로 되돌렸다.
6) 원본의 장회 순서를 그대로 따르고 장회의 제목도 모두 번역했다.
7) 『동주열국지』에 나오는 고사성어의 뜻을 풀고 본래의 출전을 밝혔다.

목차

1권 차례

머리말
해제_ 반세기 만에 『동주열국지』 새 완역본을 내며
서序
제1회 무도하고 어리석은 임금아
제2회 용의 침에 숨은 재앙
제3회 견융의 무리에게 쫓기다
제4회 이것은 무슨 새인가?
제5회 풀을 베어내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제6회 대의를 위해 친아들을 죽이다
제7회 기묘한 정 장공의 지모
제8회 난신적자
제9회 사랑의 계절
제10회 폐위와 옹립
제11회 아버지를 위해 남편을 버리다
제12회 미녀와 개망나니
제13회 침대에서 벌어진 일
제14회 혼비백산한 제 양공
제15회 왜 공자 규를 도왔던가
제16회 날개가 접힌 고니
제17회 절세 미녀를 빼앗다
제18회 제 환공의 화려한 등극
제19회 관중의 시대가 열리다
제20회 여색으로 패망한 진 헌공
제21회 북벌의 시대
제22회 삼환의 등장
부록_ 주요 왕실 계보도

2권 차례

제23회 학으로 오랑캐를 막다
제24회 남북 힘의 균형
제25회 망국의 길
제26회 백리해여, 현명한 자여
제27회 갈비뼈가 통뼈인 사람
제28회 어미의 악행으로 아들까지 죽다
제29회 도륙된 신하들
제30회 진 혜공의 배은망덕
제31회 개자추의 충심
제32회 두 달 동안 방치된 제 환공의 시신
제33회 매복하는 늑대들
제34회 양공이여, 전쟁에서 무슨 인의인가
제35회 하늘이 돕는구나
제36회 잠룡이 승천하다
제37회 불가하오, 불가하오
제38회 역적 놈의 목숨을 내가 거두리라
제39회 유하혜의 계책
제40회 성복전투
제41회 진 문공의 시대가 열리다
제42회 19년 유랑이 헛되지 않았도다
제43회 지혜로움과 노련함
제44회 숙첨의 항거

부록_ 주요 왕실 계보도

3권 차례

제45회 임금의 얼굴에 침을 뱉다
제46회 진秦과 진晉의 격돌
제47회 자줏빛 봉황을 타고
제48회 겨울철 태양과 여름철 태양
제49회 탐욕 끝에 목 잘린 임금
제50회 3년간 날지 않은 새
제51회 어둠 속의 나쁜 손
제52회 한 여자와 세 남자
제53회 밭을 짓밟았다고 소를 빼앗다니
제54회 청백리의 아들
제55회 풀을 묶어 갚은 은혜
제56회 모욕당한 사신의 복수
제57회 조씨 가문의 한 점 혈육
제58회 햇보리 죽을 먹지 못하다
제59회 간신배의 종말
제60회 임금의 아우를 벌하다
제61회 대부를 굶기다니
제62회 맹인 악사의 신통력
제63회 몰락하는 난씨
제64회 적을 죽이는 것이 장수의 본분
제65회 태사의 직필
제66회 간신들의 이전투구

부록_ 주요 왕실 계보도

4권 차례

제67회 초 영왕의 유체이탈 화법
제68회 사기궁의 음악 소리
제69회 여기가 개 나라인가?
제70회 폭군의 최후
제71회 며느리를 취하고 아들을 내쫓다
제72회 하룻밤에 백발이 되다
제73회 어장검 칼날 아래
제74회 잔인하고 악독한 자들
제75회 훈련을 위해 미녀를 죽이다
제76회 오자서의 한풀이
제77회 피눈물로 군사를 빌리다
제78회 성인의 정치
제79회 천하를 떠도는 공자
제80회 고래를 바다에 풀어주다
제81회 오왕 부차, 서시에 빠지다
제82회 내 눈을 파내어 동문에 걸어라
제83회 패망한 오나라
제84회 몸에 옻칠을 하고 숯불을 삼키며
제85회 진晉나라가 삼분되다
제86회 아내의 목을 잘라 대장이 되다
제87회 꽃으로 점을 치다
제88회 손빈, 다리를 잘리다

부록_ 주요 왕실 계보도

5권 차례

제89회 왕비가 된 추녀
제90회 육국 재상의 인수를 차고
제91회 횡행하는 속임수
제92회 함정에 빠진 초 회왕
제93회 닭 울음소리로 관문을 열다
제94회 폭군이 줄을 잇다
제95회 소꼬리에 불을 붙여
제96회 조나라의 두 호랑이
제97회 범수의 복수
제98회 두개골로 쌓은 누대
제99회 임신한 첩을 바치다
제100회 동해를 밟고 들어가 죽을지언정
제101회 주 왕실이 멸망하다
제102회 태자 정이 진왕에 오르다
제103회 진秦과 초楚의 씨도둑질
제104회 양물이 큰 자의 반란
제105회 여불위, 짐독을 마시다
제106회 황금에 눈먼 간신
제107회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었으나
제108회 하나가 된 천하

부록_ 주요 왕실 계보도

『열국지 사전』 차례

머리말

제1장 인물 사전-장회별 등장인물
제2장 제후국 사전
제3장 고사성어 사전
제4장 주요 왕실 계보도
제5장 춘추전국시대 연표
- 춘추시대
- 전국시대
제6장 『동주열국지』 독법-채원방

저자

풍몽룡

출판사리뷰

『삼국지』와 쌍벽을 이루는 역사 연의소설: 마오쩌둥이 애독했던 『열국지』

『동주열국지』 애독자였던 마오쩌둥은 1961년 3월 광저우廣州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중앙공작회의에서 강연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동주열국지』는 기본적으로 정확합니다. 그것은 『좌전左傳』의 내용에 근거하여 개편한 저작입니다. 책을 쓴 사람은 민간 작가이며 포함된 내용에는 왕실 전복 활동이 정말 많습니다.”
마오쩌둥은 역사소설 『동주열국지』가 『좌전』 등 정사를 개편한 저작이므로 내용이 기본적으로 정확하며 춘추전국시대 수많은 공실公室과 왕실의 파란만장한 권력투쟁과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마오쩌둥은 『동주열국지』를 평생 애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반영하듯 1997년 성쉰창盛巽昌은 『마오쩌둥과 동주열국지毛澤東與東周列國志』(광시런민출판사)란 단행본을 출간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동주열국지』는 중국에서 『삼국지연의』의 뒤를 잇는 역사 연의소설로서 명성을 드날리며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동주열국지』(이하 『열국지』)는 『삼국지연의』의 아류 정도로 취급되어왔음도 사실이다. 기실 『열국지』는 다루고 있는 역사가 무척 장구하고 등장하는 인물도 매우 방대하여 소설의 일관된 흐름이나 플롯이 『삼국지』에 비해 조금 약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열국지』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가 장구하고 등장인물이 방대하기 때문에 『삼국지연의』에서처럼 3할의 허구조차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춘추春秋』에 정통했던 풍몽룡馮夢龍은 여소어余邵魚의 『열국지전列國志傳』을 개편하여 『신열국지新列國志』를 간행하면서 『춘추좌전春秋左傳』 『전국책戰國策』 『국어國語』 『여씨춘추呂氏春秋』 『사기史記』 등의 역사책에 게재된 사실史實을 소설의 본문으로 채용했다. 물론 그사이에 풍몽룡의 첨삭과 윤색이 전혀 가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의 허구가 3할이라면 『열국지』의 허구는 채 1할이 되지 않는다. 『열국지』의 마지막 정리자인 채원방蔡元放도 「열국지독법列國志讀法」에서 이 소설을 “완전히 정사正史로 간주하여 읽어야지 꾸며낸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서는 안 된다全要把作正史看, 莫作小說一例看了”고 했다. 이것이 글항아리가 『동주 열국지』를 소설이 아니라 인문 고전으로 분류한 이유다.
우리가 『춘추좌전』이나 『사기』와 같은 역사책을 완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열국지』는 정사의 내용을 그대로 채록했음에도 나름의 문학적 배치와 윤색을 통해 소설로서의 읽는 재미를 배가했다. 따라서 『열국지』를 읽으면 채원방의 장담처럼 『춘추』 『좌전』 『국어』 『전국책』을 모두 읽은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열국지전』 언해본이 유행한 이후 1964년에 나온 김구용 번역본이 거의 유일한 완역본으로 『열국지』 독서 시장을 점유해왔다. 따라서 이번 새 번역본에서는 우선 원본 체제에 더 가까운 완역본을 지향하면서 기존 『열국지』 번역본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반세기 전 우리나라에서 『동주열국지』를 처음으로 완역한 김구용은 서문에서 『열국지』를 서양의 그리스 신화에 비견했다.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신화는 서양 인문학의 원천 중 하나다. 서양에서는 나라를 막론하고 그리스 신화를 그들 학문과 사유의 중요한 출발점의 하나로 삼는다. 그렇다고 그리스가 그리스 신화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학자들이 사대주의나 외세 의존주의로 매도되지도 않는다.
체계적이고 다양한 신화가 부족한 중국이나 동아시아에서는 오히려 풍부하게 기록된 역사에 기대 인간 사회의 온갖 양태를 조감하고 해석해왔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의 역사와 사상은 그 이후 동아시아 전체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는 마치 그리스 신화가 서양 전체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화제나 논리의 증거로 삼으면 자칫 중화주의나 사대주의로 매도하기도 하는 듯하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는 춘추전국시대나 중국 고전의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하며 국수주의적 발언을 내뱉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얼마나 편협한 태도인가? 춘추전국시대 역사는 그리스 신화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보편적인 공동 유산일 뿐이다. 특히 오늘날 동아시아 인문학에 깊은 자취를 남긴 인간 삶의 중요한 궤적 중 하나다. 그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소설화한 작품이 바로 『동주열국지』다. 우리가 서양인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한 원천을 그리스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동아시아인들의 희로애락과 흥망성쇠의 한 원천은 『동주열국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반세기만에 출간하는 『동주열국지』 새 번역본의 특징

이번에 출간하는 『동주열국지』 새 번역본은 번역 정본화를 염두에 두고 꼼꼼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 번역본의 오류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기존 번역본을 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번역한 뒤 나중에 기존 번역본과 대조하는 작업을 거쳤다. 이를 통해 기존 번역본의 오류와 이번 번역본의 오류를 서로 비교하여 정확하게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는 물론 선학의 노고에 힘입은 후학의 편리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새 번역본이 기존 번역본보다 뛰어나다고 감히 장담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오류는 훨씬 더 줄였다고 확언할 수 있다. 새 번역본의 특징을 대략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등장인물 사전」, 「장회별 등장인물」, 「제후국 사전」, 「고사성어 사전」, 「주요 왕실 계보도」, 「춘추전국시대 연표」, 「열국지 독법」 등이 포함된 『동주열국지 사전』을 함께 간행하여 독서에 편의를 제공했다.
『열국지』를 읽을 때 봉착하는 가장 큰 난관은 바로 수많은 등장인물 및 비슷한 이름의 제후국을 어떻게 일목요연하게 인식하느냐이다. 대체로 『동주열국지』에는 무려 2500여 인명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중복된 인명과 전설상의 인물 및 춘추전국시대 이외의 인물을 제외하더라도 대체로 16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1190여 명이 등장하는 『삼국지』, 830여 명이 등장하는 『수호전』, 970여 명이 등장하는 『홍루몽』과 비교해봐도 인물의 규모가 방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동주열국지』에는 110여 개 나라에 달하는 제후국이 등장한다. 『동주열국지』를 읽다보면 누구나 이처럼 방대한 인물의 숲과 제후국의 숲에서 길을 잃기 쉽다. 따라서 이번에 함께 간행된 『동주열국지 사전』은 『동주열국지』의 숲에서 길을 잃은 독자들에게 나침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 새 번역본은 청말 이래 가장 널리 보급된 『동주열국지』 점석재본(點石齋本)(1888)을 번역 저본으로 삼았고, 이와 함께 점석재본에 삽입되어 있는 정교한 인물 삽화 49폭과 내용 삽화 116폭을 권별, 장회별 내용에 맞게 배치해 넣었다. 독자들께서 이들 삽화만 음미해봐도 각 부문별 내용을 짐작할 수 있고 아울러 문자에만 지친 안구에 다소나마 휴식을 제공할 수도 있을 터이다.
3) 기존 번역본의 누락 부분과 오류 부분을 대부분 시정했다. 이 부분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모든 예를 들 수는 없고 대표적인 사례만 몇 가지 제시하고자 한다.

제2회 幽王爲人, 暴戾寡恩, 動靜無常. 方諒陰之時, 狎?群小, ?酒食肉, 全無哀戚之心.
#기존 : 주유왕은 천성이 몹시 난폭하고 은혜를 베풀 줄 모르고 행동마저 제멋대로였다. 그는 겨우 여자를 알면서부터 대수롭지 못한 것들과 사귀었다.
그러므로 상복을 입고도 술과 고기를 삼가지 않았으며 추호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새 번역 : 유왕은 사람됨이 포악하고 각박했으며 행동도 제멋대로였다. 거상居喪 기간에도 후궁들을 가까이하고 음주에 식육까지 하면서 전혀 애통해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았다.

제9회 二來,文姜如花絶色, 魯侯十分愛重. 三朝見廟, 大夫宗婦, 俱來朝見君夫人.
#기존 : 둘째는 문강이 꽃보다 아름다운 절색이어서 좋았다. 노환공은 문강을 지극히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사흘에 한 번 정도로 신하와 만났다. 대부, 종부宗婦도 내궁까지 들어가야만 겨우 주공 양주를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새 번역 : 둘째 문강이 꽃과 같은 절세의 미녀였기 때문이다. 혼례 이후 셋째 날 종묘에 예를 올리고 나자, 종실 대부와 그 부인들이 모두 새 군부인을 알현하러 왔다.

제11회, 제14회
#기존 : 제齊나라가 기紀나라를 정벌하는 대목에서 기紀를 전부 기杞로 표기하고 있다.
#새 번역 : 기紀와 기杞는 완전히 다른 다라이므로 이는 자칫 독자들에게 완전히 잘못된 지식을 심어줄 수 있다.

제12회 祭足假作相?, 先將右手握糾之臂, 左手接杯?地, 火光?裂.
#기존 : 제족은 손을 내밀어 잔을 받는 체하다가 갑자기 옹규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그 술잔을 번개같이 빼앗았다. 제족은 즉시 그 술을 연못에 부었다. 순간 푸른 연못에서 불빛이 번쩍 일어났다.
#새 번역 : 제족은 옹규를 부축하여 일으키는 척하다가 먼저 오른손으로 그의 팔을 잡고 왼손으로는 잔을 받아 땅바닥에 부었다. 땅바닥에서 불꽃이 일었다.

제17회 春秋世?,?弑君不?割?, 可?, 可?!
#기존 : 어지러운 춘추 시대에는 신하가 임금 죽이기를 마치 닭의 목 비틀 듯했으니 공자가 어쩌 군신유의를 강조하지 않을 수 있었으리오?
#새 번역 : 춘추시대는 세상이 혼란하여 임금 시해하기를 닭 잡는 일로도 여기지 않았다. 한탄스럽고도 한탄스러운 일이다. (공자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절인데 공자를 운운하는 건 지나친 번역이다.)

제17회 不一時, 但聞環佩之聲, 夫人?氏盛服而至. 別設?褥, 再拜稱謝. 楚王答禮不迭.
#기존 : 이윽고 환패 소리가 나면서 부인 규씨가 성장하고 들어와 따로 담요를 펴고 초문왕에게 재배했다. 그러나 문왕은 답례도 하지 않았다.
#새 번역 : 잠시 후 먼저 패옥 소리가 들리더니 부인 규씨가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고 잔치 자리에 도착했다. 따로 담요를 편 다음 재배하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초 문왕도 답례 인사를 그치지 않았다.

제17회
#기존
細腰宮裏露桃新,
脈脈無言幾度春?
궁중의 가는 허리 도화인양 어여쁜데,
은근하구나! 말없이 몇 봄을 지났던고?

#새 번역
세요궁 안 복사꽃이 이슬 맞아 새로운데,
묵묵히 침묵하며 몇 봄이나 보냈던가?

제19회 ?公復治逐君之罪, 殺公子閼. ??避於叔詹之家, 叔詹爲之求生, 乃免死, ?其足.
#기존 ; 정여공은 또 지난날 임금을 쫓아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고 공자 알閼을 죽였다. 그러나 숙첨 만은 숙청하지 않았다. 숙첨이 목숨을 애걸한 때문이었다. 정여공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그러나 정여공은 숙첨을 살려주는 대신 숙첨의 다리를 끊었다.
#새 번역 : 정여공은 또 임금을 쫓아낸 죄를 물어 공자 알閼을 죽였다. 또 강서??가 숙첨의 집에 피신해오자 숙첨은 그를 살려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죽이지 않는 대신 그(강서)의 발을 잘랐다.

제22회 是日, 魯南門無故自崩, 識者以爲高而忽傾, 異日必有凌替之禍, 兆已見矣.
#기존 : 어느 날, 노성魯城 남문이 무너졌다. 사람들은 장차 높은 것이 무너질 징조라고 했다. 노나라를 장차 또 어떻게 될 것인가?
#새 번역 : 이날 노나라 남문이 아무 까닭도 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식자들은 높은 것이 갑자기 무너졌으므로 훗날 반드시 나라가 쇠락하는 참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 조짐이 벌써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24회 若出於東方,?東夷梗路,恐不堪戰,將若之何?
#기존 : 그러나 만일 동쪽 길로 돌아가면 길은 험하고 먼지라, 그렇지 않아도 지친 군대가 더욱 지칠까 두렵습니다. 늘 군사를 아끼고 돌봐주지 않으면 다음날 싸움에 지장이 많습니다.
#새 번역 : 그런데 만약 동방으로 나갔다가 동이의 족속들이 길을 막으면 전쟁을 감당하지 않고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26회 姜戎子吾離,桀?侵掠.
#기존 : 이때 강융姜戎의 융주 오리五離가 목鶩 땅을 침범해왔다.
#새 번역 : 강융姜戎의 군주 오리吾離가 함부로 침략해오자,

제27회 賈華原無必獲夷吾之意, 及兵到, 故緩其圍, 使人陰告夷吾曰
#기존 : 가화도 꼭 이오를 잡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군사를 거느리고 굴성을 포위했을 뿐 공격하진 않았다. 그리고 가화는 화살에 서신을 꽂아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그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새 번역 : 가화는 원래 이오를 잡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군사를 몰고 와서도 포위를 느슨하게 하고는 몰래 이오에게 사람을 보내 말했다.

제29회 不有所廢, 君何以興? 欲加之罪, 何患無辭?
#기존 : 해제와 탁자가 살아 있다면 상감이 어찌 지금 군위에 올랐을까 보냐! 그런데 이제 신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하니, 내 죽는 마당에 무슨 말을 못하리오.
#새 번역 : 저들을 폐위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주상이 어찌 일어날 수 있었겠소? 내게 죄를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어찌 핑곗거리가 없겠소?

제30회  晉惠公使郭偃卜車右. 諸人莫吉, 惟慶鄭爲可.
#기존 : 한편 진혜공은 곽언에게 지휘를 맡기려 했다. 좌우 장수들이 태사 벼슬에 있는 곽언에게 지휘를 맡기는 것은 적절한 조치가 아니라고 간했다. 경정만이 앞으로 나아가 찬동한다.
#새 번역 : 혜공은 태복 곽언을 시켜 거우車右에 누구를 임명하면 좋을지 점을 쳐보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불길하다고 나왔는데, 오직 경정만 길하다고 나왔다.

제35회 聳身一躍, 離地約五尺許, 那獸就地打一滾, 又?在一邊.
#기존 : 그는 몸을 날려 땅바닥에서 한 5척 가량 공간에 솟았다가 내려오면서 주먹으로 맥의 정수리를 힘껏 쳤다. 꼿꼿이 섰던 맥은 한 대 얻어맞고 유유히 나무 밑으로 가서 의젓이 쭈그리고 앉았다.
#새 번역 : 그가 몸을 한 번 솟구쳐 약 다섯 자 높이까지 뛰어올랐다. 그 짐승도 땅에서 한 바퀴 구르더니 한 쪽 옆에 도사리고 앉았다.

제37회 母以子貴, 子以母貴.
#기존 : 어미만큼 자식을 귀여워하는 사람이 없고, 자식도 어미를 따른다.
#새 번역 : 어미는 자식 때문에 귀하게 되고, 자식은 어미 때문에 귀하게 된다.

제37회 褒?申?, 服?臼怖.
#기존 : 옛날에 포사褒?는 신생申生을 내쫓았고, 갖은 영화를 누리면서도 무섭다고 하였도다.
#새 번역 : 포사가 들어오니 신후는 쫓겨났고, 백복이 기뻐하자 의구는 두려웠네.

제46회 來者不懼,懼者不來
#기존 : 오는 자는 두렵지 않다. 두려운 것은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자다.
#새 번역 : 공격해오는 자는 두려움이 없으며, 두려워하는 자는 공격해오지 못한다.

제48회 嚴令司寇緝獲, 五日一比.
#기존 : 금부도사禁府都事 즙획緝獲은 닷새 안으로 그 도둑을 잡아 바치어라.
#새 번역 : 그는 사구에게 엄명을 내려 닷새 안에 범인을 잡아들이게 했다.

제49회 襄夫人心?之, 醉以酒, 因逼?之通. ?以扶立?君. 遂欲?昭公而立公子?,
#기존 : 왕희는 마음 속으로 공자 포를 은근히 사랑했다. 한번은 공자 포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함께 술을 마시다가 취하자 왕희는 손자뻘인 공자 포에게 정을 나누자고 덤벼들었다. 할머니가 흥분해서 덤벼드는 바람에 공자포는 깜짝 놀라 빌다시피 거절하고 겨우 그 방을 뛰어나왔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는 왕희의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드디어 왕희는 송소공을 내쫓고 포를 임금 자리에 세우기로 결심했다.
#새 번역 : 양부인은 마음속으로 그를 사랑하다가 술을 먹여 만취하게 만든 뒤 그와 사통했다. 그를 보위에 올려주겠다고 약속한 양부인은 소공을 폐위하고 공자 포를 임금 자리에 앉히려 했다.

제50회 人叢中一人彈去了半只耳?, 一個彈中了左胛,
#기존 : 군중 속에 서 있는 백성의 한쪽 귀를 맞혔다. 그리고 또 하나의 탄알은 백성의 불알을 맞혔다.
#새 번역 : 구경꾼 중에서 한 사람이 탄알을 맞고 귀가 반쪽 날라갔다. 또 한 사람은 왼쪽 어깨에 탄알을 맞았다.

제53회 夢中大驚, 自此亦得暴疾卒.
#기존 : 의행보는 기절초풍하여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잠을 깼다. 그러나 그는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죽었다.
#새 번역 : 의행보는 꿈속에서 대경실색하여 그때부터 폭질暴疾에 걸려 죽었다.

제63회 晉兵若至, 便與交戰, 未必便輸與他.
#기존 : 양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싸웁시다. 고분고분 그놈에게 붙들려 갈 필요는 없습니다.
#새 번역 : 진나라 군사가 당도하면 바로 교전이 벌어질 터인데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소.

제64회 汝生而無義, 死而無名, 雖在‘五乘之賓’, 人孰不笑汝? 汝勉之, 君命不可逃也!
#기존 : 너는 이 세상에 태어난 후로 의로운 일을 한 것이 전혀 없다. 이러고 산다면 너는 죽어도 후세에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너는 오승지빈과 동등한 대접을 받지 못해서 다른 곳으로 간다지만, 세상 사람들은 너를 용기없는 사람이라 비웃을 것이다. 자고로 임금의 명령은 거역하는 법이 아니니라.
#새 번역 : 너는 살아서 대의를 실천하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비록 오승지빈에 들어간다 해도 남들이 어찌 너를 비웃지 않겠느냐? 너는 마땅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임금의 명령에서 도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제71회 古先王春則省耕, 補其不足. 夏則省斂, 助其不給. 君何不法之?
#기존 : 그러므로 옛 어진 왕들은 백성들에게서 받아들인 곡식으로 사치를 하지 않았고, 봄가을로 창고의 곡식을 펴서 가난한 백성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상감께선 왜 그런 좋은 일을 하지 않으십니까?
#새 번역 : 옛날 선왕들은 봄이면 백성의 밭갈이를 직접 살피며 부족한 것을 보충해주었고, 여름이면 수확할 곡식을 직접 살피며 모자라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주상께선 어찌 이 좋은 방법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제74회 疏不間親, 遠不間近.
#기존 : 그 나라 사람이라야 그 나라 사람이 따른다고 합니다.
#새 번역 :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관계가 친밀하고 가까운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제74회 #기존 번역본에서 번역하지 못한 부분. 「보검명(寶劍銘)」
#새 번역
오악의 정기 받은 깨끗한 쇠와 五山之精,
육기六氣의 기운 서린 고운 황금을 六氣之英.
정련하고 벼려내어 신검 만드니 煉爲神器,
번갯불이 서리처럼 스며들었네 電燁霜凝.
무지갯빛 음검陰劍은 물결 무늬이고 虹蔚波映,
용 같은 양검은 거북 무늬일세 龍藻龜文.
쇠와 옥을 자를 정도로 날카로우니 斷金切玉,
그 위엄이 삼군을 진동한다네 威動三軍.

제81회 夫人燕姬有子而夭, 諸公子庶出者凡六人,
#기존 : 원래 제경공의 부인 연희燕姬는 일찍이 아들을 낳다가 죽었다. 그후에 제경공은 많은 애지중지하는 첩妾을 거느렸기 때문에 아들 여섯이 모두 서출이었다.
#새 번역 : 제 경공은 그의 정실부인 연희燕姬에게서 아들을 보았으나 요절했고, 첩에게서 태어난 서자 여섯 명을 두었다.

제82회
#기존
공자는 성인으로 탄생하사 尼丘誕聖,
노나라 궐리 땅에 살면서 그 위대함을 나타내셨도다. 闕里生德.
칠십 평생을 학문과 덕으로 일관하셨고 七十升堂,
모든 것에 이치를 밝히셨도다 四方取則.
덕을 펴는 것과 처벌하는 것을 겸전하사 行誅兩觀,
협곡 땅에서 이를 실천하셨도다 攝相夾谷.
봉황을 보지 못하사 탄식하셨고 歎鳳遽衰,
죽은 기린을 보고 우셨도다 泣麟何促.
천하가 다 공자를 우러러 거울로 삼고 九流仰鏡,
천추만세로 사람들이 모두 숭배하는도다 萬古欽?.

#새 번역
이구산에서 성인이 탄강하시어 尼丘誕聖,
궐리에서 덕망을 키우셨도다 闕里生德.
칠십 명의 제자가 성취 이뤘고 七十升堂,
사방에서 법도를 본받았도다 四方取則.
대궐에서 소정묘를 주살했고 行誅兩觀,
협곡에서 회맹을 도우셨도다 攝相夾谷.
봉황의 노쇠함을 탄식하더니 歎鳳遽衰,
기린 보고 우는 일이 금방 닥쳤네 泣麟何促.
제자백가 거울처럼 우러러보고 九流仰鏡,
만고토록 그 자취 흠모한다네 萬古欽?.

제85회 話說趙無恤被豫讓三擊其衣, 連打三個寒?,
#기존 : 조양자趙襄子는 예양豫讓이 세 번 내리친 칼자국마다 피가 번져 있는 자기 도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새 번역 : 조무휼은 자신의 옷이 예양의 칼에 세 번 베일 때 자신도 모르게 세 번 연이어 몸서리를 쳤다.

제91회 乃許魏還襄陵等七城以講和. 魏亦使人報秦之聘, 復以女許配秦太子.
#기존 : 이에 진나라는 지난날 위나라에서 뺏은 양릉襄陵 등 일곱 고을의 성을 돌려주기로 하고, 위양왕魏襄王에게 우호를 청했다. 잃었던 옛 땅으르 돌려준다는 말에 위왕은 귀가 솔깃해져서 곧 진나라로 사신을 보내 우호를 맺었다.
그후 진혜문왕은 다시 연燕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자기 딸과 연나라 세자를 혼인시키는데 성공했다.
#새 번역 : (진 혜문왕은) 위나라에 양릉 등 일곱 개 성을 돌려준다고 하며 강화를 요청했다. 위나라도 진나라에 답례 사절을 보내고 위나라 군주의 딸을 진나라 세자에게 시집보냈다.

제100회 燕則吾不知, 若魏, 則吾乃大梁人也,先生又烏能使吾助趙乎?
#기존 : 나는 연나라에 관해서는 모르겠소. 그러나 바로 위나라 사람인 나도 못하는 일을 선생이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새 번역 : 연나라는 잘 모르지만 위나라라면 내가 좀 알고 있소. 나는 대량 사람이기 때문이오. 선생께선 어찌하여 내게 조나라를 도우라고 하시오?

제102회 君第戒車, 我二人當力勸之.
#기존 : 그대는 수레를 준비하고 기다리오. 우리 두 사람이 신릉군에게 적극 권하겠소.
#새 번역 : 신릉군의 저택에서는 외부인의 수레를 경계하니, 우리 두 사람이 힘을 다해 설득해보겠소.

제106회 所識有田光先生, 其人智深而勇?, 且多識異人,
#기존 : 그러나 신이 전광田光이란 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전광 선생은 측량할 수 없는 지혜를 갖추고 있고 용기가 절등하며 아는 것이 많은 이인異人입니다.

#새 번역 : 다만 신이 알고 있는 전광田光 선생이란 분은 지혜도 깊고 용력도 뛰어날 뿐만 아니라 이인異人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4) 『동주열국지』 자체 오류도 60여곳 밝혀내어 각주로 달았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경우다.
제5회 그 아들 임林1)이 보위를 이으니
---각주 1) 『사기』 「주본기周本紀」에 따르면 본래 주 평왕의 태자는 맏아들 예보洩父였으나 일찍 죽었다. 그 후 둘째 아들 호狐가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평왕 사후 보위에 올랐다. 그러나 슬픔이 지나쳐 보위에 오른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그 후 예보의 아들 임林이 보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주 환왕이다. 따라서 임은 호의 아들이 아니라 예보의 아들이다.

제108회 왕분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하여 함락시킨 뒤 연왕 희를 포로로 잡아 함양으로 압송했다.2)
---각주 2) 연왕 희가 진나라의 공격을 받고 도주하여 우리나라 평양에 도읍을 정했다는 학설과 진秦나라 장수 왕전이 압록강을 건너 평양을 함락시키고 연왕 희를 잡아갔다는 학설은 중국 측의 잘못된 인식에 불과하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연왕 희 29년 진秦나라가 연나라 계성을 함락시키자 연왕은 도망쳐서 요동으로 옮겨 거주했고, 태자 단을 죽여서 진나라에 바쳤다. 30년에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33년 진나라가 요동을 함락시키고 연왕 희를 포로로 잡으면서 마침내 연나라를 멸망시켰다二十九年, 秦攻拔我?, 燕王亡, 徙居遼東, 斬丹以獻秦. 三十年, 秦滅魏. 三十三年, 秦拔遼東, 虜燕王喜, 卒滅燕.”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 연왕 희는 요동으로 도망쳤다가 그곳에서 진나라 군사에게 잡혀간 것이 확실하다.

5) 『동주열국지』에 상당 부분 섞여 있는 백화체(白話體) 어휘의 어감을 살렸다. 『동주열국지』의 문체는 중국 고문이 바탕이 되고 있지만 상당히 많은 부분에 당시 구어(口語)인 백화체 어투가 섞여 있다. 이는 중국의 연의소설이 대중 공연 양식인 강사(講史)에서 소설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이다. 기존 번역본에서는 백화체 어휘를 마치 한자어처럼 뜻으로만 해석하여 그 고유의 뉘앙스를 살리지 못했다. 이 경우도 매우 많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제1회 據臣愚見, 國家恐有弓矢之變.
#기존 :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국가에 궁시지변弓矢之變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새 번역 : 신臣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국가에 아마도 궁시弓矢(활과 화살)로 인한 변고가 있을 듯합니다.

제40회 老賊, 老賊! 今日不是?就是我, 定要?個死活!
#기존 : 늙은 도적아, 어디 두고 보자! 내 너와 사생결단을 내리라.
#새 번역 : 이 늙은 도적놈! 이번엔 양단간에 사생결단을 내겠다!

제51회 ?口出大言, 必有些本事, 好?由?射來!
#기존 : 이놈!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말아라!
#새 번역 : 허풍은 대단하다만 실력을 보자꾸나. 맞추고 못 맞추고는 네 놈 손에 달려 있다!

제51회 那里一箭便射得正中? 若一箭不中, 我便喝住他.
#기존 : 번역 누락
#새 번역 : 어떻게 단 한 발로 나를 명중시킬 수 있겠느냐? 만약 한 발로 명중시키지 못하면 내가 욕설을 퍼부어 꼼짝 못하게 할 것이다.

제54회 汝若再來, 先敎?吃我一劍.
#기존 : 네 다시 이곳에 오는 날이면, 이 칼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새 번역 : 네놈이 만약 이곳에 다시 왔다간 먼저 내 칼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제63회 晉兵若至, 便與交戰, 未必便輸與他.
#기존 : 양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오거든 싸웁시다. 고분고분 그놈에게 붙들려 갈 필요는 없습니다.
#새 번역 : 진나라 군사가 당도하면 바로 교전이 벌어질 터인데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소.(반드시 그를 패배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6) 기존 번역본의 장회나누기가 원본과 다른 경우, 모두 원본 형태로 되돌렸다. 기존 번역본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13곳에서나 장회나누기가 원본과 다르게 되어 있다. 즉 제8회, 제10회, 제34회, 제36회, 제39회, 제43회, 제45회, 제49회, 제56회, 제62회, 제75회, 제81회, 제84회의 장회나누기가 중국 원본과 상이하다.
이 새 번역본은 번역 정본화를 지향하는 만큼 이를 모두 원본의 형태로 되돌렸고, 각 장회의 제목까지 일일이 번역했다.
7) 통상적인 한자 발음과 달리 읽히는 인명과 지명의 근거를 밝혔다. 이런 사례도 매우 많으므로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들어보겠다.

제20회 투누오도?穀於?14)
---각주 14) 투누오도鬪穀於?: 『춘추경전집해』 장공 30년에 ‘?穀於?’의 발음을 다음과 같이 달고 있다. “‘穀’는 발음이 ‘누奴走切’다. 초나라 사람은 젖을 ‘누穀’라고 한다. 『한서』에는 ‘?’라고 되어 있는데, 발음은 같다. ‘於’는 발음이 ‘오烏’다. ‘?’는 발음이 ‘도徒’다穀奴走切. 楚人謂乳曰穀. 漢書作?, 音同. 於, 音烏, ?, 音徒.” 『한서』 「서전敍傳」 제70에는 ‘?穀於?’의 이름 유래를 설명하는 대목에 “초나라 사람은 젖을 ‘누?’라 하고, 호랑이를 ‘오도於?’라고 한다. 그래서 이름을 ‘누오도?於?’라고 했다楚人謂乳‘?’,謂虎‘於?’,故名‘?於?’ ”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穀’는 형태가 비슷한 ‘?’의 가차자임을 알 수 있고, ‘?穀於?’의 발음도 ‘투곡오토’나 ‘투곡오도’가 아니라 ‘투누오도’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투누오도’는 호랑이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로 알려져 있다. 바로 뒤이은 본문에도 나온다.

제64회 저우문且于門6)
---각주 6) 저우문且于門: 산동성 거현에 있던 춘추시대 거?나라 도성의 성문. ‘且’는 지명이나 인명으로 쓰일 때 ‘저雎’와 통용된다. 그러므로 ‘차’가 아니라 ‘저’로 읽어야 한다.(『한어대자전漢語大字典』)

『동주열국지』는 어떠한 고전인가?형성부터 다양한 판본과 인문학적 특징까지

1. 『열국지』의 형성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이하 『열국지』)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이하 『삼국지』)와 함께 중국 역사 연의소설演義小說을 대표하는 대하소설의 하나다. 『열국지』는 명대明代 문인 여소어余邵魚에 의해 『열국지전列國志傳』이라는 이름으로 정본화된 이래, 그보다 앞서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정본화된 『삼국지』와 함께 거론되면서 지금까지도 중국 역사소설의 대표작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삼국지』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간행된 것은 명나라 홍치弘治 갑인년甲寅年(1494)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가정嘉靖 임오년壬午年(1522) 간행본이다. 『열국지』의 정식 간행본은 이보다 조금 늦은 가정嘉靖·융경隆慶 연간에 여소어余邵魚가 『열국지전』이란 이름으로 간행했다. 지금 남아 있는 『열국지전』의 가장 오래된 판본은 여소어의 족질族侄 여상두余象斗가 만력萬曆 병오년丙午年(1606)에 『열국지전평림列國志傳評林』이란 이름으로 펴낸 중간본重刊本이다. 이후 『삼국지』가 만력 연간에 이탁오李卓吾의 비평을 거쳐 120회본으로 정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국지』도 명말 숭정崇禎 연간(1640년대)에 이르러 풍몽룡馮夢龍의 손을 거치면서 『신열국지新列國志』란 이름의 108회본으로 정착된다. 그러나 『삼국지』 ‘이탁오 비평본’이나 『열국지』 ‘풍몽룡 정리본’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이 두 소설의 최종본은 아니다. 다시 『삼국지』는 청초淸初 강희康熙 18년(1679)에 모종강毛宗崗에 의해 지금의 판본으로 완성되었고, 『열국지』는 청 중기 건륭乾隆 원년(1736)을 전후하여 채원방蔡元放에 의해 『동주열국지』란 명칭의 최종 판본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삼국지』는 ‘모종강본’이고, 『열국지』는 ‘채원방본’이다.
이처럼 『열국지』와 『삼국지』의 정본화 과정을 일별해보면 『삼국지』가 조금 앞서고 『열국지』가 그 뒤를 잇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지』가 중국 역사 연의소설의 선하先河를 열었음을 상기해보면 이는 아주 당연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전개 순서로 따져보면 이와는 정반대다. 『열국지』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대체로 주周 선왕宣王 39년(기원전 789)에서 진왕秦王 정政 26년(기원전 221)까지 선진先秦시대 약 550년의 역사다. 『삼국지』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 이보다 훨씬 더 늦어서 대체로 후한後漢 말 영제靈帝중평中平 원년 황건적黃巾賊 봉기(184) 때부터 진晉이 오吳를 멸하는 태강太康 원년(280)까지 100년이 채 안 되는 역사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발생은 『열국지』가 최소한 400여 년에서 최대한 970여 년 빠르고, 소설의 완성은 『삼국지』가 대략 70여 년 빠른 셈이다. 따라서 당연한 말이지만 이야기의 전승 역사로만 판단해보면 춘추전국시대의 파란만장하고 다양한 인물 및 고사故事가 위魏, 촉蜀, 오吳 삼국시대의 인물이나 고사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부터 중국 민간에 광범위하게 유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시작이 삼국시대의 시작보다 1000년 가까이 일렀다는 사실을 감안해보면 이는 아주 당연한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시기가 더 오래된 역사라고 해서 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은 아니며, 시기가 늦다고 해서 모든 이야기가 민간의 환영을 받는 것도 아니다. 중국 역사에서 혼란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시대, 오대십국시대, 남북송시대 등을 비교해보더라도 그중 가장 이른 시기인 춘추전국시대 이야기가 다른 어느 시대의 이야기보다 지금까지 훨씬 더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다. 관포지교管鮑之交, 순망치한脣亡齒寒, 와신상담臥薪嘗膽 등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춘추전국시대 고사성어를 상기해봐도 이런 사정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문학 서사 텍스트만 들춰봐도 이와 관련된 더욱 분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야기와 삼국시대 이야기가 함께 들어 있는 텍스트로는 『전상평화오종全相平話五種』을 들 수 있다. 『전상평화』는 우리에게 『삼국지』의 가장 오래된 모본母本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원元나라 지치至治(1321~1323) 연간에 건안建安(지금의 福建省 建?)에서 우씨虞氏가 간행한 이 판본은 맨 위 3분의 1이 그림으로 되어 있고, 아래 3분의 2는 본문 내용으로 되어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전상평화』의 내용은 나관중이 정본화한 『삼국지통속연의』의 10분의 1 정도에 그치지만 그 주요 내용과 플롯 및 서사의 뼈대는 『전상평화』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삼국지』의 작가로 알고 있는 나관중은 바로 원대에 나온 『전상평화』본 『삼국지』를 바탕으로 내용이 더 풍부하고 세련된 『삼국지통속연의』를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전상평화』본에는 『삼국지』의 내용만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이 판본의 공식 명칭은 『원지치본전상평화오종元至治本全相平話五種』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상평화』에는 『삼국지』와 간행 형태는 같지만 스토리는 완전히 다른 4종의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삼국지』를 포함한 총 다섯 종의 이야기는 『무왕벌주武王伐紂』 『악의도제칠국춘추후집樂毅圖齊七國春秋後集』 『진병육국秦倂六國』 『여후참한신呂后斬韓信: 續前漢書』 『삼국지三國志』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섯 편 가운데 앞의 3편이 『열국지』와 관련된 내용이고, 『여후참한신』은 지금 우리나라에 출간되어 있는 『초한지楚漢志』와 관련된 내용이다. 평화平話가 창唱 없이 이야기로만 진행하는 민간 공연 양식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원대元代와 명대明代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 민간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이야기가 공연 형식으로 존재했고, 특히 『열국지』와 관련된 내용도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게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미 당대唐代에 속강俗講의 형태로 공연되던 『오자서변문伍子胥變文』의 대본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춘추전국시대 이야기가 오랜 기간 끊임없이 민중에게 환영받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열국지』의 난점
문제는 삼국시대 이야기보다 훨씬 더 빨리 발생했고 그 이후로도 중국 민간에 오랫동안 다양하게 전해지던 춘추전국시대 이야기가 왜 삼국시대 이야기보다 늦게 정본화되었느냐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역사 연의소설로서의 『열국지』와 『삼국지』가 각각 어떤 기본 특성을 지니는지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첫째, 두 시기 역사의 길고 짧음과 관계가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지금 『열국지』에서 다루고 있는 기간만 해도 550년에 달한다. 게다가 춘추전국시대 이야기를 처음 소설로 정본화한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은殷나라 주왕紂王이 달기?己를 궁궐로 불러들이는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므로 무려 800년이 넘는 역사를 소설로 다루고 있다. 이에 비해 『삼국지』가 다루고 있는 기간은 100년이 채 안 되는 97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최단 550년에서 최장 800여 년의 역사를 하나의 소설 흐름에 넣어 플롯을 장치하고 스토리를 꾸려가기 위해서는 숙련된 필력과 끈질긴 노력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산만하고 지루한 구성으로 독서의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당唐·송宋·원元·명明을 거치면서 춘추전국시대 이야기와 삼국시대 이야기가 함께 강사講史 형식으로 공연되었지만, 결국 『삼국지연의』가 가장 먼저 역사 연의소설의 기본 형식과 내용을 갖추게 된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 5~8배 정도 짧은 역사 기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수호전水滸傳』은 명실상부한 역사 연의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둘째, 두 소설이 다루고 있는 제후국의 숫자도 『열국지』가 『삼국지』보다 텍스트화가 늦어진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터이다. 『삼국지』는 제목 그대로 위魏·촉蜀·오吳 세 나라가 중원을 놓고 패권을 다투는 이야기다. 여기에 한漢나라, 진晉나라를 포함하고 남만南蠻 등 주변국을 다 보태도 등장하는 나라는 10여 국에 불과하다. 그러나 『열국지』에는 『삼국지』에 비해 열배가 넘는 110여 국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주요 제후국만 해도 수십 나라에 달한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공연되던 개별 ‘역사 이야기講史’가 하나의 텍스트로 정본화되고 통합되는 과정에서 장기간에 걸친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지』 판본의 최종 완성자인 모종강은 이미 완성된 텍스트 『열국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후인들이 『좌전』과 『국어』를 합하여 『열국지』를 완성했지만 나라가 많고 사건이 번잡하여 그 단락이 나뉘는 곳마다 도대체 앞뒤 맥락을 일관되게 이어갈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삼국연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맥락이 단절되는 곳이 한 곳도 없으므로 그 책 또한 『열국지』의 윗자리에 있는 것이다.”(毛宗崗, 『三國志演義』 「讀法」)
이미 완성된 『열국지』에 대해서조차 이와 같은 지적이 있는 것을 보면 110여 제후국의 역사를 하나의 텍스트에 융합해 넣는 『열국지』의 정본화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삼국지』는 역사 전개의 기간이 채 100년도 안 되고 스토리의 구조도 위, 촉, 오 세 나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열국지』보다는 훨씬 더 쉽게 수미일관한 소설 텍스트로 완성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복잡하고 다양한 등장인물도 『열국지』 소설의 정본화가 늦어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단순한 숫자로만 집계해보면 『열국지』에는 무려 2500여 개의 인명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중복된 인명과 전설상의 인물 및 춘추전국시대 이외의 인물을 제외하면 대체로 16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1190여 명이 등장하는 『삼국지』, 830여 명이 등장하는 『수호전』, 970여 명이 등장하는 『홍루몽紅樓夢』과 비교해봐도 인물의 규모가 훨씬 더 방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550년 이상 되는 장구한 역사에 110여 나라의 1650여 명이나 되는 인물을 하나의 텍스트 속에 버무려 넣고 서로 일관된 맥락을 부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열국지』의 최종 판본을 완성하여 『동주열국지』란 이름을 붙인 채원방도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주나라 평왕平王이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 여정呂政(秦始皇)에 이르기까지 상하 500여 년의 역사에 수십 개의 나라가 명멸했다. 그 수많은 변고와 복잡한 사건, 그리고 잡다한 인물은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입으로 쉽게 읽히지도 않아서, 이 시기 역사 읽기의 어려움은 다른 시기의 역사에 비해서 몇 배나 심하다고 할 만하다.”(蔡元放, 『東周列國志』 「序」)
『열국지』는 이러한 어려움으로 인해 『삼국지』보다는 50~80년 늦게 연의소설로서의 정본화 작업이 완성된다. 스토리의 발생은 『열국지』가 『삼국지』보다 400~900년 이상 앞섰지만, 민간 연예로부터 소설 텍스트로 완성된 시기는 『열국지』가 『삼국지』보다 50~80년은 늦은 셈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아 『열국지』는 바로 앞서 연의소설의 선하를 연 『삼국지』의 영향 아래 탄생한 소설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서술한 몇 가지 난점으로 인해 소설의 구성이나 전개 방식에서는 『삼국지』와 다른 전략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3. 『열국지』의 특성
『열국지』는 『삼국지』와 함께 지금까지도 역사 연의소설의 대표작으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정본화의 난점으로 인해 『삼국지』와는 구별되는 수사修辭 전략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 실마리는 『삼국지』를 평한 장학성章學誠의 다음 명구에서 찾을 수 있다. “7할은 사실이고 3할은 허구여서, 독자들을 혼란하게 한다.”(章學誠, 『丙辰箚記』)
『문사통의文史通義』 「내편內篇」에서 “육경은 모두 역사다六經皆史”라고 주장한 장학성의 입장에서는 경전뿐만 아니라 문학까지도 모두 역사 또는 사실에 근거해야 함을 역설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청대 고증학의 폐단으로 인해 경전 연구가 자구字句에 대한 지리멸렬한 훈고에 빠졌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육경은 모두 역사다”라는 장학성의 외침은 경전의 역사성과 현실성을 회복하기 위한 선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의 문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장학성이 안타까워했던 3할의 허구(상상력)가 『삼국지』의 ‘삼국지다움’을 보증해주는 관건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촉한蜀漢 중심의 연의소설로 재해석하고, 『삼국지』 영웅들의 형상에 문학적 생명력을 불어넣은 것이야말로 3할의 허구가 빚어낸 창작 행위였기 때문이다. 우연과 필연이 무작위로 점철된 과거의 사건이 상상력에 의해 플롯을 부여받으며 문학으로서의 완전한 구조를 갖추
게 되었다.
그러나 『열국지』는 550년의 장구한 역사, 110개에 달하는 다양한 제후국, 1650명이 넘는 방대한 인물군을 한 부의 소설로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일관된 소설 구조로 플롯을 장치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열국지』는 『삼국지』나 『수호전』처럼 허구 또는 상상력에 의지한 일관된 플롯이나 구조를 버리고 역사적 사실 중심의 스토리 서술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채원방의 진술이 이런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열국지』는 여느 소설과 다르다. 다른 소설은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다. 예컨대 『봉신연의封神演義』 『수호전』 『서유기西遊記』는 완전히 가공으로 꾸며낸 것이다. 『삼국지』가 그래도 사실과 가장 가깝지만 그 속에도 꾸며낸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열국지』는 그렇지 않다. 어떤 역사 사실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진술했고, 어떤 역사 기록이 있으면 그것을 그대로 기록했다. 실제 사실조차도 모두 기록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조작된 이야기를 보탤 겨를이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열국지』를 읽는 독자들은 이 소설을 완전히 정사正史로 간주하여 읽어야지 꾸며낸 소설과 같은 부류로 읽어서는 안 된다”(蔡元放, 『東周列國志』 「讀法」)
소설을 정사로 간주해달라는 이 요청이야말로 『열국지』의 고충이며, 『열국지』의 특징에 다름 아니다. 위에서 채원방도 언급하고 있듯이 “실제 사실조차도 모두 기록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조작된 이야기를 보탤 겨를이 있었겠는가?” 말하자면 『열국지』는 소설이기를 포기하는 자리에서 문학성이 담보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어쩌면 춘추전국시대의 역사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터이다. 당시는 수많은 제후국이 다양한 인재를 초빙하여 정치·경제·외교·군사·문화의 역량을 키우고 전쟁을 일삼던 시대였다. 이 때문에 온갖 학파가 다투어 자기 학설을 내세우던 때였으며, 다양한 학문과 뛰어난 인재가 일제히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이 자신의 욕망·권력·이익을 위해 갖은 권모술수와 하극상을 일삼던 시대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형상의 특성이 춘추전국시대에 집대성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비록 『열국지』는 『삼국지』처럼 상상력을 발휘할 공간은 부족했지만, 갖가지 역사적 사실과 온갖 인물 군상을 채록하는 것만으로도 문학적 형상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따라서 『열국지』는 전체 플롯은 약하지만 개별 스토리는 강한 ‘옴니버스 대하소설’ 형식의 서사 전략을 채용하고 있는 셈이다.

4. 『열국지』의 정리자
이와 같은 서사 전략으로 『열국지』 정본화 작업을 직접 수행한 문인은 앞서 소개한 대로 여소어, 풍몽룡, 채원방 세 사람이다.
여소어는 대체로 명대 가정·융경 때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생졸년과 활동 상황은 미상이다. 호는 외재畏齋이며 건양建陽(지금의 福建省 建陽) 사람이다. 그의 집안 조카 여상두余象斗가 만력 34년 병오년(1606)에 『열국지전』 중간본 『열국지전평림』 8권본을 간행하면서 그를 가경·융경 때 사람으로 기록했고 융경의 마지막 해가 1572년이므로 적어도 16세기 중후반 중국 동남부 건양 일대에서 활동한 문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그가 활동한 건양은 원대 『전상평화오종』이 판각된 건안 바로 이웃에 위치해 있다. 『전상평화오종』에 포함된 『전상평화삼국지』가 나관중의 『삼국지통속연의』의 모본이 되었음을 상기해보면, 같은 간본刊本에 포함된 『무왕벌주』 『악의도제칠국춘추후집』 『진병육국』 평화본平話本도 여소어의 『열국지전』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오늘날의 통행본인 『동주열국지』와는 달리 주 무왕이 은 주왕을 정벌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진시황이 전국시대 여섯 나라를 병합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여소어의 『열국지전』 초간본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지만 여상두가 다시 펴낸 『열국지전평림』은 그 간행 형태가 『전상평화』본과 거의 같다. 즉 서책 한 면의 윗부분 3분의 1은 그림으로, 아래 3분의 2는 본문 내용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내용뿐만 아니라 판각 형태에서도 『전상평화』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여상두의 중간본 외에 진계유陳繼儒가 교감하고 비평한 『진미공비평열국지전陳眉公批評列國志傳』 12권본도 있다. 흔히 『진비열국지전陳批列國志傳』으로 불리는 이 판본은 명 만력 43년 을묘년(1615)에 진계유가 쓴 서문이 붙어 있다. 『진비열국지전』은 진계유의 평어評語를 제외하고는 여상두의 『열국지전평림』과 대동소이하나 판본의 형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상두의 판본이 여소어의 초판 형태를 따라 『전상평화오종』과거의 같은 원시적인 모습으로 되어 있는 반면, 진계유의 판본은 권마다 맨앞에 전면 그림 10폭씩을 판각하여 모두 120폭의 그림을 선보이고 있다.
진계유는 여소어와 여상두의 판각 형태를 완전히 새롭게 하여 이후 『열국지』 판본의 전형典型을 확립했다고 할 만하다. 게다가 『진비열국지전』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조선시대 모든 『열국지』 번역본(언해본諺解本)의 저본이 되었다.
『진비열국지전』이 판본 형태에서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보였다면, 내용면에서는 풍몽룡의 『신열국지新列國志』가 참신한 면모를 드러내 보였다. 여소어가 『열국지전』에서 서주 초기 무왕 시대를 소설의 출발점으로 잡고 있는 것과는 달리, 풍몽룡은 『신열국지』에서 주 선왕宣王의 중흥 시기와 주 평왕平王의 동천東遷 시기를 소설의 들머리로 삼고 있다. 뿐만 아니라 풍몽룡은 여소어의 『열국지전』에 포함되어 있는 황당무계한 전설이나 근거가 부족한 사실史實을 『춘추좌전』과 『사기』 등의 정사와 비교하여 교감·삭제한 후 전체 내용을 사실 중심의 108회본으로 정리했다. 풍몽룡에 이르러『열국지』는 명실상부하게 춘추전국시대 열국列國의 역사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열국지』의 편찬자 풍몽룡(1574~1646)은 명말의 학자로 유명한 소설가 겸 민간문학가다. 풍몽룡은 장성하면서 양명학 좌파의 유명한 사상가인 이탁오의 학설에 심취하여 가식과 허례를 배척하고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중시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자연스런 감정에서 우러나온 민간문학 작품을 높이 평가했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했고, 숭정 3년(1630, 57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공생貢生이 되었다. 숭정 7년(1634) 복건福建 수령壽寧(지금의 福建省 壽寧)의 지현知縣으로 임명되었으나 4년 만에 사직하고 귀향했다. 이후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망하고 의종毅宗이 자결하자 반청反淸 투쟁에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고, 청 순치順治 3년(1646) 결국 울화병으로 세상을 떴다. 일설에는 청나라 군사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한다.
풍몽룡의 관직생활은 불우했지만 학자, 소설가, 민간문학가로서는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그는 명말 민간에서 유행한 민요를 채집하여 『괘지아?枝兒』와 『산가山歌』라는 민요 모음집을 편찬했고, 전기傳奇 공연을 위한 희곡도 직접 써서 『쌍웅기雙雄記』 『만사족萬事足』 등의 창작 극본을 남겼다. 그는 또 명 천계天啓 연간(1621~1627)에 『유세명언喩世明言』 『경세통언驚世通言』 『성세항언盛世恒言』이라는 세 권의 단편 백화소설집을 편찬했다. 이 소설집에는 송, 원 시대 이야기꾼의 대본인 화본과 풍몽룡 자신의 창작이 포함되어 있다. 이 소설집은 흔히 『삼언三言』으로 불리며, 이보다 조금 늦게 능몽초凌?初가 편찬한 『양박兩拍』, 즉 『초각박안경기初刻拍案驚奇』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와 함께 『삼언양박』으로 병칭되고 있다. 이 『삼언양박』은 중국 고대 백화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집으로 유명하다. 풍몽룡은 단편소설뿐만 아니라 장편소설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증보삼수평요전增補三遂平妖傳』 『신열국지』 『반고지당우전盤古至唐虞傳』 등을 정리하여 간행했다. 풍몽룡은 또 유가 경전 중에서 『춘추』 연구에도 일가를 이루어 『춘추형고春秋衡庫』 『인경지월麟經指月』 『춘추별본대전春秋別本大全』 『춘추정지참신春秋定旨參新』 등의 저작을 집필했다. 특히 숭정 말년(1640년대)에 이르러 『춘추』에 대한 해박하고 심오한 학식을 바탕으로 여소어의 『열국지전』을 개편하여 이후 『열국지』가 『삼국지』와 더불어 중국 역사 연의소설의 대표작이 되게끔 했다. 이밖에도 풍몽룡은 역대 모사들의 지혜를 정리한 『지낭智囊』이라는 책과 역대 필기소설 및 기타 저작에 보이는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를 모아서 『정사情史』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했다. 풍몽룡의 『신열국지』가 나오자 여소어의 『열국지전』은 자취를 감췄고, 이후 『신열국지』는 청 중기 건륭 원년(1736)을 전후하여 채원방의 『동주열국지』가 나오기까지 『열국지』 통행본의 주류를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풍몽룡의 『신열국지』를 『동주열국지』로 개편한 채원방은 본명이 오?, 자는 원방元放, 호는 야운주인野雲主人 또는 칠도몽부七都夢夫다.
자세한 생졸년은 미상이며 대체로 말릉?陵(지금의 江蘇省 南京)에서 태어나 청 건륭 연간을 전후하여 말릉과 그 인근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채원방은 『열국지』 최종본인 『동주열국지』를 간행한 것 외에도 진침陳?의 『수호후전水滸後傳』에 평어를 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채원방은 풍몽룡의 통행본인 『신열국지』 108회본의 틀을 그대로 유지한 채 『신열국지』의 명백한 오류 몇 가지를 바로잡았으며, 특히 소설 본문의 취지에 맞지 않는 삽입 시 80여 수를 삭제했다. 또한 독자들을 『열국지』의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쓴 「서문」과 「독법」을 소설 맨 앞에 배치해 넣었다. 뿐만 아니라 채원방의 『동주열국지』 판본에는 ‘새로 판각한 정교한 삽화新鐫繡像’가 들어가 있고, 역사 사건에 대한 채원방의 적절한 평어가 비주批注 형식으로 달려 있어서 독자들의 흥미를 더욱 돋운다. 채원방이 정리한 『동주열국지』 판본이 나온 뒤 풍몽룡의 『신열국지』 판본은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동주열국지』에 근거한 수천 종의 방각본이 간행되어 『열국지』 독서계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5. 조선시대에 전래되어 언해본까지 유행한 『열국지』
명明나라 중후기에 역사소설로 정본화한 『열국지』는 우리나라에도 인조 연간(1648년 이전)에 전래되어 선비들의 애독서가 되었다. 숙종 연간(1678)에 홍만종洪萬宗은 『순오지旬五志』에서 『서유기』 『수호전』과 함께 『열국지』를 소설 중에서 뛰어난 작품으로 인정했고, 같은 시기 권이생權以生이란 선비는 『사요취선史要聚選』이란 중국 역사 고사故事 정선집을 편찬하면서 전국시대 사적을 거의 대부분 『열국지』와 『국어國語』에서 뽑았다. 그리고 영조와 정조 시기 선비 강세황姜世晃은 『표암유고豹菴遺稿』에서, 순조와 헌종 시기 학자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각각 『열국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조선 중후기 이후 『열국지』는 민간으로도 널리 보급되어 대체로 영·정조 이후에는 언해 필사본으로 유행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열국지』 언해본은 국립중앙도서관,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영남대 중앙도서관, 일본 동양문고 등에 6~7종 정도 소장되어 있다. 이중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헌종 9년(1843)에 필사가 완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선문대 소장본은 이보다 1세기 정도 앞선 영조 연간에 필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열국지』는 지금의 『동주열국지』 판본이 아니라 『열국지』 최초 판본인 여소어余邵魚의 『열국지전列國志傳』 중간본 계열(『진비열국지전陳批列國志傳』이다. 조선시대 언해본 유행을 통해서도 우리는 당시에 이미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역사 이야기가 많은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했음을 알 수 있다.
『열국지』 현대 번역은 1964년 한학자 김구용에 의해 처음 이루어져, 이후 이 판본이 수정·증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1991년 중국 동포 학자 최재우가 중국에서 출간한 『동주열국지』 우리말 번역본을 국내로 가져와서 재출간했지만 이는 『동주열국지』 중국 동포판이라 할 수 있고, 지금은 거의 절판되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따라서 지금까지 김구용 번역본이 『동주열국지』의 거의 유일한 완역본으로 인정되어 왔다. 김구용 번역본 이외의 『열국지』는 대체로 발췌역, 평역, 재창작본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른 완역본이 없음으로 인해 김구용 번역본은 그동안 『동주열국지』 독서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이는 명예이면서 부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김구용 번역본의 오류까지 지속적이고 무비판적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간하는 『동주열국지』는 무려 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새로운 번역본이다. 기존 번역본에서 누락되고 틀린 부분을 꼼꼼하게 검토하여 번역 정본화 작업을 수행했다. 독자들에게 적어도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를 선택의 여지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새 번역본을 내놓은 최소한의 의미는 있지 않을까 한다.

상품필수 정보

도서명 동주 열국지 세트 - 전6권
저자/출판사 풍몽룡,글항아리
크기/전자책용량 150*217*193
쪽수 3748
제품 구성 상품상세참조
출간일 201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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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열국지 세트 - 전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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