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인 “망각”의 유용성과 단점에 관한 기본서!
《은유로 본 기억의 역사》(근간),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등 ‘기억’을 주제로 끊임없이 연구해온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교의 심리학사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다우어 드라이스마가 3년 동안 기억을 ‘망각’과 함께 보기 위해 노력한 끝에 내놓은 역작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기억에 관해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질문은 바로 망각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을 훈련하는 방법은 있는데 왜 망각을 훈련하는 방법은 없을까? 억압된 기억은 어떤 운명에 처하고 어디에 머무를까? 초상화와 사진은 왜 우리를 기억으로 내모는 특성이 있을까? 우리는 왜 꿈에 관해 아주 나쁜 기억을 갖고 있을까? 절대적 기억이라는 가설이 매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을 비롯해서 뇌 연구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 ‘망각’을 포괄적이고 명료하며 재미있게 다룬다. 드라이스마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은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한다. 다시 말해,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메커니즘을 인지하기 어렵다는 사실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목차
감사의 글
머리말: 망각에 대하여
01 망각으로 씻어낸 최초의 기억
02 우리는 왜 꿈을 망각할까
03 헨리 M.의 비망록
04 얼굴을 까먹는 남자
05 완만한 언덕에 이어 가파른 절벽
06 당신의 동료에겐 탁월한 아이디어가 있다: 바로 당신의 아이디어
07 신경학계의 갈릴레이
08 억압에 관하여
09 절대적 기억의 신화
10 에스테르하지의 기억
11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 거울
12 망각의 기술
13 두 번째 죽음
불편한 질문
주
찾아보기
저자
다우어 드라이스마
출판사리뷰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인 “망각”의 유용성과 단점에 관한 기본서!
《은유로 본 기억의 역사》(근간), 《나이 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 등 ‘기억’을 주제로 끊임없이 연구해온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교의 심리학사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다우어 드라이스마가 3년 동안 기억을 ‘망각’과 함께 보기 위해 노력한 끝에 내놓은 역작이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기억에 관해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질문은 바로 망각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을 훈련하는 방법은 있는데 왜 망각을 훈련하는 방법은 없을까? 억압된 기억은 어떤 운명에 처하고 어디에 머무를까? 초상화와 사진은 왜 우리를 기억으로 내모는 특성이 있을까? 우리는 왜 꿈에 관해 아주 나쁜 기억을 갖고 있을까? 절대적 기억이라는 가설이 매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뇌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을 비롯해서 뇌 연구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인 ‘망각’을 포괄적이고 명료하며 재미있게 다룬다. 드라이스마에 따르면, 우리의 기억은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한다. 다시 말해,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메커니즘을 인지하기 어렵다는 사실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먼저 기억에 관해 얘기해보자. 냉난방 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고 먼지 하나 없는 상태의 기억이라는 방에서 회상은 탈색한 종이 위에 고정되어 있고, 찾기 쉽게 색인도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50년 혹은 60년이 지나도 새로운 파일이 필요 없을 만큼 튼튼한 파일에 담겨 있다. 이렇듯 자신의 회상이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기억이라는 이상(理想)을 누군들 보호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은유를 통해 기억을 생각한다. 플라톤은 ‘밀랍 판’이라고 생각했다. 이후 밀랍 판은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대체되고, 서적을 통해 기억을 표시했다. 기억을 표현하는 또 다른 은유로는 창고가 있다. 19세기 들어서 신경학자와 심리학자들은 기억을 정보를 저장하는 가장 새로운 기술 개념으로 서술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1839년 이후에는 ‘사진기와 같은 기억’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축음기(1877)와 영화(1895), 마침내 컴퓨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모든 은유에는 공통적으로 ‘보존하다’, ‘저장하다’, ‘기록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 기억에 관한 은유의 핵심에는 기록보관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은유는 기억이란 뭔가를 보관할 수 있다는 상상을 전달해준다. 그런데 기억이란 망각의 지배를 받는다.
세상에 발을 내듣는 순간부터 우리는 ‘망각’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감각적인 자극을 다루는 다섯 가지 ‘감각적인 목록’은 감각적인 기억을 저장하게끔 되어 있다. 이런 것들은 제때 계속 이어지지 않으면 사라진다. 미국 심리학자 스펄링(G. Sperling)은 1960년대에 ‘영상 기억’은 시각적인 자극을 1초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만 간직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스펄링은 피실험자들에게 0.05초 동안 4개씩 세 줄로 나열한 12개의 알파벳을 보여주고는 첫 번째 줄이나 두 번째 줄 또는 세 번째 줄에 있던 알파벳을 말해보라고 했다. 피실험자들은 평균적으로 4개의 알파벳 가운데 3개를 말할 수 있었다. 매우 짧은 순간에 봤지만 영상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남아 있었다. 물론 스펄링이 알파벳을 보여주고 난 즉시 물어봤을 때 얘기다. 이보다 좀더 기다린 후에 물어보자 영상은 지워졌다.
이처럼 신속한 삭제는 다른 감각에서도 일어난다. 소리에 대한 기억은 자극을 2∼4초 더 오래 간직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림은 잠시만 머무를 뿐이다. 우리가 눈썹을 깜빡이며 집중할 때 그림은 우리의 인식으로부터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 하나의 장면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려면 1초당 24개의 그림이 필요하다. 하지만 삭제 역시 매우 필요하다. 만일 정보가 조금 더 오래 입력되어 있으면, 이 정보는 이어지는 자극으로 인해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
우리의 감각 기관은 우리한테 무엇을 명료하게 설명해주려는 걸까? 기억은 번개처럼 신속하게 사라진다. 기록보관실이나 컴퓨터라는 은유로 암시했던 기억과는 완전히 정반대다. 감각적 기억에서 망각은 결코 흠이 아니다. 기억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 조건이다. 그렇다면 망각은 기억의 또 다른 형태로서 역시 중요한 기능을 할까? 기억에 관한 은유가 아무리 많은 도움을 준다 할지라도 이런 은유는 기억에 대한 상상과 망각을 서로 분리시킨다. 망각에 관한 이론이 부정적 대우를 받는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 때문이다. 언어적 차원에서도 이런 점을 관찰할 수 있다. 기억과 관련한 단어는 매우 창의적이고 명확한 반면 망각에 관한 언어는 왠지 초라해 보인다.
기억에 대한 은유와 망각에 대한 은유를 대조해보면 알 수 있다. 기억은 큰 명망을 누린다. 즉 문서는 우리 문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다. 문서를 간직하는 기록보관실과 도서관은 신망이 두터운 기관이다. 심리학은 기억에 대한 은유로 가장 발전했고 명망 있는 저장 기술을 선택했다. 반면 망각을 표현하는 은유는 흔히 기억을 표현하는 은유를 힘겹게 뒤집은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요컨대 만약 우리가 뭔가를 잊어버렸다면 잉크가 말라버린 것이고, 양피지에서 내용이 지워진 것이고, 누군가가 컴퓨터 자판의 ‘delete’를 눌렀거나 정보가 하드 디스크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망각은 ‘지우다’, ‘삭제하다’ 혹은 ‘사라지다’와 결코 다르지 않다.
은유의 역전은 기억과 망각이 서로 배타적인 과정이라는 생각에 근접해 있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면 이는 분명 망각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뭔가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그것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은유로 인해 마법에 걸려 있다. 실제로는 효모가 밀가루 반죽에 속해 있는 것처럼 망각도 기억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과 망각의 관계는 하나의 형상을 모방한 그림을 각각 나눠 가진 윤곽이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한 심리학자가 전문 서적에 등장하는 기억의 종류를 구분하기 위해 목록을 작성해보니, 무려 256가지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망각의 종류도 그럴까?
이 책에서 집중적으로 다루는 망각의 종류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서전적 기억의 망각이다. 이는 우리의 개인적 경험을 붙들기 위해 노력하는 기억 유형으로 만약 개인적 체험을 놓치면 걱정에 휩싸여 더욱더 자신에게 몰두하게 된다. 1장에서는 바로 이런 내용을 다룬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잊는다. 하지만 태어나서 2~3년 동안처럼 다채롭게 망각하지는 않는다. 최초의 기억은 무엇보다 망각을 강조한다. 잘 들여다보면 최초의 기억 속에는 이미 망각의 과정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2장은 꿈과 관련한 기억을 다룬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후 잠깐 동안 꿈의 조각에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꿈이 무엇인지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이 조각들이 얼마나 뿔뿔이 흩어져버리는지 알아차린다. 꿈 조각이 조금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또 아침에는 기억나지 않다가 낮이 되어 꿈의 조각 같은 게 갑자기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순식간에 휙 지나가고, 이런 의문이 남는다. 왜 이렇지? 왜 꿈을 붙잡는 게 이렇게 힘들지? 우리는 왜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이 책에서 다루는 두 번째 주제는 병리학적 형태로 나타나는 망각은 기억 과정에서 우리를 예기치 않은 인식으로 안내해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953년 스물일곱 살이던 헨리 구스타프 몰레이슨(일명 헨린 M.)은 뇌전증(간질)을 고치기 위해 극단적인 뇌수술을 받았다(3장). 그런데 해마를 떼어내자 새로운 기억을 저장할 수 없게 되었다. 남은 인생 동안 그는 늘 30초도 채 안 되는 ‘지금’을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손상 때문에 그는 기억 실험과 관련해 이상적인 인물이 되었다.
전후 신경심리학 서적에는 ‘군인 S.’가 등장한다(4장). 그는 1944년 3월 독일군 진영에서 수류탄이 폭발하는 바람에 후두엽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그 결과 특수한 기억 장애가 일어났다. 즉 얼굴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알고 있던 얼굴도 인식하지 못했다.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지나쳤으며, 심지어 자신의 얼굴이 거울에 비쳐도 알아보지 못했다. ‘군인 S.’는 1947년 ‘얼굴인식불능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와 같은 질병은 선천적으로 타고나기도 하고, 최근 수십 년 사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자주 발병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라는 뇌 손상은 망각의 가장 심오한 형태에 속한다(5장). 기억상실은 대부분의 과거를 지우는 한편 미래에도 해를 끼친다. 새로운 체험을 더 이상 각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코르사코프 증후군 환자는 의미론적 기억만은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Z. 교수(코르사코프 환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에서 이와 같은 생각이 뒤집어졌다. Z. 교수는 병이 심각해지기 몇 해 전 자서전을 집필했는데, 이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기억 속에 확실하게 남아 있는 내용을 테스트할 수 있었다. 실험을 해보니 그의 의미론적 기억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의 기억 속 빈칸은 코르사코프 증후군이 진행되면 예기치 않은 광경이 펼쳐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헨리 M., 군인 S., Z. 교수와 달리 병리학적 기억상실의 일부가 아닌 망각도 망각의 과정을 알려준다. 지난 20년 동안 사람들은 실험을 통해 ‘잠복기억’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현상은 언뜻 완전히 고유한 생각이지만 나중에 알고 보면 누군가에게 들었거나 어딘가에서 읽은 내용인 경우를 말한다(6장). 그래서 이를 ‘무의식적 표절’이라는 미사여구로 표현하기도 한다. 실험실에서는 망각 과정을 미묘하게 선동함으로써 잠복기억을 쉽게 불러올 수 있다. 즉 특정 시점의 기억에 해당하는 양만큼 망각을 혼합하는 것이다. 이때 기억은 사라지지 않지만 기억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세 번째 주제는 망각에 관해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소견의 기나긴 뿌리를 보여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의 흔적을 보관한다고 한다. 1930년대에 수행한 신경생리학적 실험이 그와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9장). 와일더 펜필드는 뇌 연구에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했는데, 이른바 ‘몬트리올 방식’이라 일컫는 이 수술법은 환자의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로 뇌수술을 시행하는 방법이다. 국소 마취 후 두개골을 열고 뇌의 표면을 전극봉으로 자극하면서 환자들에게 그 느낌을 설명하도록 하는 것이다. 뇌의 어떤 부위를 건드리느냐에 따라 환자들은 다양한 느낌을 말했다. 이를 통해 1950년대 초반에 펜필드는 이미 100건의 수술을 주도했다. 꼼꼼하게 문서화한 그의 수술 과정은 다양한 간질 유형을 가진 인간 뇌를 해부하는 표준이 되었다. 신체 부위의 대표적 기능에 대한 많은 지식은 펜필드가 뇌피질에서 끈기 있게 흔적을 찾는 연구를 실행한 덕분이다.
‘억압’에 관한 오늘날의 견해는 프로이트가 일찍이 1895년부터 세웠던 견해를 포함한다(5장). 이를테면 지금도 여전히 트라우마를 건드리면 무의식으로부터 불행을 초래한다고 여긴다. ‘다시 발견한 기억’ 같은 최근의 토론에서는 정신분석학이 도입하고 이후 100년 넘게 망각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 은유를 사용한다. 이보다 훨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즉 뇌의 일부는 다른 부분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프로이트 이전에 무명의 영국 가정전문의 아서 위건이 정립했다(7장). 그는 1844년 뇌의 좌뇌반구와 우뇌반구는 각각 자체적인 의식과 기억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위건이 살던 시대에는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이론을 믿지 않았고, 이 이론을 믿지 않을 좋은 근거는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위건이 두 가지 반구로 설명하고자 했던 내용 가운데 많은 것들 덕분에 프로이트는 이로부터 50여 년 후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의 핵심은 망각에 관한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기억 가운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기억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형상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관해 무슨 얘기를 들으면 이 새로운 지식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다른 빛으로 비춘다. 그 이후 우리는 하나의 기억이 이와 같은 과거의 새로운 버전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좋아하는 기억을 기꺼이 보호하려 한다. 가능한 한 ‘오로지 읽기용’이라는 안전한 코드로 간직하려 애쓴다. 하지만 삶은 이미 존재하는 기억을 바꾸는 어떤 다른 기억을 첨부하기도 한다. 2000년 1월 헝가리 출신 작가 페테르 에스테르하지는 이런 일을 비교적 부드럽지 않은 방식으로 경험했다. 첩보 기관의 기록보관실에서 나온 서류에 따르면,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자신이 살았다고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게 분명했다(10장). 《수정본(Verbesserte Ausgabe)》이라는 제목을 붙인 책에서 에스테르하지는 자신이 어떻게 행복했던 청소년 시절의 기억 여기저기에 수치스러운 새로운 해석을 덧붙여야만 했는지 묘사했다. 이것 역시 망각의 한 형태다.
망각하지 않도록 열정적으로 노력하는 기술로 사진만 한 게 없다(11장). 또 기억과 관련해 사진만큼 많은 모순을 지닌 기술도 없다. 우리는 사진이 우리 기억을 지지해주길 기대하고, 아울러 언젠가는 우리 기억을 대체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특히 초상화의 경우 그런 효과가 있다. 사진은 ‘기억을 지닌 거울’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사진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
제멋대로 구는 기억은 망각의 경우 두 가지 방향으로 표출된다. 망각하는 기술 따위는 없다. 그리스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르스 메모리아에(ars memoriae)’, 즉 기억술을 남겨두었으나 뭔가를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싶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망각의 기술(ars oblivionis)은 남겨놓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망각을 방지하는 안전장치도 없다. 망각의 기술은 기억 실험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터널 선샤인〉(2004)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은 불행했던 사랑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첨단 컴퓨터 회사인 라쿠나에 의뢰한다. 비슷한 기억 실험이 1976년 출간한 봄멜 씨에 관한 스토리, 《망각에 관한 소책자(Das Buchlein vom Vergessen)》에서도 발견된다. 여기에서 마르턴 톤더르는 망각의 현명한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한다(12장). 봄멜 스토리에서 망각의 기술은 ‘마술의 대가’가 발명하며, 사람을 억압하는 기억을 지우는 게 과연 얼마나 좋은 것인지 고민해야만 한다는 걸 보여준다.
아무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그를 기억하고자 할 때 강렬한 그리움으로 변한다. 우리는 모든 기억 가운데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가장 보호하고 싶을지 모른다. 우리는 조문을 통해 그런 약속을 하고 자신의 기억으로 맹세하기도 한다.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은 가족과 친구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기 위해 자신의 삶과 결별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제2의 죽음’이라고 표현한다. 프랑스 혁명기의 공포 정치(1793~1794) 때 다음 날이면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작별 편지를 쓰곤 했다. 그 편지를 보면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잊지 않으리라는 것에 큰 위안을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13장).
이 책에서는 대부분 신경학자,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와 그 밖에 다른 과학자들이 기억에 관해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망각의 과정과 이유에 대해 대답할지라도 우리가 이론적으로 기억에 관해 아는 지식과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억과 관련해 경험한 내용 사이에는 여전히 심각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바로 이처럼 지식과 자기 관찰 사이에 있는 무인도에서, 자신의 기억과 망각에 관해 좀더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가 등장한다.
드라이스마는 수백 년 전부터 망각을 다루었던 심리학, 철학, 뇌 연구 등을 탐사하는 길에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그는 수면 실험실과 꿈에 관한 보고서, 뇌수술과 환자의 운명에 관해 이야기하고, 기억 연구의 선구자라는 입장에서 최신 기술을 소개해준다.
끊임없는 연구와, 풍부한 지식, 빼어난 글 솜씨로 빚어낸 흥미진진한 이 책은 무엇보다 한 가지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즉 “망각은 우리가 익히 듣고 있는 것보다 훨씬 괜찮은 면이 많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