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이다. 독일 시적 사실주의의 대가 빌헬름 라베의 소설로 루카치가 “진정한 사실주의자”라고 언급했던 작가, 동시대 독일 작가보다 콘래드나 멜빌, 조이스 등의 작품에 더 가까이 있다고 평가받는 작가, 빌헬름 라베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는 빌헬름 라베를 필두로, 작품과 텍스트, 소설과 담론, 문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동시에 생성해나가는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포겔장의 서류들』은 산업혁명과 독일통일 이후 자본주의가 득세한 독일사회를 배경으로, 시민적 가치관의 변화와 시민계급의 정체성 혼란을 집중적으로 논한 라베의 후기 대표작이다. 소설 속 화자이자 서류 작성자인 칼 크룸하르트는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인 세계와 이후의 세속화된 현실 사이, 서로 다른 두 세계관과 가치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고뇌하며 글쓰기를 통해 사투를 벌이는 작가로서의 라베 자신을 닮았다. 칼은 시민사회의 규범과 윤리를 충실히 준수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사회에 내재된 모순과 체제적 결함에 부딪쳐 부서지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 고독한 영혼이 꿈꾸는 일탈과 시적 비상에 대한 동경, 전원마을에서 보낸 유년시절을 향한 향수를 가슴에 품은 채 평생을 묵묵히 살아간다. 그가 객관적 문서의 형태로 기록하고자 하는 지난날들의 모든 기억은, 진부한 일상과 아름다운 시가 어우러진 전원 교향곡이 되어 때로는 평온하게, 때로는 거세게 흐르며 그의 마음과 글을 흐트러뜨린다.
목차
포겔장의 서류들 _009
주 _249
해설 _261
빌헬름 라베 연보 _271
저자
빌헬름 라베
출판사리뷰
사라진 공간, 부서진 기억
잊기 위해 되살리는 애도의 글쓰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독일 시적 사실주의의 대가
빌헬름 라베가 들려주는 전원 교향곡
유머를 이해하는 작가는 누구인가? 벽 또는 고상한 관중의 두뇌에 미세한 바늘을 꽂는 사람,
자신의 시대와 지나간 모든 시대의 옷가지를 거기에 거는 사람이다. _빌헬름 라베
라베는 자신의 꿈들을 작품에 구현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실주의자다.
그는 꿈과 꿈의 실현을 현실과의 생생한 연관성 속에서 본다. _게오르그 루카치
라베의 소설은 동시대 독일 작가인 슈티프터나 슈토름, 마이어, 프라이타크, 폰타네보다 오히려
조지프 콘래드, 허먼 멜빌,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의 소설에 더 가까이 있다. _폴크마 잔더
문학동네가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으로 독일 시적 사실주의의 대가 빌헬름 라베의 『포겔장의 서류들』을 출간했다. 루카치가 “진정한 사실주의자”라고 언급했던 작가, 동시대 독일 작가보다 콘래드나 멜빌, 조이스 등의 작품에 더 가까이 있다고 평가받는 작가, 빌헬름 라베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는 빌헬름 라베를 필두로, 작품과 텍스트, 소설과 담론, 문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동시에 생성해나가는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획일화된 자본주의 시민사회와 목가적 삶을 꿈꾸는 개인
일상과 시가 어우러진 라베풍 전원 교향곡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는 세상을 극복했고 오로지 홀로 죽었다.
라베는 프로이센이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벌인 전쟁과 소독일 통일(1871), 산업혁명 등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대변혁의 시기를 살았다. 시대적 혼란과 소요 속에서도 조용한 소시민적 생활을 영위했던 그는 작품을 통해 당시 사회의 문제와 대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문제의식은 “당시 사회를 묘파한 날카로운 비평가”(헤르만 헬머스), “시민사회의 세속화된 현실에 개입하려고 애쓴 당시 독일의 유일한 사실주의 작가”(요아힘 보르트만)라는 평가로 이어진다. 『포겔장의 서류들』은 산업혁명과 독일통일 이후 자본주의가 득세한 독일사회를 배경으로, 시민적 가치관의 변화와 시민계급의 정체성 혼란을 집중적으로 논한 라베의 후기 대표작이다. 소설 속 화자이자 서류 작성자인 칼 크룸하르트는 자본주의 이전의 목가적인 세계와 이후의 세속화된 현실 사이, 서로 다른 두 세계관과 가치관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고뇌하며 글쓰기를 통해 사투를 벌이는 작가로서의 라베 자신을 닮았다. 칼은 시민사회의 규범과 윤리를 충실히 준수하면서 살아가지만, 그 사회에 내재된 모순과 체제적 결함에 부딪쳐 부서지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따뜻한 연민, 고독한 영혼이 꿈꾸는 일탈과 시적 비상에 대한 동경, 전원마을에서 보낸 유년시절을 향한 향수를 가슴에 품은 채 평생을 묵묵히 살아간다. 그가 객관적 문서의 형태로 기록하고자 하는 지난날들의 모든 기억은, 진부한 일상과 아름다운 시가 어우러진 전원 교향곡이 되어 때로는 평온하게, 때로는 거세게 흐르며 그의 마음과 글을 흐트러뜨린다.
헤세의 데미안, 브론테의 히스클리프가 교묘하게 섞인 개성적 인물의 창조
그는 약속을 지켰다. 그 소녀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것과
그녀가 잘못 올라간 곳은 어디든 따라 올라가겠다는 그 약속을.
칼 크룸하르트가 글쓰기를 통해 복원해내고자 하는 중심인물인 펠텐 안드레스는 어려서는 ‘끔찍하고도 무익한 놀이’를 일삼는 괴짜였고, 사춘기 시절엔 교실의 수업보다 문학적 일탈에 열중하는 문제아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어리석은 계집애를 위해 자기 어머니와 조국, 밝은 장래가 약속된 고향땅을 등지고 미치광이 여행을 떠났다’고 손가락질 당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꿈꾸고 갈망하던 헬레네는 미국의 백만장자와 결혼하고, 그녀와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이상향, 포겔장은 산업혁명을 겪으며 목가적인 풍경을 잃고 변모해간다. 그는 ‘푹 자고 싶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일종의 아우토다페(화형식)를 거행한 뒤 아무 소유도 없이, 완전히 냉정해진 채 죽기를 원한다. 그는 자기 소유물을 완전히 파괴하기 위해 그로테스크한 약탈 축제를 벌이는데, 이는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관습과 문화, 윤리를 거스르는 야만적인 행위다. 그러나 칼과 헬레네는 펠텐이 ‘세계정복자의 길을 가고 그로부터 승리한 후에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칼에게 있어 펠텐은,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싱클레어의 데미안과 같은 존재다. 또한 펠텐은 하나의 사랑 혹은 돌이킬 수 없는 유년시절을 위해 홀로 세계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에 가까운 인물이기도 하다. 라베는 데미안과 히스클리프를 혼합한 듯한 새로운 인물 유형을 통해 시민사회라는 제한된 환경에서 한 개인이 자신의 이상에 따라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의 정도를 시험한다. 숱한 가능성들로 점철되었던 펠텐의 생은, 산업화와 자본화로 인본주의적 가치관을 상실한 19세기 독일 시민사회를 통과하면서 실패와 죽음으로 귀결되고 만다. 라베는 그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실체’와 ‘가상’이 뒤바뀐 세상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19세기 시적 사실주의와 20세기 서술 기법의 기묘한 공존
나는 더이상 그와 단둘이 한 지붕 아래 살 수 없다. 그래서 계속 쓰는 것이다…….
독일의 사실주의는 현실을 모방하는 미메시스적 성격뿐 아니라 상상력에 기초한 작가의 자유로운 창조력을 일컫는 포이에시스적 성격도 지닌다. 시학 영역의 대표주자인 라베는 “모든 시문학은 상징적이다. 현실에 대한 묘사는 기껏해야 재미있는 읽을거리에 불과하다. 나는 심연에서 지속적인 것을 끄집어내어 그것을 일상의 현실 위로 들어올린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상의 대화 속에 녹아든 상징적인 색채는 19세기를 뛰어넘는 현대적인 서술 기법과 조우하면서 라베풍의 독특한 시적 사실주의를 구현한다. 서술자인 칼은 이야기하는 동시에 회상하며, 그 회상을 옮겨 적음으로써 두 개의 시공간을 엮는다. 그는 두 개의 시공을 오가며 관조적인 태도와 평정심을 잃는데, 이러한 그의 심적 동요와 혼란은 그가 작성하는 서류에 그대로 반영되어, 객관적 사실을 전달하는 서류의 목적과 정체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서술행위 자체가 묘사된 서류는 ‘더이상 서류가 아닌’ 것이 되고, 서술행위가 서술주체가 되는 역전이 발생한다. 결국 ‘포겔장의 서류들’은 합리적인 용도를 지닌 객관적 문서가 아닌, 글쓰기 자체를 위한 공간으로 남겨진다. 이 글쓰기는 사라진 공간과 부서진 기억을 온전히 잊기 위해 그것을 문자의 형태로 되살리고자 하는, 애도의 의식이 치러지는 공간이다. “나는 더이상 그와 단둘이 한 지붕 아래 살 수 없다. 그래서 계속 쓰는 것이다……”라는 칼의 고백 속에는, 되돌릴 수 없는 유년시절 혹은 지난날을 향한 지독한 향수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존재 일반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라베의 따스한 시선이 스며 있다. 동시에 이는, 그 무게를 딛고 살아내기 위해 그가 제안하는 하나의 윤리적 해법이기도 하다. 다음 세대를 위해 칼이 기록한 ‘포겔장의 서류들’은, 세대를 넘어 그것이 지속적으로 쓰여지기를 바라는 라베의 염원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