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황제의 통치술로 본 중국 역사
역사의 주체를 소수의 영웅으로 볼 것인지, 다수의 대중으로 볼 것인지는 첨예한 논쟁거리다. 분명한 점은 지도자의 역량이 나라의 국운을 바꿔놓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왕』은 중국을 이끈 13명의 황제를 다룬다. 13명의 인물은 모두 중국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명망높은 지도자로, 저자는 각각 3가지 분류로 이들을 나눴다. 저자에 따르면, 뛰어난 황제가 갖춰야 할 덕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내부의 적을 평정할 것. 둘째, 민심을 얻고 천하를 다스릴 것. 셋째, 제국을 지킬 힘을 기를 것 등이다.
『제왕』의 저자 우한은 칭화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를 역임한 학자로, 국내에도 『명장』,『대여행가』등의 저작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진시황제, 주원장, 강희제, 한나라의 고조 유방 등을 포함하여 여러 명의 황제들의 리더십이 책을 통해 기술된다. 지도자의 리더십 뿐만 아니라 중국사를 이끈 원동력을 황제라는 주제를 통해 살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머리말
제1부 정치_내부의 적을 평정하라
권력은 언제나 강한 자에게 쏠린다 - 진 시황의 1등 국가론
대등하게 분열된 두 세력이 있다면 한쪽 편만 들지 말라 - 광무제의 세력균형론
결정적인 순간에 온 힘을 다해 자신의 편에 힘을 실어 줘라 - 효문제의 천도론
한발 빠른 사태 파악으로 초기 갈등을 잠재워라 - 송 태조의 기선제압술
갈등이 없는 시기일수록 가장 가까운 주변을 단속하라 - 주원장의 검교 정치
제2부 대중ㆍ 민심_ 민심을 등에 업고 천하를 다스려라
밥보다 더 훌륭한 민심 수습책은 없다 - 한 문제의 경제우선론
자신의 지배 당위성을 끊임없이 설명하라 - 한 무제의 사상통제론
국민을 위태롭게 하고 성공한 제왕은 없다 - 당 태종의 민심천심론
황제보다 더 두려운 종교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 주 세종의 불교배척론
분열의 원흉이 된다면 민족이란 허상도 버려라 - 원 세조 홀필렬의 민족융합책
제3부 전쟁_제국을 지킬 힘을 길러라
위대한 장수를 얻는 자만이 천하를 얻는다 - 한 고조 유방의 용인술
명확한 상벌로 전투에 임하는 자를 즐겁게 만들어라 - 누르하치의 상벌론
소국의 전쟁은 생존이 목적이나, 대국의 전쟁은 주변국의 통제이다 - 강희제의 예방전쟁론
저자
우한 저자(글),김숙향 번역
출판사리뷰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킨 희대의 제왕들
세종시 이전 문제, 대운하와 4대강을 둘러싼 민심 이반 등 우리 사회의 갈등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이다. 이 같은 사회적 갈등을 걱정하는 많은 사람들은 한국 사회를 이끌 유연한 통치술과 새로운 리더십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가 비단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수천 년간 통일과 분열을 거듭한 중국에서도 새롭게 왕조를 개창한 제왕들은 그 시대의 고민을 끌어안고 끊임없이 답을 찾아 헤맸다. 호족들의 반란, 갈수록 더해 가는 민심 이반 등의 위기 앞에서 그들은 뛰어난 참모를 등용하고 때론 과감하게 수도를 옮기는 등 다양한 전략을 구사했다.
『제왕』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난세를 살아간 중국의 명군 13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등 국가를 주창했던 진 시황, 강력한 경제 부양책으로 민심을 잡았던 한 문제, 명확한 상벌로 팔기군을 무적의 전사로 만들었던 누르하치 등과 같은 불멸의 통치자들은 대담한 전쟁과 정치 개혁으로 중국 역사에 큰 획을 그음으로써 오늘날까지 역대 최고의 제왕으로 추앙받고 있다. 과연 이들은 어떻게 부패한 구왕조를 폐하고 새 시대를 열어 제왕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을까? 또한 어떻게 분열된 귀족 세력을 진압하고, 흔들리는 민심을 바로잡아 사분오열된 중국 대륙의 희망이 될 수 있었는가? 이 책은 그들의 위대한 리더십과 통치술을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얘기한다.
1. 내부의 적을 평정하라
2. 민심을 등에 업고 천하를 다스려라
3. 제국을 지킬 힘을 길러라
내부의 적을 평정하라
송 태조 조광윤은 중국 5대 10국의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송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후주(後周)의 무장 출신인 그는 북방 이민족을 정벌하러 가던 중 측근 세력의 지지에 힘입어 황제로 등극했다. 등 떠밀려 황포를 입고 황제가 된 조광윤은 송나라 건국 이듬해에 자신을 믿고 따르던 금군 장수들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의형제처럼 지내던 장수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도 “황제에 자리에 오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나를 죽이고 자리를 차지하라.”라며 장수들을 위협하는 한편, 송나라 건국 공신인 석수인과 의형제들과의 술자리에서는 그들의 공을 치하하는 동시에 그들의 모반을 두려워하는 발언을 해 주변을 긴장시켰다.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오. (……) 그대들이야 다른 마음을 품을 리 없겠지만 어느 날 부하들이 그대들에게 억지로 황포를 입힌다면, 황제가 되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이 아니오?”
황제와의 술자리에서 거듭 위기감을 느끼던 장수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두 병을 이유로 사직했고, 이후로 5대 10국 이래로 황권을 위협했던 금군 수장들의 횡포는 사라졌다. 몇 차례의 술자리에서 벌어진 조광윤의 기막힌 기선 제압의 전략이 들어맞은 순간이었다.
통일 제국의 위업을 달성한 후에도 제왕들의 고민은 여전했다. 자신을 군주로 모시고 있는 신하들 중에도 누가 언제 마음을 바꿔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통일된 제국의 내부에서도 개국공신과 구세력들 간의 다툼이 적지 않았다. 이런 위기의 정국에서 제왕들은 늘 예민하게 내부의 적들을 살피고, 때론 자기를 황좌에 올려 준 지지 세력까지 과감히 잘라 내야 했다. 술자리를 빌어 하루아침에 절도사의 권력을 빼앗은 조광윤, 검교들을 통해 철저하게 주변을 단속한 주원장 등이 천하의 명군으로 칭송받는 것은, 그들의 내부 견제 전략이 결과적으로 황권을 강화시키고 측근들의 모반과 부패를 막아내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민심을 등에 업고 천하를 다스려라
후주의 세종은 민간에서 폐해를 더해 가고 있는 불교 세력을 억제하고자 불상을 녹여 화폐로 만들 것을 명령했다. 실제 대토지를 보유한 불교 사원은 백성들의 노동력을 착취했고, 대량의 동기(銅器)와 화폐를 녹여 불상을 만드느라 구리 값을 올려놓고 화폐 유통에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방관할 수 없었던 주 세종은 미신에 떨고 있는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직접 진주 땅에 내려가, 영험하다 하여 아무도 만지려 하지 않는 관음상을 도끼로 조각냈다.
“동으로 만든 조각일 뿐 그것이 무슨 부처라도 된다는 말이오! 부처는 자비가 근간이니 사람에게 이롭다면 머리를 자르고 눈을 파내도 기꺼이 원할 것이오. 그런데 어찌 한낱 조각상을 부처라 믿고 두려워한단 말이오? 만일 내 몸을 베풀어 백성이 이롭다면 내 결코 아끼지 않을 것이오!”
황제가 직접 나서자 반대하던 신하들도 어쩌지 못했고, 전국에서 불상을 녹여 동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주 세종의 불교 제한 정책으로 화폐 유통의 문제점은 사라졌고, 사원에 의한 백성들의 착취도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민심을 잃고도 제국을 오래 끌고 간 왕조는 없었다. 당나라의 재상 위징은 그토록 강력했던 수나라 왕조가 3대를 끝으로 멸망한 원인을 수 양제의 폭정과 무리한 대외 전쟁 때문이라고 일갈했다. 또한 한때 100만 대군을 가졌던 항우도 민심을 헤아리지 못한 탓에 결국 천하를 눈앞에서 놓쳤다. 일찍이 뛰어난 제왕들은 이런 민심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한 문제는 강력한 경제 부양책으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고, 한 무제는 통일 제국의 당위성을 설파하기 위해 동중서의 학설을 전략적으로 지지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 세종의 강력한 불교 배척론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사원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민심 획득과 황권 강화 모두에서 성공한 훌륭한 정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국을 지킬 힘을 길러라
후금(後金) 한국(汗國)의 건립자 누르하치. 그는 30년간 여진 부족들을 대부분 평정하고, 씨족 사회의 생산 조직이던 팔기군을 군사 조직으로 변모시켰다. 누르하치의 군사들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누르하치 특유의 엄격한 상벌 제도 때문이었다. 누르하치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공적에 따라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가까운 친척에게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으며, 원한이 있어도 공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진급을 시켰다. 이 때문에 팔기 군사들은 전쟁터에서 필사적으로 싸웠으며, 늘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일단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모두가 기뻐하며, 저마다 앞을 다투어 공격했다. 전쟁을 하면 누구나 용맹했고, 위세는 천둥번개와 같았으니 무릇 임하는 전쟁마다 승리의 북을 울렸다.”(『만주실록(滿洲實錄)』 4권)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재능 못지않게 누르하치는 뛰어난 군사 전략가였다. 1619년 명나라를 위협하게 된 후금은 명나라군과 살이호 산에서 전쟁을 치른다. 병력 규모는 후금군 6만, 명나라 연합군 9만. 이런 수적 열세에서 누르하치가 사용한 전략이 바로 각개격파였다. 명나라의 계획도 총 4개 부대를 편성하여 적을 몰아가 후금의 팔기군을 사면에서 포위하여 전멸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병력을 나누어 각 부대의 공격을 막는 대신에, 주력군을 움직여 수적 우위 속에서 적과 싸우는 전략을 세웠다. 결국 살이호 전투에서의 싸움은 후금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남아 있는 명나라 유연의 부대도 누르하치의 거짓 정보에 속아 살이호 군영 쪽으로 제 발로 찾아오다가 전멸당했다.
제국이 통일됐다고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유방은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됐지만, 제후국들의 반란으로 죽을 때까지 전쟁터를 누비고 다녀야 했다. 천하를 노리는 무리들이 우후죽순 궐기하는 시대의 제왕들에게 전쟁은 숙명이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훌륭한 재능이었다. 유방은 소하와 한신 등 뛰어난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써서 천하를 얻었고, 누르하치는 분명한 상벌로 자신의 팔기군을 천하제일의 투사로 만들었다. 제국을 지키는 힘은 제왕들이 전쟁을 이해하는 능력은 물론 군사 통솔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성공한 제왕들의 제1의 덕목은 민생 안정책
수천 년 중국의 역사 속에서 숱한 왕조가 탄생했고 소멸했다. 또한 뛰어난 제왕들이 있었는가 하면 폭정과 사치로 왕조의 몰락을 재촉한 폭군들도 있었다. 그럼 성공한 왕조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왕조의 기초를 닦은 제왕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생산력을 증강시키는 것이었다.
“식량이 곧 나라의 생명줄입니다. 식량이 많아야 나라가 부유해지고 무슨 일이든 잘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도 승리할 수 있고, 먼 곳의 적을 복종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전국의 백성들이 농업에 심혈을 기울이도록 하는 것입니다. 비축해 둔 양식이 많아질수록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천하가 부유해지고 편안해지는 정치입니다.” - 후한 시대 정치인 가의(賈誼)
‘문경의 정치[文景之治]’로 유명한 한 문제는 정권을 잡은 뒤 가의와 조조의 의견을 받아들여 강력한 경기 부양책을 실시했다. 백성들에게 부과하던 부역의 횟수를 대폭 줄여 농업 활동에 전념하게 했으며, 토지 경작을 통한 생산물을 국가에 바칠 경우에 관직을 내리는 등 다양한 생산 활동 장려책을 편 것이다. 이런 한 문제의 경제 부양책은 놀라운 효과를 가져왔고, 한나라의 국력이 부강해지는 발판이 된다. 한 문제에 이어 한 경제, 한 무제에 이르는 한나라의 전성기는 한 문제의 경제 발전 노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청나라의 전성 시대를 연 강희제 역시 삼번의 난과 대만의 통일 등 대내외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다음, 곧바로 백성들의 민생에 신경을 썼다. 황하 주변의 치수 개발을 독려하여 홍수로 인한 재난 위험을 사전에 예방토록 하는가 쿇면, 황무지 개간을 통해 농업 생산력을 높였다. 특히 국가가 안정되면서 국고가 넉넉해지자 백성들을 위해 대규모 세금 혜택을 주기도 했다.
“조세를 면제해 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어진 정사이다. 나라의 곡식이 다하고 백성들이 곤궁할 때 조세를 면하는 일은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기록에 따르면 강희제 정권의 국가 경제가 전성기에 이른 1711년부터 1713년까지 3년간 면제해 준 세금의 총합은 은 3,806만 4,000냥이었다. 매년 약 1,300만 냥의 세금 부담을 덜어 주었다는 것인데, 강희제 집권 시기에 전국에서 거둬들인 세금이 연평균 2,440만 9,000냥인 것을 감안해 보면 이런 세금 면제 규모는 놀라울 정도이다. 일부 통계 자료에 따르면 강희제 재위 기간에 면제된 세금의 총액은 1억 5,000만 냥을 초과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강희제 통치 시절의 백성들은 7년간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과 같다.
숱한 왕조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많은 제왕들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뛰어난 통찰력과 훌륭한 정책으로 새 시대를 만들어 낸 황제들은 후세까지 이름을 전하고 있다. 시대를 제대로 읽어 내고, 그 시대가 요구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실천했던 13인의 제왕들은 수천 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적지 않은 교훈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