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정록 시인의 새 동시집입니다. 일상과 자연을 넘나들며 다양한 어린이들의 모습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 낸 지난 동시집에 이어 이번 동시집에서는 또래 친구를 비롯해 부모님, 할머니 등 주위 사람들의 아픔과 외로움까지 품을 줄 아는 성숙한 어린이 화자를 새롭게 등장시킨 것이 인상적입니다. 슬픔마저도 시인의 장기인 익살과 해학으로 감싸 안아 읽다 보면 어느새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네요. 스무 해 넘는 시력과 오랜 교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원숙하면서도 개성 넘치는 시 세계가 사뭇 기대를 모읍니다.
목차
머리말_함께 가는 들길
제1부 톡, 까놓고
씨앗
올챙이 배
봄비
백목련
텃밭
수박
호박
사과는 빨개
가을 운동회
아픈 소
기차놀이
염소 가족
청둥오리
눈사람
제2부 내가 짱 멋져
참 잘했어요
받아쓰기
꼭지
왕자병
죽이는 학급
예랑 나비
독도
첫사랑
별명
젖 먹던 힘
싸움소
새치기
생강밭 하느님
달맞이꽃
제3부 입 축구
저 많이 컸죠
무표정
집
할머니는 내 편
손톱 깎기
기찻길 옆 우리 집
신호등
원 플러스 원
훌라후프 돌리는 별
알통 키우기
모래놀이
입 축구
꼴등 아빠
닭발
제4부 말 시키지 마세요
세탁소 학교
숯불갈비
무얼 파는 트럭일까
입 다물고 말하기
고등어 통조림
반달곰 병원
주걱
떡
핫, 뜨거!
낙타의 거짓말
타이어와 신발
선풍기
빨래집게
메리 크리스마스
해설_어른 속 어린이의 별별 이야기_안학수
저자
이정록
출판사리뷰
아픈 마음 보듬는 속 깊은 어린이
할머니는/싱크대가 자꾸 자라는 것 같다고 합니다./장롱도 키가 크는 것 같다고 허리 두드립니다.//할머니 키가 작아져서 그래……,/말하려다가 이불을 펴 드렸습니다./허리가 꼬부라져서 그런 거야……,/입술 삐죽이다가, 싱크대 찬장/높은 칸에 놓인 그릇을/아래 칸에 내려놓았습니다.//우리 손자 많이 컸다고/이제 아비만큼 자랐다고 웃습니다./쓰다듬기 좋게 얼른 머리를 숙입니다.
?「저 많이 컸죠」 전문
이정록 시인의 새 동시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철든 어린이’의 등장이다. 『저 많이 컸죠』에 실린 시편들의 어린이 화자는 여느 동시집에서 찾아보기 쉬운 귀엽거나 혹은 엉뚱한 어린이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할머니나 어른들의 아픔도 헤아릴 줄 알며, 외로운 친구에게는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이러한 속 깊은 어린이의 출현은 그동안 우리 동시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되, 드물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귀한 일이다.
생명과 자연을 바라보는 어진 눈길
오늘 내리는 봄비는/안개비라서 보슬비라서/도랑까지 흘러가지 못합니다./병아리 눈곱만큼 내려서/쥐구멍에 스며들지 않습니다.//그런데 겨우내/땅만 굽어보던 봄비라서/씨앗의 머리는 톡톡 정확히 맞힙니다./늦잠 자는 개구리 이마는 간질간질 잘도 맞힙니다.//땅속 씨앗과 개구리에겐/오늘 내리는 빗소리가 가장 크게 들립니다./개구리가 슬금슬금 기어 나옵니다./씨앗의 귀청이 새파랗게 터집니다.
?「봄비」 전문
『저 많이 컸죠』에서 또 하나 시선을 끄는 것은 생명과 자연에 대한 시인의 각별한 애정이다. 위에 인용한 「봄비」를 비롯해 「씨앗」「올챙이 배」 등의 시에는 약동하는 생명의 활기가 봄의 이미지를 통해 잘 응축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아픈 소」「기차놀이」「입 다물고 말하기」「고등어 통조림」 등 일련의 시에서는 구제역 등 다소 과감하다 할 수 있는 시제(詩題)를 동시(童詩)에 적극적으로 끌어와 지금 이 순간 우리 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에 대해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벼린다.
한편 「염소 가족」과 「생강밭 하느님」 같은 시편들에서는 눈에 보이는 자연을 넘어서 보다 근원적인 곳까지 나아간다. 특히 「생강밭 하느님」에서 시인은 하느님과 만나는 노동하는 인간의 고귀함을 마음이 뭉클해지는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노동하는 어머니가 하느님이기도 하고 우주이기도 한 하늘을 ‘업어 주는 거’라고 씀으로써 그를 하늘보다 높은 존재로 공손히 받든다. 노동과 모성, 나아가 우주로까지 어린이의 사고를 가닿게 하는 시인의 이끎이 도저하다.
담임 선생님은,/공부 시간에 엎드려 자는 애들에게/“하느님이 깔고 앉은 놈들!”이라고 한다.//요즈음,/우리 동네 생강밭에는/아주머니들이 한가득 엎드려 일하신다.//도르래 삐걱삐걱,/생각 굴에 생각 포대를 내리고,/늦은 밤 방바닥에 엎드려 일기를 쓴다./?하느님이 깔고 앉아서 납작해진 아줌마들이 생강을 캔다.//일기 끄트머리에/선생님이 빨간 글씨 써 놓았다./?그건, 어머님들이 하느님을 업어 주는 거란다.
?「생강밭 하느님」 전문
곳곳에서 빛나는 익살과 해학
봉지 벗기다가/철퍼덕! 아이스크림/막대만 쥐고 있네.//?아, 꼭지 도네.//관찰 일기 숙제/방울토마토 키우기/익기도 전에 엄마가 다 따 먹네.//?아, 꼭지 도네.//다들 어디 가셨나?/아싸! 오락하다가/라면 냄비 홀라당 졸아붙었네.//?아, 꼭지 도네.//오늘은 이어달리기/나는야 마지막 선수/바통 줍다 땅바닥에 헤딩 했네.//?아, 꼭지 도네.//목이 타네./냄비 뚜껑처럼 꼭지가 돌아/헐레벌떡 수돗가로 달려갔네.//?아, 꼭지가 돌지 않네.//“넘어진 놈이/뭘 잘했다고 물은 마시냐?”/애들이 방울토마토처럼 달려오네.//?아, 꼭지 도네.
?「꼭지」 전문
그동안 성인 시와 산문을 종횡무진 아우르며 선보였던 이정록 시인의 익살과 해학은 첫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에 이어 이번 동시집에서도 여전하다. 앞서 말한 외롭고 서글픈 속내를 펼쳐 보이면서도, 「꼭지」「왕자병」「훌라후프 돌리는 별」 등의 시편에서 숨기지 못하는 시인의 타고난 낙천은 시를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하는 묘한 힘을 지녔다.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동시에 껴안는 애환(哀歡)의 정서는 이정록 동시만이 다다른 독특한 경지라 하겠다.
『저 많이 컸죠』는 재기 발랄하면서도 시의 품격을 갖춘 동시, 어른스러우면서도 어른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어린이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담은 동시로 가득하다. 시인은 새 동시집에서 은근하고 웅숭깊은 시의 세계로 어른과 어린이 독자를 허물없이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