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어른이 쓰는 동시
성명진 시인은 동시 쓰는 일을 두고 어른이 어린이다운 생각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삶 속 어디든지 있는 작고 소중한 동심들을 찾아 동시만 평생 쓰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따뜻한 시와 따뜻한 그림으로 가득한 시집을 손에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빙그레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기도 하고, 짐짓 뭉클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시인은 볼 때마다 무거운 짐을 들어달라며 다음 날 만나도 얼굴을 잊어버리는 할머니 때문에 골치 아파하는 아이의 마음을 말하고, 축구부에 들고 싶어 축구부 스타가 열심히 연습 중인 운동장 근처를 서성이는 아이의 마음 속에도 들어가 봅니다. 그렇게 시인과 그림 작가는 함께 아이들, 어쩌면 어른들까지의 마음도 어루만져줍니다.
목차
머리말│수줍습니다
제1부 불빛
뿌리
하나도 안 아픈 일
밤길 위
불빛
동백꽃
외단집 위에 뜬 무지개
호숫물
풍선
조그마한 새
다른 것
함께 있었구나
제2부 축구부에 들고 싶다
친구
어서어서
빗길
실눈이
가겟방에서
이겨라
앙앙, 엉엉
축구부에 들고 싶다
그냥 해 보는 걱정
그 애가 나예요
어서 집으로
종종이 미워
빵 냄새
삐졌단 말이야
들켰나 봐
속상해
공을 튀기면서
가 보자
제3부 그래도 즐거워
염소 탓
제비들 돌아와
그래도 즐거워
햇빛 속
누구야
둘이는
쿵, 하는 소리
봄날
눈독
숨어라
할아버지 농악대
동네 끝 집
새 가족
우리
제4부 뒤에서 가만히
아빠의 셔츠
눈치
자존심
뒤에서 가만히
함께 걷는 길
삼촌 자전거 뒤에 타고
별들을
함께 천천히
해질 녘
추석
해설│더불어 함께 걷는 길_남호섭
저자
성명진
출판사리뷰
등단 이후 20여 년간 『창비어린이』 『어린이와문학』 등에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온 성명진 시인의 첫 번째 동시집. 생명과 자연에 대한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겸허한 서정을 펼치는가 하면, 무언가 바라고 고민하고 좌절하면서도 자라나는 아이들의 일상 속 성장을 솔직한 언어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오래 벼린 언어와 진중한 시선으로 그려낸 성명진의 시들은 어린이들에게 서정시만의 시심(詩心)을 깨워줄 것이다.
어린이의 시심을 깨우는 서정의 세계, 시 읽는 기쁨을 전하다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근래의 동시집들에서 보기 어려운 진지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는 점이다. 다음은 남호섭 시인이 이 시집 최고의 시로 꼽은 「불빛」이다.
오늘 밤엔 / 용이 아저씨네 집에 켜진 불빛이 / 세상의 한가운데 같아요. // 용이 아저씨가 불빛을 들여다보고 있고, / 멀찍이서 나무들이 / 불빛을 둘러싸고 있네요. // 그러고 보니 / 집 밖 언덕배기와 먼 산줄기도 / 불빛을 둘러싸고 있네요. // 환한 그 속에선 지금 / 갓 태어난 새끼를 / 어미 소가 핥아 주고 있어요.
----「불빛」 전문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만큼은 온 세상이 그 생명을 ‘세상의 한가운데’로 삼는다는 메씨지가 따뜻하기도 하거니와, 이 광경을 묘사하는 시인의 솜씨 또한 돋보인다. 불빛, 아저씨, 나무, 언덕, 산으로 점차 멀어지던 시선이 마지막에 이르러 다시 불빛 속으로 집중됨으로써 긴장이 생겨난다. 이는 생명(불빛)에 대한 경외를 극대화하는 효과적인 장치로, 시인이 그간 시어를 벼려온 세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그 시어들은 모두 쉽고 솔직한 것들이다. 시어를 따라 이미지를 그려봄으로써 얻는 정서적 만족감이 바로 시를 읽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임을 생각할 때, 어린이들에게 시를 읽는 진정한 기쁨을 전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성명진 시인의 ‘서정’은 단순한 개인의 감상을 넘어 자연과 생명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단정하게 핀 붓꽃들을 보며 “저 아래엔 / 다정하고 부지런한 / 어머니가 계시나 보다.”(「뿌리」)하는 데서 시인의 오랜 생각이 읽히고, 작은 새라 해도 “신날 땐 / 하늘을 건너는 데도 / 한 걸음.”(「조그마한 새」)임을 알아차리는 데서는 어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큼 성장하는 어린이에 대한 찬탄이 읽힌다.
일상 속에서 꾸준히 자라나는 어린이를 따뜻하게 그려내다
시인의 서정이 공허한 관조에 머물지 않는 것은 시인의 눈이 또한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일상을 그리면서도 ‘학원’ ‘공부’ 스트레스를 대변하는 척하는 대신 오랜 관찰과 공감을 바탕으로 일상 속 성장의 순간을 잡아챈다. 표제작 「축구부에 들고 싶다」가 바로 그렇다.
공을 차는 축구부원들. / 6학년 김수형 선수도 있다. // 방과 후 / 나는 운동장가를 서성인다. / 김수형 선수처럼 되고 싶다. // 우리 학교를 우승으로 이끌고 / 텔레비전에도 나온 스타, / 월드컵에서도 뛰겠지. // 공이 밖으로 나오자 / 나는 재빨리 공을 따라 달렸다. / 운동장 안으로 공을 던져 주었는데 / 달려와 받은 사람은 / 반갑게도 김수형 선수! // 나는 신나서 / 운동장가를 마구 달렸다.
---「축구부에 들고 싶다」 전문
주인공은 축구부에 ‘들고 싶은’ 아이다. ‘김수형 선수’를 동경하는 마음은 그를 ‘선수’라 부르고 학교 대항전의 선전을 월드컵 활약으로까지 비약하는 데서 절절히 느껴진다. 그러나 이 시의 백미는 공을 던져주었을 때 마침 김수형 선수가 받자 “신나서 / 운동장가를 마구 달렸다.”는 마지막 연이다. 우연을 기적처럼 받아들이는 아이의 순수한 기쁨, 꿈을 가진 아이의 벅찬 마음을 절묘하게 표현한 이 대목에 많은 어린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현실의 무게를 어른과 함께 감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도 외면하지 않는다.
과일 파는 영우네 집에 / 숙제하러 모였다 // 과일을 먹으며 장난치다가 / 가게에서 다투는 소리 들려와 / 멈추었다. // 어떤 욕하는 소리에 맞서 / 영우 엄마도 욕을 했다. // 잠시 후 영우 엄마 우는 소리, / 방구석에서 영우도 눈물을 글썽였다. // 우리들은 잠자코 / 귤 쪽들처럼 붙어 앉아 / 책을 폈다. // 이상하게도 숙제가 잘 되었다.
---「가겟방에서」 전문
어른들이 가르치거나 야단치지 않아도 아이들은 현실의 무게를 알아챈다. 가겟방에 모여 숙제하고 장난치는 아이들의 처지는 그만그만할 것이다. 욕하고 싸우는 엄마의 고단한 일상은 어쩌면 아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고, 그런 친구의 ‘눈물’에 아이들은 더 이상 장난을 치지 않고 얌전히 숙제를 한다. 책을 펴자 “이상하게도” 숙제가 잘 되었다는 데서 설명하기 어려운 성장의 한 순간이 엿보인다. 과일 가게 뒷방의 아이들을 붙어 있는 “귤 쪽들”로 표현한 것도 탁월한 감각이다. 쳀처럼 아이들의 처지를 살피고 쓰인 시들은 장난꾸러기도 모범생도 아닌 범범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많은 애들이 모여 있었는데 / 한 키 작은 애가 / 내 곁에 있었다. (중략) 그 애는 꾀죄죄해 보였다. / 말수도 적었다. / 실은 나도 그랬다.”는 「친구」의 친구 소개는 시인의 주인공들에 대한 힌트이기도 하다.
‘서로’ 의지하기 때문에 소중한 가족
성명진 시인은 가족을 그리면서 야단스러운 부모의 사랑이나 아이의 재롱 대신, ‘서로’에게 의지하는 순간 확인되는 따뜻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술 취해 주저앉은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면서 “넘어지지 않으려고 / 몸에 힘을 잔뜩” 주는 아이의 단단한 심지(「함께 걷는 길」), 손을 맞잡고 걷지는 않지만 “간격이 벌어져도 / 기침 소리나 부르는 소리가 / 들릴 만큼만” 거리를 두고 걷는 노부부(「함께 천천히」), 너무 높이 올라가버린 나무에서 용기를 내어 한 걸음씩 내려와 땅을 디뎠을 때 그 모습을 소리 없이 지켜보다 “뒤에서 가만히 등을 도닥여” 주는 아버지(「뒤에서 가만히」) 등, 이 시집에 그려진 가족은 일방적인 헌신이나 순종이 아닌 ‘사랑’으로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줌으로써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이처럼 깊은 서정과 통찰을 선보이는 이 시집은 이른바 ‘기획동시집’이 범람하는 오늘의 동시단에 반갑고 의미 깊은 선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