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이정록 동시집. 저자는 지금껏 동시라는 자전거를 혼자 타 왔다고 합니다. 혼자서도 재미있었지만, 자전거 뒷자리에 누군가를 태우고 그동안 혼자 얻었던 즐거움을 나누고 싶다고 말합니다. 동시집을 통해 어린이들의 잃어버렸던 동심을 찾고, 작가와 함께 신나는 자전거 여행을 떠나 봅시다.
목차
머리말 | 자전거 타고 가는 길
제1부 콧구멍만 바쁘다
꿀잠
개학 첫날
사라진 이름
바쁜 내 콧구멍
황사
예절상
우유 한 갑
아니다
운동장 청소
꽝
흙장난
제2부 누가 먼저
놀아 줘요
당장 끄지 못해
가장 무서운 것
막대사탕
목욕
뚱보 아빠
야간 노인정
할아버지 제삿날
겨울비
누가 먼저
칼싸움
안 돼요 안 돼
쓰레기봉투
방문을 꽝!
제3부 닮았다 호호호
동물원
손
펭귄
코끼리 똥
토끼 눈
개구리는 좋겠다
낙타
아기 돼지 코
기러기
똥강아지
달팽이 학교
곰 유치원
시장 놀이
쥐
제4장 다 날아갔다
과일 깎기
훠어이 훠어이
까치밥
병아리
양손잡이
다람쥐
개구리 풍선껌
새똥
몽돌 노래방
능수버들
바다는 짜다
비 비린내
산불
저승까지 거리는
저자
이정록 (지은이), 권문희 (그림)
출판사리뷰
*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인 이정록의 첫 동시집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인으로 성인문단에 널리 알려진 이정록 시인이 등단 20년 만에 첫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를 펴냈다. 스무 해 넘는 시력, 스무 해 넘게 아이들과 함께 지내온 교사로서의 이력을 한데 버무린 동시 53편을 선보였다. 이정록 시인은 그동안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을 비롯하여 『제비꽃 여인숙』『의자』 등에서 그만이 가진 예민한 촉수로 작고 미세한 사물과 벌레 한 마리의 꿈틀거리는 생명력 등을 날카롭게 포착해왔다. 이번 첫 동시집에서 그 예민한 촉수가 찾아낸 생명력의 주인공은 바로 ‘어린이’다.
『콧구멍만 바쁘다』의 전편에 흐르는 정서는 ‘밝음’과 ‘따스함’으로 압축할 수 있다. 부부싸움, 친구와의 다툼, 선생님의 꾸지람 때문에 상처투성이 일상이지만 금세 딛고 일어서는 밝은 아이들이 가득 뛰어논다.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눈 내리면 눈 내리는 대로, 흙비 내려도 아랑곳 않고 밖에 나가 놀 궁리를 하느라 바쁜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로 가득하다. 그 아이들의 밝은 마음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 또한 밝다. 그 환한 아이들과 눈 밝은 시인이 만나 완성된 시는 따뜻하다. 싸늘해진 세상 속에서도 작은 생명이나 소외된 이웃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아이들의 따뜻한 눈길과 마음이 이 동시집에 담겨 있다.
『콧구멍만 바쁘다』는 모두 4부로 나뉘어 있다. 1-2부에는 아이들이 학교와 집 등 일상공간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 아이의 시선에 포착된 어른의 횡포 등을 아이들의 입말로 자연스럽게 표현한 시가 담겨 있다. 3부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식물과 무생물 그리고 그냥 스쳐 지나버리기 쉬운 풍경 속에서 우리 삶에 도사린 모순과 맹점을 짚어내는 시인의 솜씨가 잘 발휘되었다. 다양한 동물의 특징과 아이들 사이의 공통점을 끄집어내어 재미난 언어로 표현한 말놀이 동시들이 시집에 활력을 더해준다. 4부는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는 현장과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서정적이고도 웅숭깊은 ‘생태동시’들이 담겨 있다.
* 시인도, 아이들도 함께 ‘신나는’ 밝고 따스한 동시
이정록 시인은 머리말에서, 동시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의 즐거움과 설렘을 ‘자전거 타기’에 비유했다. 동시를 쓰기 시작하며, 어릴 적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핸들을 조정하던 조심스러운 손짓과 들썩이는 엉덩이, 수렁논에 처박히곤 했던 실수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20년 동안 시를 써 오며 익은 말법을 버리고, 이전과 전혀 다른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과 통하는 새로운 말법으로 사물을 보고 그리려 한 시인의 노력이 엿보인다. 그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자전거 타기를 성공하는 순간부터 자전거를 ‘신나게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동시도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일이란 점을 강조한다. 시를 쓰는 시인도, 읽는 독자들도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게 바로 ‘동시’라는 걸 『콧구멍만 바쁘다』는 보여준다.
앞니 두 개 뽑았다./대문니가 사라지자/말이 술술 샌다./침이 질질 흐른다./웃으면 안 되는데/애들이 자꾸만 간지럼 태운다./갑자기 인기 짱이다./귀찮아서 죽겠다./입 다물고 도망만 다닌다./콧물 들이마시랴 숨 쉬랴/콧구멍만 바쁘다. (「바쁜 내 콧구멍」)
표제작 「바쁜 내 콧구멍」은 근래 보기 드문 ‘동적’인 시다. 뛰어노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진다. 쫓기는 아이도, 쫓는 아이들도 모두 신이나 한바탕 어우러진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진다. 콧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숨과 술술 새는 말, 질질 흐르는 침과 콧물과 함께 한데 어우러져 깔깔대는 아이들이 책장 가득하다. 읽는 이들마저 그 달리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정록 시인은 특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꽤나 민감하다. 그의 동시에는 교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으며, 말법은 아이들의 그것처럼 발랄하며 쉽고 자연스럽다.
우리 학교/담장을 모두 없앴다./(중략)/개구멍이 없어지자 꿀밤도 사라졌다./다리는 울타리 밖에서 버둥버둥/눈알은 담장 안에서 뱅글뱅글/쿵쾅거리던 가슴도 없어졌다./여러분이 똥갭니까, 도둑입니까?/교장 선생님의 꾸중도 사라졌다./집에서 교실까지 지름길이 생겼다./아침마다 오 분은 더 잘 수 있다. (「꿀잠」)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담장을 모두 없앴다. 그로써 생겨난 이점들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기술하고 있는 시가 바로 「꿀잠」이다. 물리적 경계로서의 학교 담장이 허물어지면서, 거기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삭막함과 단절감 그리고 감시와 억압만이 있던 자리에 작은 평화와 소통, 해방감이 깃드는 것이다. 이런 시는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칫 이분법의 구도 안에 갇혀 납작한 계몽주의 시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시인은 그러나 오 분 간의 늦잠이 ‘꿀잠’이 되는 이유를 어른쟀 단정적인 설교가 아니라 실감 있는 아이의 어조로 펼쳐 보임으로써 그런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대상을 향해 빈정거리거나 돌려 말하지 않는 시인의 말법은 아이들의 솔직한 목소리 그대로를 드러낸다. 목욕탕에서만 운동하는 뚱보 아빠에게 “목욕탕에서만 운동하는 뚱뚱보 우리 아빠” (「뚱보 아빠」)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아침에 화장실이 급할 때는 “아빠 먼저”라며 새치기를 하면서, 저녁에 엄마가 이 닦으라고 하면 “니들 먼저” (「누가 먼저」)라고 발뺌하는 아빠의 이중적인 언행을 유머러스하게 꼬집기도 한다. 또, 학교 갔다와서 곧장 학원에 가고 숙제 마친 뒤 겨우 짬 내서 오락하는데 “당장 끄지 못해!”(「당장 끄지 못해」)라고 윽박지르는 부모의 횡포, “넘치는 것보다 모자라는 게 좋은 거라”면서도 “쓰레기봉투는 “배불뚝이”(「쓰레기봉투」)가 되어 터지게 만드는 엄마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와 분단 시대를 거치며 우리 동시 속 아이들은 당당한 목소리를 잃고, 어른의 교육에 순응하는 얌전한 ‘범생이’와 ‘소심파’ 들만 남았다. 우리 동시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당당하고 솔직한 아이들의 살아 있는 육성을 불러내는 길에 있다고 볼 때, 이정록의 다음 동시는 그 싹을 보여준다.
채찍 휘두르라고/말 엉덩이가 포동포동한 게 아니다.//번쩍 잡아채라고/토끼 귀가 쫑긋한 게 아니다//아니다./꿀밤 맞으려고/내 머리가 단단한 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3연에 등장하는 아이의 발언이다.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엉덩이 깨나 맞아본 듯하고, 여전히 꿀밤은 예사로 맞는 듯하다. 하지만 벌을 주는 어른들의 바람과 달리, 아이가 벌을 통해 깨달은 것은 반성 대신 항변이다. 언뜻 보면 개구진 아이의 불만 한 마디 같지만, 이를 통해 아이들 독자가 느낄 공감이나 어른 독자가 느낄 반성은 대단히 크다.
새는/다 날아갔다.//오소리는/굴을 잘 막았을까?//하늘다람쥐는/불길보다 빨리/나뭇가지를 건너뛰었을까?//새소리도/다 날아갔다.//둥우리 속/새알들은 어찌 됐을까?//빨간 토끼 눈은/어딜 보고 있을까? (「산불」)
「산불」 에서 시인은, 인간의 실수로 일어났을 것이 뻔한 산불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생명들을 단순한 연민의 눈이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으로 껴안고 있다.
이 모든 생명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제 목숨을 다해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이 동시집은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