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루이 아라공의 역작 국내 초역
광기의 1920년대 파리의 밤거리를 헤매는 전후 세대의 초상
『르 몽드』 선정 20세기의 책 100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시구로 유명한 루이 아라공은 우리 독자에게는 주로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소설·희곡·에세이·문학론 등 분야를 아울러 왕성하게 활약한 프랑스의 대표적 문인이다. 창비세계문학 92, 93번으로 출간된 『오렐리앵』은 루이 아라공이 19세기 말~20세기 초 프랑스 사회를 해부한 소설 연작 ‘현실 세계’의 네번째 작품으로,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차대전 종전 후 1922년의 파리, 참혹한 전쟁의 기억을 안고 흥청대는 밤거리를 헤매는 오렐리앵은 끝없이 쾌락을 좇으면서도 삶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그의 앞에 나타난 베레니스는 ‘운명적 올가미’였으나, 현실은 두 사람을 완전히 다른 길로 이끌어간다. 반복되는 물과 죽음의 이미지, 파리의 거리와 자신의 내면을 동시에 거니는 듯한 상념의 서술, 미묘한 어긋남이 쌓여 만들어내는 파국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은 오렐리앵이 마주하는 사랑과 상실을 통해 동시대 개인과 세대의 좌절과 환멸을 매혹적으로 증언한다.
목차
오렐리앵 2
에필로그
작품해설―불가능한 사랑과 ‘참된 거짓말’
작가연보
발간사
저자
루이 아라공 (지은이), 이규현 (옮긴이)
출판사리뷰
“행복한 사랑은 없다”
전쟁이 남긴 내면의 폐허에서
절대적 사랑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좇는 인물들의 심연 풍경
1922년 11월, 1차대전 참전군인 오렐리앵 뢰르띠유아는 전쟁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서른두살의 남자다. 부모의 유산 덕택에 일없이 시간을 보내며 밤이면 파티장과 술집을 전전한다. 파리는 흥청거린다. 높은 경제성장률 속에 최신 가전 산업이 대중화되고, 유례없는 전쟁을 겪은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을 온몸으로 갈구한다. 몽파르나스와 몽마르트르의 카페와 카바레는 만원이고, 미국에서 건너온 재즈와 찰스턴으로 들썩인다. 그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어울리면서, 술을 마시고 욕망뿐인 잠자리를 하면서 한편으로 오렐리앵은 그 삶의 무의미함에 진저리를 친다. 자신이 겪은 참혹한 죽음을 수시로 떠올린다.
그런 그의 앞에 베레니스가 나타난다. 오렐리앵은 곧 그녀에게 사로잡히지만,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들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뜻 없이 여러 여자와 애정 없는 관계를 가져온 오렐리앵에게 베레니스는 운명 같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자기 입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베레니스는 선뜻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는 화려한 도시에 잠시 다니러 왔을 뿐 지방 도시에 거처를 두고 있고, 전쟁으로 한 팔을 잃은 남편이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희귀한 정념, “절대에 대한 취향”을 갖고 있다. 그녀는 오렐리앵의 사랑을 믿고 싶어 하면서도 이 절대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오렐리앵에게 베레니스가 운명적으로 걸려들 올가미였다면 베레니스에게 오렐리앵은 열린 심연이었다. 그녀는 이를 알고 있었고, 그 심연이 너무 좋아서 거기로 가서 몸을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1권 366면)
오렐리앵은 마음을 다해 확신을 주고자 하고 베레니스 역시 이를 믿고 싶어 하지만, 두 사람의 노력은 한순간의 실수로 물거품이 된다. 불과 두달의 만남이었다. 도망치듯 파리를 떠난 베레니스는 젊은 파트너와 함께 화가 모네가 살고 있는 지베르니에 은둔한다. 그녀를 잃고 폐인처럼 지내던 오렐리앵은 우연히 지베르니에 갔다가 베레니스를 마주치고 애원하지만, 베레니스는 다시 지베르니를 떠난다. 어떻게든 그녀의 소식을 들으려 애쓰는 가운데 세월이 흐른다.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일을 해 생계를 꾸릴 필요를 느낀 오렐리앵은 현실을 마주하기로 결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사랑은 멀어지고 삶은 계속된다. “사랑은 인간처럼 불행 속에서 사라진다. 궁색과 한숨과 땀과 격동 속에서 사라진다. 사랑이 견딜 힘을 갖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은 살인자보다 더 나쁘다.”(1권 367면)
아라공이 본편 집필과 약 일년여의 시차를 두고 써서 덧붙인 「에필로그」는 2차대전이 발발한 1940년, 프랑스군이 패주를 거듭하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두번째로 전쟁에 동원된 오렐리앵은 패주하는 도중에 베레니스가 남편과 살고 있는 지방 도시에서 며칠을 보내게 된다. 십칠년이 지났다. 베레니스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평생 오렐리앵을 생각해왔다고 증언하고, 오렐리앵은 다시 만난 그녀 앞에서 이제껏 일궈온 자신의 삶과 가족이 원경으로 물러나는 경험을 하지만, 단둘이 남았을 때 두 사람이 확인하는 것은 완전히 어긋나버린 사랑이다. “이제 당신과 나 사이에는 공통된 것이 정말로 전혀 없네요, 나의 소중한 오렐리앵, 이제는 아무것도……”(2권 406~07면)
새로운 문화와 사상이 충돌하고 폭발하던 1920년대 파리의 초상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는 거장의 시선
『오렐리앵』은 실제 인물을 가까이 혹은 멀리 모델로 삼은 여러 등장인물뿐 아니라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심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을 배치해 흥미로운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몽환적으로 그려진 시공간이 바로 오렐리앵과 베레니스가 거니는 그때의 파리다. ‘잃어버린 세대’의 예술가들이 바다를 건너 모여들고, 오렐리앵의 단골 술집과 카페는 그들의 사교장이다. 초현실주의가 문화운동의 전위에 선 시대상은 『오렐리앵』에서 다다이스트 화가의 전시회와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등을 모델로 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떠들썩한 소동으로 재현된다. 한편으로 전쟁에서 목격한 참상에 괴로워하며 센강에서 익사한 여자의 데스마스크와 죽음의 이미지에 집착하거나 옛 전우들이 여는 연회에서 특별한 유대를 확인하는 오렐리앵의 모습은 양차 대전에 참전하고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아라공의 경험과 함께 당시의 수많은 참전군인들을 표상한다. 또한 유명 배우를 내세운 새로운 사업 종합 뷰티 살롱의 등장이나 부동산과 택시 컨소시엄에 참여하는 부유층의 향락적인 생활,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 들이 사건과 대화로 재구성되어 실감을 더한다.
『오렐리앵』은 작가 아라공 자신이 시와 혁명, 예술과 정치의 일치를 내세운 초현실주의 집단의 일원이었으며 평생 당대 문학과 정치의 맨 앞에 서서 활약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소설이다. 『오렐리앵』의 이런 면모에 대해, 아라공이라는 예술가와 소설(예술)의 본질을 ‘참된 거짓말’이라는 열쇠말로 깊이 있게 분석한 역자 이규현의 「작품해설」이 풍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또한 아라공의 출생과 성장에 얽힌 복잡한 사정과 분방한 연애사, 굳건한 공산당원으로서의 정치적 이력 등을 추적한 「작가연보」는 그 자체로 소설만큼이나 흥미롭다. 작품과 작가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역자의 논평 곳곳에 묻어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그간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았던 루이 아라공의 깊고 넓은 문학세계에 한층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의 말
플로베르처럼 아라공도 『오렐리앵』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소환하여 과거에 실패한 사랑에 현재의 사랑에 닥친 난관을 견주어보면서 불가능한 사랑, 불가능한 커플의 현실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미련을 버림으로써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고자 한 듯하다. 이와 동시에 자기 또래 세대, 광기의 20년대, 두 전쟁 사이에 젊음을 맞이한 세대, 제1차 세계대전의 시련으로 전쟁 강박증에 시달리는 세대, 자기를 잊고 자포자기하는 세대, 조만간 닥쳐올 새로운 공포(제2차 세계대전)를 의식하지도 못한 채 조장하는 세대의 초라한 운명과 냉혹한 현실을 진단한다._이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