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역사의 심연을 파고드는 강렬한 미학
한국문학의 독보적인 시선, 정찬 소설의 정수
권력과 폭력의 문제, 그리고 고통 아래에서도 빛을 발하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해온 작가 정찬의 열번째 장편소설 『발 없는 새』가 출간됐다. 소설은 난징학살, 히로시마 원폭, 일본군성노예제, 문화대혁명 등 20세기 전반에 걸친 폭력의 역사를 새롭게 성찰하며 독자로 하여금 인간에게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지 되묻도록 만든다. 역사의 큰 줄기 아래에서 사실과 허구가 뒤섞이며 가공의 인물 워이커씽을 중심으로 장국영, 첸카이거, 아이리스 장, 최승희 등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더없이 세밀한 재현으로, 때로는 흐릿하고 몽롱한 꿈의 장면과 같이 펼쳐진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각자의 질문을 쥐고 “스스로 그림자가 되고 꿈속의 사람이 됨으로써” 저마다 스러져가는 인물들의 “아름다운 무너짐”(추천사 김연수)은 역설적으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역사의 폐허를 일으켜 세워 보인다. 등단 이후 40년에 가까운 시간, 늘 새로운 물음을 던지며 부조리한 고통의 실체와 숨겨진 진실을 찾아 밝혀온 정찬의 집요한 문제의식이 응축된 역작이다.
목차
1장 패왕별희
2장 발 없는 새
3장 역사의 아이
4장 맹인 악사
5장 나비의 꿈
작가의 말
저자
정찬 지음
출판사리뷰
역사의 심연을 파고드는 강렬한 미학
한국문학의 독보적인 시선, 정찬 소설의 정수
권력과 폭력의 문제, 그리고 고통 아래에서도 빛을 발하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치열하게 탐구해온 작가 정찬의 열번째 장편소설 『발 없는 새』가 출간됐다. 소설은 난징학살, 히로시마 원폭, 일본군성노예제, 문화대혁명 등 20세기 전반에 걸친 폭력의 역사를 새롭게 성찰하며 독자로 하여금 인간에게 진정한 구원이란 무엇인지 되묻도록 만든다. 역사의 큰 줄기 아래에서 사실과 허구가 뒤섞이며 가공의 인물 워이커씽을 중심으로 장국영, 첸카이거, 아이리스 장, 최승희 등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가 때로는 더없이 세밀한 재현으로, 때로는 흐릿하고 몽롱한 꿈의 장면과 같이 펼쳐진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각자의 질문을 쥐고 “스스로 그림자가 되고 꿈속의 사람이 됨으로써” 저마다 스러져가는 인물들의 “아름다운 무너짐”(추천사 김연수)은 역설적으로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역사의 폐허를 일으켜 세워 보인다. 등단 이후 40년에 가까운 시간, 늘 새로운 물음을 던지며 부조리한 고통의 실체와 숨겨진 진실을 찾아 밝혀온 정찬의 집요한 문제의식이 응축된 역작이다.
진정한 구원을 위한 치열한 물음들
환영처럼 뒤섞이는 사실과 허구
소설은 베이징에서 중국 특파원으로 일하는 ‘나’가 영화배우 장국영의 투신자살 소식을 접하며 시작된다. ‘나’는 ‘난징학살 심포지엄’에서 만나 가깝게 지내오던 워이커씽이 장국영과 영화 「패왕별희」 의 감독 첸카이거와 깊게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가 독특한 식견과 미묘한 존재감을 지닌 재야 역사학자로만 알고 있던 워이커씽은 젊은 시절 전설적인 경극 배우 메이란팡의 공연에서 연주를 했던 음악가로, 「패왕별희」 촬영 당시 어려움을 겪던 장국영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고 우정을 나눈 일이 있었다. 마치 유령처럼 느껴지던 워이커씽의 사연이 조금씩 드러나고, 비애가 감도는 그의 생애에 더 큰 궁금증을 가지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와 주변 인물들의 생애에 깃든 역사의 비극적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제목이자 영화 「아비정전」 속 장국영의 유명한 대사이기도 한 ‘발 없는 새’는 땅에 내려 앉아 쉬지 못하고 바람에 떠밀리듯 살아간 장국영의 생애와 소설 속 인물들의 어두운 운명을 암시한다. 주인공 워이커씽은 난징학살 직후 출생하여 일찍 가족을 잃고 맹인 악사에게 음악을 배워 중국 각지를 정처 없이 떠돌며 살아왔다. 작품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워이커씽의 악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숨길 수 없는 깊은 허무는 그 개인이 지닌 슬픔뿐만 아니라, 폭력으로 점철된 20세기 역사의 그림자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첸카이거는 그의 영화 「패왕별희」 속 주인공들처럼 문화대혁명의 격랑에 휩쓸려 혹독한 체험을 한 인물이다. 그는 워이커씽의 아름다운 연주를 듣고 그에게서 예술과 자유의 가치를 배웠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러한 가치와 배치된 ‘혁명’을 추종하는 홍위병이 되어 예술가였던 아버지를 공개 비판해야만 했던 고통스러운 일화를 ‘나’에게 들려준다.
장국영의 거짓말 같은 죽음으로 시작된 소설은 또다른 중심인물인 아이리스 장의 자살 소식으로 큰 변곡점을 맞이한다. 『The Rape of Nanking』의 저자 아이리스 장은 중국계 미국인 역사가로 워이커씽과 함께 난징학살에 천착하여 그 진상을 세계에 알리고, 희생자와 가해자를 나란히 구원하는 꿈을 꿨으나 일본 극우 세력의 비난과 협박으로 우울증을 앓다 죽음에 이르고 만다. 워이커씽과 ‘나’는 아이리스 장을 추모하며 다시 한번 폭력의 실체와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한편 ‘나’의 고모할머니는 일본군성노예제의 피해자로, 어린 시절 난징의 위안소에 끌려갔다 돌아와 홀로 살아간다. 그는 끔찍한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꽁꽁 묶인 삶”(131면), 즉 가해의 역사에 다시 무릎 꿇지 않기 위해 자유롭고 온전한 삶을 이어가려 노력한다. 이렇듯 소설의 인물들은 전쟁의 폭력과 권력의 억압에 휩쓸리면서도 역사를 직시하며 묻고 답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저마다 피할 수 없었던 참혹한 역사를 증언하는 동시에 그것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살아가려 한다. 주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중국의 경극, 한국의 판소리, 일본의 노(能)는 그 간절한 삶들을 모사하는 예술 장르인 동시에, 메이란팡, 최승희 등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을 아름답게 완성하는 삶의 한 형태로 생생하게 묘사된다.
“악을 이해할 수 없으면
그 악을 행한 이들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되니까요.“
정찬의 치열한 물음들이 늘 그러했듯 『발 없는 새』가 역사를 바라보는 방법은 통념에서 벗어나 있다. 소설은 폭력의 역사 앞에서 느끼는 깊은 분노와 허무를 그리는 동시에 불가해한 악의 실체를 냉철하고 예리하게 분석한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난징학살은 워이커씽의 표현에 따르면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사건이다. 워이커씽은 그 곤혹스러움의 근원으로 일본 천황을 지목한다. “아우슈비츠의 야만이 아리아 민족의 순결을 위한 것이었다면, 난징학살의 야만은 한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희귀한 갑각류와 미키마우스를 좋아했고 영국식 조반을 즐겼던 한 인간을 일본인은 신으로 섬겼습니다.”(43면) 소설은 초월적 존재로 군림하는 천황에게 인간의 죄악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없으므로, 일본인에게도 그 책임을 묻지 못하게 되는 이 모순에서부터 ‘악에 대한 이해’를 시작한다. 워이커씽은 난징의 “대척적인 공간”(44면)으로 원폭 피해를 입은 히로시마를 제시하며, 침략국인 일본이 스스로를 “난징의 죄악”을 짊어져야 할 가해자가 아니라, “히로시마의 신성”(45면)만을 기억하는 희생자로만 여기고 있는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워이커씽과 아이리스 장은 이 ‘곤혹스러운’ 악의 구조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가해자를 이해하고 희생자와 함께 구원하고자 노력한다. 타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하는 것,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162면) 것이야말로 난징학살을 비롯한 수많은 폭력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이들이 가닿고자 하는 구원은 추상적이고 종교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변화다.
『발 없는 새』는 가해자가 사과함으로써 가해자가 피해자를, 피해자가 가해자를 이해하고 나란히 서는 변화를 꿈꾼다. 이는 “가해자가 자신이 가해자임을 고백”(241면)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아직은 희미하고 아득한 몽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간절한 꿈은 “역사의 시간 위에서 역사를 내려다보며”(240면) 날아가는 ‘장자의 나비’와 같이, 시간과 망각을 이겨내고 이어지는 아름다운 몽상이다. 그렇기에 『발 없는 새』가 그리는 몽상은 소설이 끝나며 사라지고 마는 환영이 아니다. 소설을 읽고 이 아름다운 몽상을 나눠 가질 때, 우리는 새로운 역사를 함께 꿈꿔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말
소설의 바탕은 허구입니다. 소설에서 허구의 가치는 현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혹은 은폐된 ‘진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있습니다. 허구의 깊이가 현실의 깊이이자 소설의 깊이인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
소설을 쓰는 동안 자주 들여다본 책이 중국 영화감독 첸카이거의 자전 에세이 『나의 홍위병 시절』과 중국계 2세 미국인 작가 아이리스 장의 역사서 『The Rape of Nanking』입니다. 두 책의 한국어 번역본은 1991년, 2006년에 출간되었습니다.
『나의 홍위병 시절』을 읽으면서 가장 놀란 것은 냉정하면서도 서정적 밀도가 느껴지는 문장이었습니다. 그 문장이 그리는 문화혁명의 어두운 정경은 개인과 역사의 관계성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품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영상화한 작품이 「패왕별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The Rape of Nanking』은 작가가 스스로 역사의 진창 속으로 들어가 그 진창을 온몸으로 헤쳐 나가며 쓴 책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첸카이거와 아이리스 장을 소설에 끌어들인 것은 그들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소설의 제목 ‘발 없는 새’는 2003년 4월 1일 투신자살한 장궈룽이 출연한 영화 「아비정전」의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이 새는 나는 것 이외는 알지 못해.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라는 대사에서 빌려왔습니다. 소설의 중심인물에 드리운 삶의 그림자가 ‘발 없는 새’의 흔적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발 없는 새』는 2008년 문예지에 발표하고 2013년 작품집 『정결한 집』에 수록한 단편 「오래된 몽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새로운 생명체를 세상 속으로 내보내게 되어 마음이 설렙니다.
2022년 5월
정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