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국소설의 새로운 화법을 제시하며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진 언어의 세공
“정지아의 소설은 삶의 현존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한국소설계의 대표적인 ‘리얼리스트’ 정지아가 8년 만에 새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을 선보인다. 작년에 심훈문학대상과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하며 저력을 과시한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사실과 허구를 교묘히 섞어가며 세태의 흐름을 정밀하게 포착해낸다. 특히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인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에서 보여주는 언어적 세공이 탁월한데 아버지 세대의 이념갈등과 역사적 상흔을 아들이 이어받는 모습을 뻔하지도 호락호락하지도 않게 그려냈다.
남로당이었던 부모의 삶을 소설로 써낸 『빨치산의 딸』 이후 인간의 삶에 스며든 현대사의 질곡을 천착해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새로운 화법도 다양하게 시도한다. 갑작스럽게 기억상실에 빠진 인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극소수 마니아의 ‘취향’만을 ‘저격’할 듯한 생소한 커피원두와 인테리어의 세계를 부려놓는 식이다. 현실을 직시하는 소설가 정지아가 ‘경험’ ‘기억’ ‘관계’ 등 고유한 실존적 요소에서 살짝 눈을 돌려 정체성의 새로운 요소를 탐사하기 시작했음은 시사적인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취향이 자기 서사의 확고한 페르소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기존의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세상 변화에 적극 감응하는 가운데 그 진폭을 넓혀가는 정지아의 이번 소설집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자아내며 독자를 몰입시킨다.
목차
자본주의의 적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
검은 방
아하 달
애틀랜타 힙스터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
계급의 완성
존재의 증명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해설 정홍수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
정지아
출판사리뷰
낯선 시도가 배반하지 않는 소설의 본령
“그래서 우리는 정지아를 읽는다”
갑자기 기억상실에 빠진 한 남자가 까페에서 정신을 차리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존재의 증명」은 기존 정지아 소설에 비춰봤을 때 유독 낯설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밝혀내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남자는 자신의 정체가 오리무중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커피나 액세서리의 취향을 마음에 들어한다. 결국 경찰서에서 한바탕 소동을 겪은 뒤 그는 자신의 집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도착한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기억은 사라져도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242~43면)라는 남자의 묵직한 한마디는 그간 정지아 소설에서 주변부에 위치해온 사물들이 이제 정체성을 대변하는 상관물로 도약했음을 의미한다. 「애틀랜타 힙스터」에는 취향이 존재 자체의 이유인 ‘힙스터’들이 등장한다. 비싼 자전거를 사기 위해 굶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원어민교사 ‘존’, 인도에 심취한 도예가이자 까페 사장인 ‘윤’이 대표적이다. 이 힙스터들이 살아가는 곳이 남도의 한 소읍이라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화자인 ‘스텔라’가 이들을 관찰하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어느날 ‘존’에게 개인교습을 받기 위해 찾아온 ‘미경’의 무례한 말들이 이들 사이에 묘한 기류를 만들어낸다. 어색한 분위기, 뮤지션을 꿈꿨던 ‘존’이 연주하는 피아노의 불협화음, 흩날리는 벚꽃의 삼박자가 형성하는 소설 결말부의 불편함은 취향 외에는 정체성을 표현할 곳이 없는 젊은이들의 처량함을 상징하는 듯하다. 매일 야근을 반복하던 하룻밤 갑자기 집으로 뛰어들어온 고양이가 낳고 간 새끼들을 돌보며 전개되는 이야기 「엄마를 찾는 처연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는 사회초년생의 짙은 애환이 서려 있다. 팀장의 폭언, 끝나지 않는 잔업, 그리고 자기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금수저’ 남자친구 때문에 힘든 와중에 아기 고양이까지 떠맡게 된 주인공은 매일 밤 유튜브로 처연한 아기 고양이 소리를 틀고 다니며 어미를 ‘설득’한다. 그 골목길에서 주인공은 새끼를 버린 어미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데 작품 마지막의 서늘한 독백이 특히 인상적이다. 경비원으로 일하는 화자가 서서히 ‘풋케어’에 빠져드는 「계급의 탄생」은 한편의 시트콤을 보는 듯하다. 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고급 외제 승용차 뒷자석 노인의 “분홍빛 발바닥”(196면)을 본 화자는 자신의 갈라터진 발바닥이 “뭔가 억울”(199면)하다며 화장품가게에서 풋크림을 사는데, 그래도 발이 ‘분홍빛’이 되지 않자 거금 ‘칠십만원’을 들여 풋케어샵을 드나들게 된다. 카드명세표가 날아들자 집안에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화자는 자신의 지난 삶을 반추한다. 그리고 고된 아르바이트로 이미 굳은살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아들 발의 각질을 깎아내기 시작한다. 「아하 달」은 개를 초점화자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 알래스카 대설원을 누비던 늑대의 자손인 화자는 한국 땅에서 케이지에 갇힌 신세이지만 자존심만은 여전하다. ‘모든 관계에 서툰’ 인간 남자에게 구조를 받아 교감을 나눠가는 도중, “기품의 맛을 결코 알 수 없는 족속”(114면)으로 여기는 동네 개의 “욕정”(129면) 때문에 생명을 잉태한다. 그가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과, 그것을 보살피는 남자의 모습이 자아내는 새로운 관계성에 대한 묘사가 이채로운 동시에 따뜻하다. 이러한 낯선 시도들은 각각의 이야기가 완결적일뿐더러 세상을 섬세하게 묘파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본령을 배반하지 않는데, 한달음에 읽히는 문장 끝에서 독자들은 작은 위로를 저마다 품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삶은 어떻게 복원되는가
“다시 한번, 소멸되지 않는 빛과 어둠의 리얼리즘”
정지아의 오랜 독자들이 더 느껍게 받아들일 만한 작품들은 그 광채가 한층 더 깊어졌다. ‘K-픽션’(아시아) 시리즈로 번역돼 이미 해외에 번역 소개된 바 있는 「검은 방」이 대표적이다. 『빨치산의 딸』의 모델인 아흔아홉 ‘노모’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어머니의 과거와 현재를 천의무봉하게 넘나든다. 사상 때문에 목숨도 버리는 빨치산이 된 배경에 한 남자를 향한 ‘사랑’이 있었고, 지금 그 사랑은 “사상 말고, 그녀가 찾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85면)인 ‘딸’로 이어진다는 사랑의 연대기가 아름다우면서도, 이 작품이 “30년 전부터 시작된 정지아의 ‘긴 전투’”(문학평론가 정은경)를 드러낸다는 평가에 걸맞게 삶에 대한 수많은 생각을 파생시킨다. ‘노모’와 ‘작가’가 직접 출연하는 또다른 작품인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은 하나의 코미디라 「검은 방」과 연이어 읽었을 때 더욱 정겹다. 어느날 중앙일간지 기자가 ‘지리산 은둔자’인 화자와 그 집의 텃밭을 취재하러 나온다는 소식에 그는 눈앞이 캄캄해진다. 평생 농사 한번 지어보지 못한 터라 제대로 가꾸지 못한 텃밭에는 잡초가 무성했던 것이다. 뒷말이 무성한 시골 마을에서 유난히 입이 무거운 ‘송씨 아주머니’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소동과 ‘송씨 아주머니’와의 사이에서 피어나는 우정담이 마음을 데워온다. 표제작인 「자본주의의 적」은 화자의 대학 동기인 ‘방현남’이 주인공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방현남은 어디서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비기를 습득했는데, 작가는 그가 왜 “자본주의의 진정한 적”(8면)인지를 익살스러운 어투로 풀어낸다. 늘 잠만 자던 현남이 안기부에 잡혀갔다 생채기 하나 없이 배웅을 받으며 귀가한 이야기, 현남의 운전 도전기, 그리고 “야쿠르트 아저씨”(29면)가 꿈인 현남의 아들 에피소드는 하나하나 웃음을 자아내지만, ‘가상화폐’와 ‘주식’에 몰두하는 이 시대에는 한 방의 카운터펀치가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는 말기 암 환자인 사촌동생 ‘기택’의 여름 한나절 방문기다. “당신 아버지와 동네 장정 스무명이 국군 총에 맞아 죽는 걸”(251면) 눈앞에서 본 기택의 아버지는 평생 술만 마시며 살다 암으로 죽었다. 기택은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결국 알코올중독으로 인한 ‘섬망 증상’을 겪으며 똑같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한 집에 모인 기택과 화자, 그리고 화자의 어머니(‘짝은어매’)는 매운탕을 끓여서 먹기 시작하는데, ‘지식인’이자 ‘사회주의자’의 관점에서 계급의식이 없다며 무시해온 기택이 사실은 자기의 삶을 뒤에서 지탱해준 존재였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한국현대사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이어지는지,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멸되고 복원되는지를 장인적인 필치로 그려냈다.
한국소설의 또다른 시작
정지아 소설은 언제든 살아온 만큼,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이다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이 소설집을 읽고 “정지아 소설은 언제든 살아온 만큼,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이 아니었던가”(해설, 295~96면)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되돌린다. 이번 작품집에서 보여준 파격적인 시도 역시 삶의 현존을 정확하게 묘사해온 정지아 소설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소설집에는 ‘문학박사 정지아’를 비롯한 실존인물과, 누가 봐도 허구로 창조해낸 인물, 그리고 그 구분이 모호한 수많은 인간군상이 등장한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 안에서 살아 숨쉬지만 소설집을 덮을 때 독자들은 이들이 서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짝은어매헌티 쫌 전해주소. 짝은어매 땜시 이때꺼정 나가 살았네”(「우리는 어디까지 알까」 275면) 같은 남도의 입말이 긴 여운으로 남으며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존재의 이름 하나하나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날렵한 최첨단의 소재로 무장한 젊은 세대 작가들의 소설이 주는 재미와는 다른, 육중한 주제의식을 무겁지만은 않은 위트와 에피소드로 버무려내는 중견작가 정지아의 소설을 읽는 경험은 재미 이상의 메시지와 울림으로 다가올 것이다.
"…옳은 건 없다. 모르겠다."
- 저자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