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산소조차 쓰지 못한 죽음도 새겨야 했다”
2013 만해문학상 수상작가 조갑상의 신작
근현대사를 묵직하게 껴안고 시대를 증명하는 단편들
장편소설 『밤의 눈』으로 “비극적인 분단 한국사의 핵심을 파고들어 역사적 진실과 개인의 내면을 생생하게 되살렸다”는 찬사를 받으며 2013년 만해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조갑상의 신작 소설집 『병산읍지 편찬약사』가 출간되었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30여년 동안 세권의 소설집과 한권의 장편소설만을 발표한 과작의 작가가 5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2009년부터 올해 여름까지 발표된 작품들이 묶였다. 탄탄한 구조 안에 존재론적 고독과 둔중한 근현대사를 주로 담아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역사 속의 개인을 집요하게 조명하며 묵묵히 시대를 증명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오랜 시간 천착해온 소재인 ‘보도연맹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을 포함하여, 과거와 화해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이어지는 삶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작가는 이번 소설집으로 “이전보다 더 냉정하고 엄격하게 역사를 상대한다.”(해설, 양경언)
목차
해후
물구나무서는 아이
병산읍지 편찬약사
봄, 그리고 여름까지
위로
내 사랑 냉온장고
목구멍 너머
패가 뭔지는 몰라도
해설ㅣ양경언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
조갑상
출판사리뷰
“반공, 반공, 또 반공”의 비극
보도연맹은 해방 이후 좌익 쪽에서 활동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1948년에 만들어진 교화 단체로, 이승만 정권 아래 좌익과는 무관한 사람들까지 가입시키며 30만명 규모로까지 확대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른바 ‘빨갱이’를 색출하기 위한 예비 검속이라는 이름 아래 군경이 비무장 민간인들을 포함,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한 일을 ‘보도연맹 사건’이라고 한다. 사건 발생 이후에도 계속된 좌우대립과 군부정권의 사건 축소, 은폐 작업으로 피해자가 빨갱이, 사상범으로 낙인찍혔으며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나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현대사의 대표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 스스로 “애도 불가능한 죽음”이라고 명명한 보도연맹 사건은 소설가 조갑상에게 가장 중요한 테마이자 작가적 의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오랜 시간 긴 애도를 하듯이 여러 작품에서 이 주제를 변주해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도 보도연맹 사건과 관련된 여러 층위의 삶을 각기 다른 시간대에서 조명하는 방식으로 “어떤 이들에겐 살아 있는 진실이었을 이 사건을 삶의 원체험 자체로” 살리며 “가장 추상적인 사유체계라 할 법한 이데올로기의 동기들이 실은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의 갈피를 뒤흔드는지 예민하게 잡아”(해설)챈다.
『병산읍지 편찬약사』에서 보도연맹 사건은 처형을 앞둔 보련원들이 탄 차에 장인을 태워보낸 박 영감의 이야기(「해후」), 아버지를 잃고 오히려 반공에 대한 강박만 생긴 채 열성적인 극우보수가 되어 결국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홧김에 죽어버린 김영호 씨의 이야기(「물구나무서는 아이」) 등에서 직접적으로 소환된다. 특히 표제작 「병산읍지 편찬약사」는 보도연맹 사건을 병산이라는 지역의 읍지 편찬 과정을 통해 정면으로 그린 작품이다. 읍지 편찬위원회로부터 읍지의 역사 부분 편찬을 의뢰받은 주인공 ‘이규찬 교수’는 초고를 작성하면서 과거 보도연맹 사건을 겪었던 지역으로서의 병산을 부각시키지만 편찬위원회는 “좌빨 글 싣는”(「병산읍지 편찬약사」 71면)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기록 자체를 줄여달라고 요구한다. 소설은 이 교수가 해당 내용을 스스로 검열하고 고치려고 노력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과거의 일을 올바르게 기록하고 기억할 의무를 지닌 한 개인이자 역사학자로서의 고민을 낱낱이 드러낸다.
이규찬 교수는 진작부터 가슴에 치민 스스로를 향한 화를 죽이며 줄이 그어지고 화살표와 줄 바꿈표 등 자기만이 아는 교정부호들이 어지러운 글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았다. 전후 맥락이 끊어져 다시 써야 할 지점에 표시를 해가다 희생자 숫자와 조사기관 대목에 눈길이 머물렀다. ‘1차 조사는’에서부터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조사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까지 모두 삭제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슬며시 달려들었다. 아니지,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마음보다 손이 성급하게 유족회 결성과 합동묘 파괴가 담긴 문장을 지우고 있었다. 그는 깜작 놀라 연필을 내던지고 일어났다.
“이런, 제기랄!” (「병산읍지 편찬약사」 84면)
결국 이 교수는 읍지 편찬에서 손을 떼고 읍지는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한문장의 기록만을 남기고 발간된다. 이 교수의 초고와 최종적으로 읍지에 실린 글이 소설 앞, 뒤에 제시되며 보도연맹 사건 서술이 극적으로 축소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고, 소설은 지역 국회의원 및 정재계 인사들이 함께한 떠들썩한 해단식으로 마무리된다. 이 “서늘한 결말”을 통해 작가는 “역사에서 범해진 사건들을 과연 누가 책임질 수 있”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며 “현재 보도연맹 사건에 대한 의미화가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해설)를 돌아보게 한다.
어떻게 우리는 주어진 삶을 계속할 것인가?
‘격변의 한국 현대사’는 과거 어느 시기에 대한 수식으로 단정할 수는 없고, 특정한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역사가 승인하지 않는 삶”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조갑상의 소설은 과거로부터 파생된 현재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얼굴과 목소리를 짚어낸다.
셋째 딸의 결혼식, 지인의 초대로 방문한 집회 기록 사진전,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한번에 조명하여 역사의 흐름을 만드는 개인의 존재를 발견하는 ‘그’의 이야기(「봄, 그리고 여름까지」), 자녀의 진로 문제로 세대 갈등을 느끼는 ‘김정태’의 이야기(「목구멍 너머」), 아버지와 함께 외출을 하며 이미 손자까지 있는 자신의 나이 듦과 아버지의 나이 듦을 함께 받아들이게 되는 ‘김 영감’의 이야기(「위로」) 등에서 엿볼 수 있듯 작가는 기성세대로서 자신이 절감하는 사회적인 갈등을 특유의 시선으로 담아내며 “지나간 시간과 다양한 경로로 연결된 현재의 삶”을 직시한다. 특히 소설집 전반에서 보여지는 “더 말하지 않”는 결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인식과 함께 “지금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는데, 이는 섣부른 화해를 피하고 여전히 이어지는 삶 한가운데를 응시하는 방법으로 역사와 시간을 다루려는 작가의 미더운 고집이다.
조갑상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속단하지 않고,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하는 삶을 겹겹으로 신중하게 조명하는 것으로 역사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 이는 쉽사리 말할 수 없는 비극을 오랫동안 직시해온 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경륜일 것이며 한편으로는 “인간의 삶을 소설이 지지하는 방식”(해설)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갑상의 소설은 지금 여기에서, 그 무엇보다 엄격하게 역사를 상대하고 있다.
작가의 말
소설 속에서 6·25전쟁으로 이래저래 상처받은 인물들은 그들대로, 또 다른 갈등과 고민 속에 사는 인물들은 또 그들대로 우리의 현대사를 통과하고 있다. 분단은 너무나 엄연해서 오히려 잊고 있거나, 왜곡과 억압을 마냥 허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자주 해본다. 그리고 우리 앞에 갑작스럽게 놓인 노년의 길고 긴 시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딱하고 걱정스럽다.
소설집 출간을 준비하던 2016년부터 올해 5월 대선까지 일어난 대변혁 앞에서 심신이 크게 요동치는 귀한 경험도 했다. 내 글쓰기가 그 변화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을지 나름의 궁리도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