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조선족 작가 금희가 한국문학에 던지는 신선한 질문
중국 장춘에 머물며 한국과 중국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 조선족 작가 금희(본명 김금희)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을 선보인다. 금희는 2013년 소설집 『슈뢰딩거의 상자』(료녕민족출판사)를 중국에서 출간한 뒤 2014년 봄, 계간 『창작과비평』에 조선족 사회의 탈북 여성 이야기를 다룬 단편 「옥화」를 발표하며 한국 문단에 신선한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을 뚫고 나가는 박력있는 서사와 섬세한 심리묘사로 조선족 사회에서 바라보는 탈북자 문제,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체감하는 정체성의 갈등 과정 등을 핍진하게 그려낸 일곱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한국문학의 시야가 금희 이후 또 한번 넓어졌음을 절로 느낄 수 있다. 결코 우회하지 않는 금희 소설의 다채롭고도 선명한 이야기는 새롭고 의미있는 징표이자 신선한 질문으로 다가올 것이다.
목차
세상에 없는 나의 집
봉인된 노래
옥화
월광무
쓰레기통 위의 쥐
돌도끼
노마드
해설|백지연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
금희
출판사리뷰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무수한 소수들의 목소리
이전 한국소설에도 탈북자와 난민 문제, 디아스포라 체험 등에 대한 서사는 있어왔지만 금희의 「옥화」는 북한을 탈출한 한 탈북 여성이 남한에 정착하기 이전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써 기왕의 서사와 차별화된다. 이야기의 차별성뿐 아니라 조선족 작가의 목소리는 그 자체 신선한 매력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 관심을 증명하듯 2014년 여름, 계간 『문학동네』 ‘리뷰좌담’과 계간 『아시아』 ‘K픽션’ 꼭지에서 다시 한번 호명되며 금희 소설은 적극적 조명의 대상이 되었다.
금희의 인물들은 두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계인, 그저 더 잘살기 위해 집을 떠나 바깥을 떠도는 생활인, 급변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다 몰락하는 이상주의자 등 다양한 면모를 갖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세상에 지친 존재를 환대해주고 편안하게 누여줄 ‘집’을 소망하는 심리적 약자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너무 불안한 곳이다.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의 ‘나’는 자신을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사람”으로 느끼며 ‘온전한 나 자신’을 꿈꾼다. 「봉인된 노래」에서 집안의 모든 기대를 받고 자란 ‘외삼촌’은 결국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다 가산을 탕진하며, 「옥화」에는 “조국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떠나오고 떠나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월광무」의 ‘유’는 중추절임에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사업 자금을 빌리기 위해 며칠을 꼬박 기차를 타며, 「노마드」의 ‘박철이’는 한국에서 조선족 노동자로 생활하며 한국 사람은 조선족에게, 조선족은 다시 탈북자에게 불신을 갖는 차별의 악순환을 목도한다.
눈만 뜨면 일, 일하는 것 외에 그 나라 일반 국민이 누릴 수 있는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는 돈벌이 기계 같은 생활, 그곳에서 시형네는 몸뚱어리 하나와 불법체류자의 신분 외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시형네는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자신들의 진실한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람이 말이야, 그 상황에 들어가니까 그렇게 되더라고. 자기는 안 그럴 것 같지? 흐흐. 아니야. 사람은 다 같애.” 시형의 발랄한 웃음 속에서 홍은 자기편이 아닌 땅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불안함을 보았다.(「옥화」 82면)
금희의 소설은 강한 서사, 어떤 인물도 우위에 둘 수 없게 만드는 섬세한 심리묘사, 읽는 재미를 더해줄 풍부한 어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글은 소설 읽는 본래의 재미를 찾아줄 만큼 이야기를 끝까지 놓지 않고 온몸으로 밀고나간다. 선명하고도 힘있는 서사와 때로는 너무 생생해서 서늘하고 불편하기까지 한 인물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소설 고유의 미덕을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소설에 등장하는 탈북자, 조선족 노동자와 같은 소수자를 시혜적인 관점에서 보기 쉽지만 작가는 가진 자들을 향해 당당히, 어쩌면 뻔뻔스럽게 보일 법한 태도로 그들이 가진 것의 일부를 요구하는 탈북 여성을 등장시킴으로써 독자의 예상을 무너뜨린다. 「노마드」에는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온 ‘박철이’와 “가능성의 유혹” 때문에 중국으로 온 ‘미용실 사장’이 등장한다. 마치 탈북자에게 우월감을 느끼는 조선족이 반대로 한국에서는 소수자로 차별당하는 경우처럼 금희는 자본주의하의 상대적인 현실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보여준다. 금희의 소설에는 또한 말맛을 더해주는 어휘들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가쯘하다, 올방자를 틀고 앉다, 저마끔, 깇다, 뒤거두매, 옹근, 갑삭하다, 무득무득, 두근닥질하다 등과 같은 북한말, 조선족 말들은 일견 낯설게 읽히지만 이야기의 맥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가능성의 유혹 때문이지요. 좀더 돈이 있었으면 미국으로 보내주고 싶은데, 그렇게는 어려우니까 차라리 가능성의 나라인 중국을 택한 거죠. 우리 세대야 뭐 더이상 큰 반전이 있겠어요? 다 자식들의 장래를 위하는 짓이지요.” (…) 수미와 자신은 생계를 위하여, 이 여자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하여, 그리고 선아는 생존을 위하여 떠나가고 또 떠나오는 것이다.
“허 참, 사람 사는 거 보면…… 그러네요. 우리는 좀더 잘살아보자고 그쪽 나라로 떠나가고, 그쪽은 또 더 잘살아보자고 이쪽 나라로 떠나오고……”(「노마드」 259면)
한편 작가 금희는 1979년생으로, 중국 개혁개방 이후의 격변기를 체험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경제로 변화한 중국사회, 그 속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삶을 그려낸 일련의 작품들은 결국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바깥을 떠도는 세상 모든 약자를 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디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한 채 “자기편이 아닌 땅에서 살아가는 불안함”을 지닌 인물들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인 셈이다.
아버지는 왜 어김없이 떠나가야 했을까. 문혁이 터지면서 대학 갈 기회를 놓치고 당의 호소에 따라 전국순회를 떠나던 것이 방랑생활의 발단이 되었다는 구실은 그만 댔으면 싶었다. 개인의 노동을 억압하고 그 노동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았던 집체노동의 시대―인민공사의 체제 자체에도 모든 책임을 지울 순 없었다. 그 시절은 국민 모두가 힘들었던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동네 사람들 모두 그 시절 인민공사를 떠나 아버지처럼 떠돌이 장사꾼의 삶을 택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혹시 아버지는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그 저릿한 행복의 느낌을 위해 일부러 오랫동안 떠돌았던 것은 아닐까.(「월광무」 117면)
세상에 없는 나만의 집을 짓는다는 것
작가 금희는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언젠가 흔적 없이 사라질 나 자신이 세상에 대하여 실체가 아닌 것처럼, 내 위에 덧입힌 가족, 직업, 민족, 국적 같은 것들도 결국 그 자체만으로 나에 대하여 실체가 될 수는 없는” 거라고. 작은 조선족 마을에서 태어나 두 언어를 사용하며 자라온 작가 자신이 생을 다해 고민했을 정체성의 문제는 결국 ‘진정한 나는 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와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을 쓰게 했을 것이다. 어쩌면 온전한 자신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삶은, 존재 자체를 조건 없이 환대해줄 집을 찾기 위한 여행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하나같이 ‘집’이 없다. 해서 표제작에 등장하는 ‘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중국식 외관에 조선식 인테리어를 한 나만의 집을 짓는다. 이 소설은 새로 지은 집 안에서 중국인 ‘닝’과 조선족 ‘나’가 마주 앉아 커피와 녹차를 나누어 마시며 끝을 맺는다.
한공간 속에 섞여든 중국인과 조선족 ‘나’가 그려내는 풍경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작가에게 ‘집을 짓는다’는 건 어쩌면 ‘이야기를 짓는다’는 것과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작가 금희는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을 넘어서서 세상에 다시없을 나만의 집을 우뚝 세웠다. 국적, 민족, 성별, 그리고 문학을 넘어서서 현실에 육박해들어오는 금희 소설의 이야기는 분명 우리 문학의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정처없이 풀밭만 찾아다니던 유목민들처럼 끝없이 떠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던 노마드 하나가 돌아왔다는 것, 그녀도 이제 그만 텐트를 내려놓고 누군가와 집이라도 짓고 싶어한다는 것, 그것보다 박철이에게 더 중요한 일은 지금 없었다.(27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