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로든 가야 했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간파하는 천명관의 탁월한 솜씨
천명관은 그 이름 자체로서 힘이 넘치고 독자를 유쾌하게 만드는 작가이다. ‘희대의 이야기꾼’으로서 등단 이후 꾸준히 ‘폭발하는 이야기의 힘’을 선보여왔다. 7년 만에 출간한 두번째 소설집이다. 풀리지 않는 인생, 고단한 밑바닥의 삶이 천명관 특유의 재치와 필치로 살아나는 여덟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여전히 웃음이 나면서도 어느 순간 가슴 한구석이 턱, 막히는 먹먹한 감동을 얻게 되고 그 여운은 진하게 오래 남는다. 그사이 천명관의 유머에는 따뜻한 서정과 서글픈 인생에 대한 뜨거운 위로가 더해졌고, 통쾌한 문학적 ‘한방’은 더욱 강렬해졌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수면의 상태로 꿈속을 헤매거나, 현실을 악몽처럼 살아가거나, 혹독한 현실과 꿈의 괴리를 메우지 못해 좌절한다. 불면 혹은 절망의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나약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투약/복용이다. 밥을 먹고 나면 소화제를 먹고,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머리가 지끈거려 진통제를 먹고, 섹스를 위해 비아그라까지 먹어야 하는 ‘화학적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비타민을 과다복용하기도 한다(「파충류의 밤」).
천명관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와 밤새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현실에서 종종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주인공이 우리 자신이라는 자연스러운 착각에 빠진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60면) 우리는 자주 이 공허하고 막막한 질문 앞에서 머뭇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작가는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슬프고도 따뜻한 유머를 선사하며 어느 봄날 할아버지와 우이동으로 벚꽃놀이를 갔을 때 그에게서 들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우이동의 봄」)를 꺼낼지도 모르겠다.
목차
봄, 사자(死者)의 서(書)
동백꽃
왕들의 무덤
파충류의 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전원교향곡
핑크
우이동의 봄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
천명관
출판사리뷰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게 됐다"
인생의 아이러니를 간파하는 천명관의 탁월한 솜씨
‘고귀하게’ 태어났지만 처연하게 객사해 중음을 떠도는 ‘죽은 자’의 이야기(「사자(死者)의 서(書)」)로 시작해 죽음의 고비를 넘긴 할아버지의 자애로운 미소(「우이동의 봄」)로 ‘인생의 준엄한 깨달음’을 전하기까지, 천명관의 소설은 고통받고 방황하는 절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삶과 죽음, 꿈과 현실을 오가며 때로는 통쾌하게 때로는 쓸쓸하게 담아낸다. 그들은 한때 잘나가던 트럭운전사였지만 이혼 후 가족이 함께 밥도 먹지 않는 하루살이 막노동꾼이거나(「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부푼 꿈을 안고 귀농했지만 ‘파리지옥의 끈끈이’에 들러붙어 괴로워하는 파탄 난 가족이거나(「전원교향곡」), ‘삼만원의 행운’을 바라며 매일 밤 어두운 도로를 오가는 대리기사들(「핑크」), 혹은 섬에서 혹독한 삶을 감내해내야 하는 질투 많은 여자들이다(「동백꽃」). 사회의 주류에 편입된 듯 보이는 사람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은데, 겉으론 화려해 보이는 인기 작가는 어린 시절 폭력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며 여전히 내적으로 방황하거나(「왕들의 무덤」), 이십년 이상 출판사에서 일하며 편집장까지 지낸 화자는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새 잠들지 못하고 길고 외로운 시간을 견뎌낸다(「파충류의 밤 」).
긴 여행을 통해 얻은 것도 있었다. 언제부턴가 지독한 불면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된 거였다. 완전한 체념이었다. 더는 애면글면 잠을 이루려고 애쓰지 않았고 체내에 중금속에 축적되듯 피로가 쌓여 당장 쓰러질 것 같아도 울지 않았다. 다만 깊고 달콤한 잠에 대한 갈망과 아득한 상실감만이 그녀의 깡마른 몸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불면을 껴안고 어두운 방 안에서 뒤척거리는 동안 그녀가 탄 비행기는 서서히 랜딩을 준비하고 있었다.(「파충류의 밤」 91면)
소설 속 주인공들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수면의 상태로 꿈속을 헤매거나, 현실을 악몽처럼 살아가거나, 혹독한 현실과 꿈의 괴리를 메우지 못해 좌절한다. 불면 혹은 절망의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나약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투약/복용이다. 밥을 먹고 나면 소화제를 먹고,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머리가 지끈거려 진통제를 먹고, 섹스를 위해 비아그라까지 먹어야 하는 ‘화학적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비타민을 과다복용하기도 한다(「파충류의 밤」). 호르몬 앞에서 무력한 인간은 대리운전을 하기 위해 신경안정제에 의지해 몽롱한 상태로 운전을 하고(「핑크」), ‘노가다’들은 소주를 약 삼아 마시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노란 알약, 하얀 알약, 파란 알약을 번갈아가며 먹듯”(87면) 천명관이 보여주는 아픈 존재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살피다보면 어느새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잘 처방된 강장제를 들이켠 것처럼 청량한 위로가 전해진다.
그렇다면 그의 인물들은 왜 이렇게 아프고,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는가? 천명관이 모든 이야기에서 천착하는 주제는 비극의 원인은 있지만, 결국 그것은 밝혀지지 않고 또 밝혀질 수 없다는,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게 됐다”(121면)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바로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해 천명관은 인생사의 비애와 아이러니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비극의 궁지에 몰린 인물들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택한 해결책이 전혀 예상치 못한 극단적인 방법이거나 오히려 엇나가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천명관 소설의 아이러니는 단순한 농담이나 해학을 넘어선 비극적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전원교향곡」은 젊은 귀농 부부가 꿈꾸던 시골에서의 삶이 유쾌하고 흥겹게 완주되지 못하고 파탄 나는 모습을 서글프게 그리고 있다. 한때 아름다운 그늘을 드리워주던 ‘포도나무 아래’엔 감당할 수 없는 빚과 더불어 ‘실패한 꿈의 잔해’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불바다로 변하게 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장엄하고 숭고하게 끝나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교향곡〉의 마지막 악장과 묘한 화성을 이루며 감동을 자아낸다.
거대한 불바다가 된 계곡을 내려다보며 그는 비로소 자신이 진즉에 했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것 같았다. (…) 그는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도 않은 채 고개를 들어 연기로 뒤덮여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말라버린 포도나무 잎사귀 사이로 여전히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문득 개에게 물린 팔이 저리게 아파왔지만 물속에 가라앉은 듯 마음은 한없이 편안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눈물이 흘러내렸다.(「전원교향곡」 156면)
꼬이는 인생을 위해 함께 달려주는 천명관의 슬프고 따뜻한 유머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로든 가야 했다.”
비극의 원류를 알 수 없어도 삶이 지속되듯 인생의 목적지가 없어도 우리는 어디론가 향하고 있고, 그 과정에는 대부분 필연 같은 우연이 작용한다.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서처럼 인생은 예기치 않게 손에 들어온 칠면조가 지독하게 따라붙는 상황과 같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우연의 산물은 어느새 ‘당당한 존재감’으로 삶을 새롭게 지배하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노가다 일을 하는 중년의 이혼남 ‘경구’는 냉동창고에서 일을 하다 우연히 거대한 냉동 칠면조고기를 받게 된다. 버리고 싶어도 버릴 수 없고 ‘지독하게도 따라오는’ 칠면조를 들고 다니던 경구는 길에서 만난 빚쟁이를 칠면조로 흠씬 두들겨 패주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벤츠 트럭을 훔친 뒤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둘러앉을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전 부인을 만나러 간다. 아내는 그가 불쑥 내미는 칠면조를 반가워할까? 이 예측할 수 없는 길을 함께 달려주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경구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그가 밟는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실어주며 응원한다. “그래, 까짓것. 거칠게 한판 살다 가는 거다. 인생 뭐 있나?”(110면)
육체노동자들은 목소리가 크다.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다. 술집을 가든 당구장을 가든 제일 큰 소리로 떠드는 이들은 노가다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늘 시끄러운 공사판에서 일하느라 소리를 지르는 게 습관이 되어서이다. 또한 아무도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래고래,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는 것이다./이 씨발 것들아, 제발 아가리 닥치고 내 말 좀 들어봐!.(「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120면)
그래! 진즉에 트럭을 몰았어야 했다. 운전석에 앉는 순간 경구는 비로소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깨달았다. 그가 트럭에서 내려오던 바로 그때부터 스텝이 꼬이기 시작해 결국 여기까지 떠밀려온 거였다. 육중한 트럭의 엔진소리를 들으며 달리는 동안 경구는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다. 두려움도 걱정도 사라졌다. 십일 톤 트럭 안에 앉아 있으니 어쩐지 든든한 기분도 들었다. 깨어지지 않는 어떤 단단한 보호막이 자신을 지켜주는 느낌이었다. 그래, 잘됐다.(「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128면)
천명관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와 밤새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현실에서 종종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주인공이 우리 자신이라는 자연스러운 착각에 빠진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60면) 우리는 자주 이 공허하고 막막한 질문 앞에서 머뭇거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작가는 조용히 등을 토닥이며 슬프고도 따뜻한 유머를 선사하며 어느 봄날 할아버지와 우이동으로 벚꽃놀이를 갔을 때 그에게서 들었던 비밀스러운 이야기(「우이동의 봄」)를 꺼낼지도 모르겠다.
얘야, 잊지 마라. 사는 건 누구나 다 매한가지란다. 그러니 딱히 억울해할 일도 없고 유난 떨 일도 없단다.(「우이동의 봄」 182~1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