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치밀한 문장에 서린 여덟가지 고독의 빛깔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작가 편혜영의 네번째 소설집이다. 이번 소설집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발표한 단편을 묶었다. 세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함과 더불어 현대인의 일반적인 불안과 고독을 이야기하며 그 어둠의 내막을 드러냈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양상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고독한 개인의 삶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불안이 스며드는 것으로 이야기의 틀을 갖추는 작가의 능력은 이미 증명되어온바 이제 작가는 절대고독 너머, 삶의 파국 이후에 은밀히 찾아오는 희망의 기미를 포착하고 있다. 8편의 단편은 편혜영 특유의 건조하고 치밀한 문장과 밀도 높은 서사로 축조되어 점점 더 무르익어가는 작가의 필력에 깊은 신뢰를 준다.
세계는 어둡고 비참하며 부조리하다. 그러나 이 파국을 생의 기초라고 생각한다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몸짓은 그저 소중할 수밖에 없다. 편혜영은 이제 그 작은 움직임들을 하나씩 수집하기 시작한다. 『밤이 지나간다』가 품고 있는 파국, 그리고 그 안에서 싹트는 삶의 의지는 깊이 음미해볼 만하다.
각자의 삶을 고독하게 이고 가며 내면의 혼란이 빚어낸 현실과 망상의 경계에 위태로이 서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깊은 여운을 남기며, 고독의 돌파구를 향해 손길을 내미는 인물들에게서는 미약하지만 멀리서 밝아오는 여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목차
야행(夜行)
밤의 마침
해물 1킬로그램
비밀의 호의
개들의 예감
서쪽으로 4센티미터
가장 처음의 일
블랙아웃(Blackout)
해설Ⅰ조연정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
편혜영
출판사리뷰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작가 편혜영의 네번째 소설집 『밤이 지나간다』가 출간되었다. 개인의 내밀한 고독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8편의 단편은 편혜영 특유의 건조하고 치밀한 문장과 밀도 높은 서사로 축조되어 점점 더 무르익어가는 작가의 필력에 깊은 신뢰를 준다. 각자의 삶을 고독하게 이고 가며 내면의 혼란이 빚어낸 현실과 망상의 경계에 위태로이 서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깊은 여운을 남기며, 고독의 돌파구를 향해 손길을 내미는 인물들에게서는 미약하지만 멀리서 밝아오는 여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치밀한 문장에 서린 여덟가지 고독의 빛깔
편혜영은 평단과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에 보답하듯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이번 소설집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발표한 단편을 묶었다. 세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2011)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함과 더불어 현대인의 일반적인 불안과 고독을 이야기하며 그 어둠의 내막을 드러냈다면 이번에는 조금 다른 양상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고독한 개인의 삶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으로 불안이 스며드는 것으로 이야기의 틀을 갖추는 작가의 능력은 이미 증명되어온바 이제 작가는 절대고독 너머, 삶의 파국 이후에 은밀히 찾아오는 희망의 기미를 포착하고 있다.
재산을 모두 축낸 아들 탓에 철거를 앞둔 아파트에서 불편한 몸으로 외로이 삶을 연명하는 노년의 여인(「야행」), 오점 없는 삶을 단번에 파괴할 만한 비밀을 안고 살아야만 하는 중년의 남자(「밤의 마침」), 말년을 함께하자며 찾아온 여동생을 요양원에 보내면서까지 노년의 허허로운 일상을 지키고자 하는 노인(「비밀의 호의」), 층간소음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혼남(「개들의 예감」),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을 하며 조금의 감정의 동요도 허락지 않는 주인공 조(「서쪽으로 4센티미터」), 주눅 들어 자라온 환경 탓에 농담도 쉬이 내뱉지 못하는 한윤수(「가장 처음의 일」),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에 중독되어가는 여인 엠(「해물 1킬로그램」), 벙커를 제작하는 회사에 근무하며 갖가지 잠재적 재앙에 대한 불안에 잠식돼버린 조효석(「블랙아웃」)까지. 여덟명의 주인공은 서로 다른 고독의 빛깔을 품고 있다.
이런 고독한 인간 군상을 엮어내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비밀’이다. 모든 고독의 내부에는 은밀한 비밀이 자리한다. 그리고 긴장과 불안, 다중으로부터 분별시켜주는 모종의 우월감이 비밀의 속성이다. 작가는 노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모든 비밀과 아쉬움 없이 이별하는 「비밀의 호의」의주인공을 설정함으로써 우리 삶에서 비밀이 갖는 기묘한 힘을 생각하게 한다.
셀 수 없는 주름과 거칠고 메마른 살갗, 아침이면 마른 몸에서 떨어지는 살비듬과 숱 적은 흰머리, 제 기능을 읽어가는 내장들이 차차 그를 따뜻하게 감싸고 호의를 베풀고 안정감을 줄 테니까. 앞으로의 삶은 비밀을 주지 않을 것이다. 비밀이 없어 허허롭지 않아도 될 것이고 폭로될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109면)
그런가 하면 안정된 직장에서 번 수입으로 단란한 가정을 꾸려오던 「밤의 마침」의 주인공은 감당할 수 없는 비밀로 인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밤을 맞게 된다. 낡은 호프집 건물 화장실에 술 취해 앉아 있던 여고생, 끊어진 기억, 불쾌한 충동, 번져나가는 소문.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비밀과 동조하며 고독하게 살아가야 하는 삶이다. 이렇게 고독은 인생을 뒤흔들 만큼 커다란 비밀에서 비롯되기도 하지만 비밀이랄 것도 없는 삶에 대한 비관에서 오기도 한다. “일생을 통틀어 지킬 만한 비밀이 없는 시시한 인생이라는 것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비밀”(17면)인 「야행」의 주인공은 주기적으로 찾아와 몸을 뒤틀리게 하는 통증으로만 살아 있음을 확인하며 내밀하게 간직할 비밀 하나 없는 죽은 남편과 자신의 삶을 곱씹는다.
섬세한 생의 감각, 살며시 불어오는 아침의 기운 한편 삶의 극단에서 현실과 망상의 경계를 위태로이 오가는 인물의 내면을 핍진하게 그려낸 두 작품이 눈에 띈다. 이전에도 편혜영의 작품에 등장하곤 했던 이 장치는 수록작 「개들의 예감」에서 더할 수 없이 긴밀한 구성을 이뤄냄으로써 소설적 재미를 한껏 드높인다. 한 문장도 놓쳐서는 안되는 팽팽한 장면 진행은 작품의 흡인력을 최대로 끌어올리고, 현실과 망상을 유연하게 넘나드는 서사는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이 갖는 위상에 의문을 품게 한다. 층간소음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은 윗집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왔고 어떤 백화점을 이용하며 어느 회사의 신용카드를 이용하는지, 집에서 기르는 개와는 어떻게 놀아주는지까지. 그러나 어느 밤, 윗집에서 들려온 불길하고 둔탁한 소리를 들은 이후 주인공의 분노는 갈 길을 잃어버린다.
그런가 하면 고속도로 시설 관리를 담당하는 「서쪽으로 4센티미터」의 주인공 ‘조’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허락지 않고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사는 인물이다. 기계처럼 살아가던 어느날 평소 같으면 결코 멈춰서지 않았을 도로 위에 정차한 조의 차를 무언가가 들이받는데, 그 흔적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육체적 고통은 사고를 명백한 현실로 인식하게 만들지만, 결국 어떤 원인도 찾지 못한 조는 삶을 생경한 느낌으로 재인식한다. 이렇듯 현실이 망상을 만들고 망상이 현실을 다시 잠식해 들어오는 과정은 어쩌면 일상을 사는 모두가 매일 소소하게 겪는 삼투가 아닐까. 소설 속 인물들의 내면이 어떻게 구축되는지를 되새겨보면 현실과 망상의 위상은 더이상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처럼 섬세한 생의 감각이 살아 있는 편혜영의 작품은 날카로운 통찰을 던져 충격 속에 삶을 응시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런가 하면 이번 소설집에서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편혜영이 조심히 내놓은 희망의 메시지이다. 「해물 1킬로그램」과 「가장 처음의 일」 두 작품은 생을 비관하던 주인공들이 모종의 변화를 보이며 살포시 어둠으로부터 한 발 내딛으려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해물 1킬로그램」의 엠은 실종된 아이가 시신으로 발견된 이후를 살아간다. 고통과 자책, 후회가 무한 반복되는 일상은 서로에게 고통의 낙인이 된 엠과 남편의 삶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그러나 엠은 실종아동을 둔 부모 모임에 나가며 “자신의 고통을 유일한 것으로 치켜세움으로써 고통을 견뎌왔”(78면)던 자신의 모습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형벌과도 같은 삶을 살던 엠이 마지막 장면에서 실로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할 식사를 위해 신중하게 해물을 사는 행위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런 희망의 기운은 「가장 처음의 일」에서도 찾을 수 있다. 노동의 무게에 눌려 웃음을 잃은 부모 밑에서 집안의 유일한 희망으로 자란 한윤수는 살아가는 게 지루하고 버겁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버스를 기다리다 들른 서점에서 한 여직원에게 눈을 빼앗겨 타려던 버스를 놓치고 만다. 그러나 놓친 버스는 고속도로에서 큰 사고가 나고 불운을 피한 한윤수는 자신의 행운의 기원이 된 여자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그는 우선 여자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여자에게는 그 웃음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니 두려웠다. 한윤수는 주저하고 망설였다. 지금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언젠가는 털어놓게 하는 순간이 올 것이었다. 모든 게 명확해질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까. 그 순간을 지켜볼 생각이었다.(190면)
끝내 사랑 고백을 하지는 못했지만 결국 그 순간이 오리라고 예감하는 것, 그리고 그 변화의 순간을 지켜보리라 다짐하는 것만으로도 한윤수의 삶은 평생 달려온 트랙에서 마침내 벗어난 것이다. 이처럼 일종의 희망을 예감하게 하며 마무리되는 작품은 “일상의 삶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파국의 조짐을 묘사하며 불안을 축조해내던 편혜영의 소설은 이제, 파국의 끝장에 다다른 죽음과도 같은 허무의 공간을 그리며 그 안에서 거꾸로 삶의 기미들을 찾으려”는(조연정, ‘해설’) 듯하다.
고독은 삶의 상수고 이 세계는 편혜영이 그려온 것처럼 어둡고 비참하며 부조리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파국을 생의 기초라고 생각한다면,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몸짓은 그저 소중할 수밖에 없다. 편혜영은 이제 그 작은 움직임들을 하나씩 수집하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밤이 지나간다』가 품고 있는 파국, 그리고 그 안에서 싹트는 삶의 의지는 깊이 음미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