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등단 18년차, 열세 권의 단행본과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 등의 이력을 남기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온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조경란이 5년 만에 펴내는 신작 소설집『일요일의 철학』. 8편의 단편이 실린 이번 작품집에는 더욱 간결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서사와, 그 안에 단단하게 응축되어 반짝이는 상징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저마다의 깊은 고독과 상흔을 지닌 채 담담하게 살아내는 하루하루 속에서 조심스레 희망을 발견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절실하고 아름답게, 잔잔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첫 작품 「파종」에서부터 「봉천동의 유령」, 「옥수수빵 구워줄까」등에서 드러나는 가족 이야기는 조경란의 작가적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한편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와 「성냥의 시대」에서는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응시하며 타인을 이해하려는 안간힘이 절실한 몸짓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이 몸짓은 표제작 「일요일의 철학」에서 낯선 곳에서 삶의 막막한 불안을 더듬는 주인공의 생생한 감각과 연결된다.
작가는 섣불리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상흔과 더불어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인물들에게 예기치 않은 작은 싹을 틔워줄 뿐이다. 그래서 정갈함으로 칠해진 일상의 한꺼풀 아래에서 느껴지는 생의 기운은, 오히려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진실하다. 이 절실함이 더욱 간결해진 서사와 함축적인 상징과 어우러져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한 이 섬세한 작품집은 독자들에게 더없이 짙은 정서적 파문을 남긴다.
목차
파종
학습의 生
봉천동의 유령
단념
일요일의 철학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옥수수빵 구워줄까
성냥의 시대
해설|백지연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
조경란
출판사리뷰
관계와 소통에 대한 원숙한 성찰, 오래 번져가는 잔잔한 파문
올해로 등단 18년차, 그간 작가는 모두 열세권의 책을 펴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차분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고,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작가로 확고히 자리잡아왔다. 이제 여섯번째 소설집에 이르러 작가는 더욱 간결해진 서사와 함축적인 상징이 두드러지는 여백과 응축의 미학을 선보이며 자신의 문학세계에 한층 깊이를 더하고 있다. 단절과 고독에 처한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묘사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타인과 만나는 차분한 시선과 어우러져 더없이 짙은 정서적 파문을 낳는다.
조경란의 소설이 만들어내는 정갈한 분위기는 극적인 사건을 이면에 감춘 채 고요하고 담담하게 그려지는 일상의 풍경에서 비롯된다. 첫 작품 「파종」에서 주인공의 가족들은 각자가 지닌 상처 때문에 서로를 깊이 상처 입혔던 시절을 지내왔다. 일본에 사는 동생이 팔을 다쳐 주인공과 아버지가 함께 동생의 집에 가서 한동안 살림을 거들게 되면서, 가족들은 낯선 타국의 공간에서 일상을 함께하며 서로 마주한다. 상처와 갈등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이들은 우연히 씨앗을 심고 그 싹을 지켜보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점차 서로의 존재를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
뜨거운 고통의 시간은 지났고 이제 상처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소설은 그것을 되새기고 복기하기보다 그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물론 상처는 언제 어떤 식으로 다시 터져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섣불리 치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상흔과 더불어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인물들에게 예기치 않은 작은 싹을 틔워줄 뿐이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감지되는 생의 기운은 그래서 오히려 무엇보다 절실하고 진실하다. 이 정갈한 일상과 그 안에 담긴 통찰이야말로 “근래 한국 단편소설이 보여준 가장 깊고 아름다운 세계”(백지연 ‘해설’)일 것이다.
「학습의 생의 의지는 더욱 팽팽하고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은퇴한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이혼 후 만성적인 면역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시골에 외딴집을 얻어 고립된 생활을 꾸려가는 주인공에게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투포환 선수의 꿈을 접은 소년에게 투포환 연습을 위해 집 마당을 빌려주면서 주인공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지만, 동네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리고 주인공이 소년의 도둑질을 의심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위기를 겪게 된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다시 마당에서 소년의 쇠공 소리가 들려오면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전해지는 생의 울림을 느낀다.
공이 지면에 쿵, 부딪칠 때마다 내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깊고 과묵한 시간과 어둠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나는 반듯하게 돌아누워 그 울림이 전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내가 사는 곳은 암흑도 사차원의 상태도 아니다. 이곳은 저 쇠공이 밀어내는 강한 힘으로 허공을 꿰뚫고 지나가는 세계다. 나는 보지 않고서도 쇠공을 던지고 줍고 다시 던지는 아이를 본다. 그 공이 날아가는 궤적도. 그것은 마치 내 힘의 크기 같아 보인다. 내가 보는 것이 현재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73면)
이 생생한 감각은 「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과도 상통한다. 한사코 집과 가족을 떠나 낯선 곳에서의 체류를 선택했지만 여전히 삶에 대한 막막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주인공은 맹인 학생 루카스와 술집 바텐더 ‘원숭이 남자’, 그리고 그의 꼬마 아이 등과 조심스러운 교류를 나누고 인라인스케이트를 더듬더듬 연습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날을 앞둔 어느 날, 곧게 뻗은 내리막길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멀리 앞을 내다보며, 조심스레 미끄러지듯 발을 내딛는다.
이들의 절실한 몸짓은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와 「성냥의 시대」에서는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응시하며 타인을 이해하려는 안간힘으로 드러난다. 우울과 불안에 잠겨 생을 마감한 남편을 애도하는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의 주인공이나, 성냥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 아버지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성냥의 시대」의 주인공의 이야기 모두, 고립을 넘어서 또다른 고립된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각각 다른 결로 그려 보인다. 숨은 상처를 억지로 헤집지 않으면서 그 공백까지 포함한 타인의 고독을 끌어안으려는 이 조심스러운 시도는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탐문으로 이어진다.
햇살이 번져들고 있었다. 공장 안은 아직 어두컴컴했고 귀마개가 필요할 만큼 많이 만들어내야 할 성냥도 없었지만 그는 그쪽으로 걸어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갑자기 햇빛을 받으면 눈이 아플지도 몰랐다. 어둠이 아니라 그늘 속으로 그는 똑바로 걸어갔다. 그가 그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253면)
한편 「봉천동의 유령」과 「옥수수빵 구워줄까」 등에서 드러나는 가족 이야기는 조경란의 작가적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기원의 의미로서 각별하다. 특히 「봉천동의 유령」에서, 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자신의 공간을 마련하고 소설 쓰기를 시작한 주인공은 늘 가족과 집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자유롭기를 갈망해왔지만 늘 가족과 봉천동을 떠났다 돌아오는 여정을 반복하고, 바꾼 공간에서도 여전히 가족들의 삶은 유령 같은 소리로 생생하게 들려온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집은 쇠락해지고, 봉천동은 새로운 지명으로 바뀌고, ‘서정시대’는 끝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는 동안, 그것은 또한 제 자리에 깊이 스며들어 한 세계를 더욱 깊고 넓게 다져왔을 것이다. 『일요일의 철학』은 그 원숙한 세계가 이제 새로운 현재에 대한 모색으로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답고 긴 여운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