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똑같은 사람들의 위로와 풍경들
2007년 등단 이후로 문학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으며 등장했던 젊은 작가 서유미의 첫 소설집이다. 젊은 작가다운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있는 입담, 그리고 우리의 고단한 현재와 이 곳을 절묘하게 비틀어 보여주는 솜씨가 일품이다.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것도 같고,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도 같은 그녀의 소설들은 웃음보가 터져 나오면서도 그 뒤에 씁쓸하고, 때로는 따뜻하기도 한 위로 같다.
실린 단편소설들은 다양한 모색과 변화를 통해 자신의 기존 장편소설과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세계군을 구축한다. 특히 여덟 편의 소설은 작가 특유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해부한 인간들이 나온다. "모든 소설은 하나의 인간학"이라는 말처럼 "서유미표 인간"이 소설 속 등장인물로 등장한다. 폭설을 뚫고 출근을 감행하는 김대리, 지각 표시를 보면서 다음 달 월차를 아쉬워하는 워킹맘, 실업급여를 받으며 구직에 힘쓰는 중인 O. 하나같이 직장이라는 큰 그물망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버거운 일상의 질서를 가까스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군상이 바로 작가의 인간학을 대변한다.
소설은 묻는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어쩌면 우리는 김대리, 워킹맘, O와 똑같은, 데깔꼬마니 같은 타인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완벽하고 완전한 분신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우리들의 분신을 알아채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맞는다면, 소설 속에 나오는 곽과 원, K와 L처럼 서로가 분신임을 알아보고 맹목적으로 서로의 삶에 물들어 가는 과정은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일 것이다. 서유미표 인간은 소설 속에서 팽팽한 일상의 질서와 폭력적인 세계가 허물어지도록 타인이 아닌 우리의 또 다른 분신에게 사랑을 말하고 위로한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우리 역시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스노우맨
그곳의 단잠
저건 사람도 아니다
삽의 이력
당분간 인간
타인의 삶
세개의 시선
검은 문
해설|신샛별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저자
서유미
출판사리뷰
2007년 문학수첩작가상과 창비장편소설상을 연달아 수상하며 많은 주목과 기대를 모은 소설가 서유미의 첫 소설집. 기발하고 재치있는 상상과, 그것을 지금 우리의 고단한 현실과 절묘하게 연관짓는 솜씨가 소설 읽는 재미와 함께 깊은 공감을 자아낸다.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것도 같고,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도 같은, 그래서 어딘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씁쓸하고, 한편으로 잔잔한 따뜻함이 있는 이야기들이다.
고단한 우리는 모두 ‘당분간’ 인간
그는 그간 세편의 장편소설을 통해 동시대 인간 군상의 꿈과 욕망, 일상의 풍경을 솔직하고 날렵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그려내왔다. 그런 한편으로 지금껏 꾸준하고 성실하게 발표해온 단편들은 작가가 다양한 모색과 변화를 통해 그와는 또다른 매력을 지닌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눈을 부드러운 솜사탕이나 포근한 솜이불에 비유하는 건 눈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언 눈 속에서 삽질을 몇번만 해보면 그동안 눈의 낭만적인 표면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얼어붙은 눈은 유리 조각처럼 날카롭고 위험하다. 부딪히거나 긁히기만 해도 바로 피가 맺힌다. 손등에 난 피를 혀로 핥고 나서 남자는 발로 삽을 꾹 눌렀다. (…) 폭설이 이 도시가 아니라 남자의 인생에 쏟아져내린 것 같았다. 팔다리에 힘이 빠질수록 남자는 한마리의 두더지가 되고 싶었다.(「스노우맨」 20~21면)
그의 소설은 우선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설정으로 눈길을 끈다. 「스노우맨」은 폭설을 뚫고 출근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기록적인 폭설로 온 도시가 파묻혀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재난 상황에서도 남자는 직장에서 뒤처질 것 같은 불안에 떠밀려 출근을 감행한다. 홀로 삽 한 자루를 들고 갖은 애를 쓰며 앞으로 나아가보지만 출근길은 여전히 멀고, 부장은 태연하게 출근을 재촉한다. 남자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책하며 다만 막막한 삽질을 계속한다.
「저건 사람도 아니다」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여자는 비밀리에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로봇 도우미’의 힘을 빌리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숨통이 트이는 것도 잠시, 완벽한 능력을 지닌 로봇 도우미에게 밀려 어느새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로봇 뒤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삽의 이력」의 남자는 도시개발의 기초작업이라는 명분으로 무작정 공터에서 구덩이를 파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구덩이를 파는 족족 다음날이면 말끔히 메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또다른 남자 역시 똑같은 이유로 무작정 구덩이를 메우는 업무를 맡고 있었던 것. 하지만 두 남자 모두 각자의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무의미한 ‘삽질’을 멈출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 계속된다.
그런가 하면 「당분간 인간」의 주인공은 겨우 구한 새 직장과 이웃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와 상처 때문에 점점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심지어 부스러지기까지 하는 기이한 증상에 시달린다. 그와는 반대로 그의 전임자는 갈수록 몸이 물렁해지는 증상으로 괴로워하는 중이다. 증상을 감추며 버텨내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주변의 상황은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이 정도 이야기로도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서유미의 소설에서 전면에 내세워지는 기발한 상상력이 강조하는 것은 실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은 세상살이의 고단함이다. 일과 육아에 치여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출근이란 재앙을 헤치고 살아남는 일과 다를 바 없으며, 생활을 위해 하루하루 반복해야 하는 일은 실은 아무런 의미 없는 삽질과도 같다. 그러니 이 모든 것에 지쳐 온몸이 한없이 물렁해져 퍼져버리거나 굳어서 산산이 부스러진다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그처럼 우리는 모두 인간이지만 ‘당분간’만 겨우 ‘인간’으로 버텨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한시적으로만 ‘인간’인 우리의 초상을 설명하기 위해 서유미의 인간학은 ‘당분간’이라는 수식어를 새로 발굴해냈다. 「당분간 인간」을 통해 ‘당분간’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답게’ 살아가기는 어려운, 아이러니한 삶의 조건을 적확하게 꼬집는 어휘가 되었다.”(신샛별 ‘해설’)
다르지만 같은 이들이 주고받는 따뜻한 위로
반지하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상으로 올라가면 폐소공포증과 불면증이 사라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L이 올라갈 때까지 지상의 집과 방이 기다려줄지 의문이었다. 그때쯤이면 여기도 아파트 단지로 바뀌는 거 아닌가. 결국 세상의 모든 집이 아파트가 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고 L처럼 지하에 살던 사람이 그 아파트에서 살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거기에는 K처럼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입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 L은 어디에 있을까. 그땐 반지하가 아니라 두더지처럼 지하 1층, 지하 2층으로 파고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그곳의 단잠」 51면)
한없이 딱딱해지거나 물렁해지거나, 끝없이 구덩이를 파거나 메우거나 실은 서로 다를 바 없는 처지일 것이다. 그렇게 서유미의 소설에는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똑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스노우맨」에서처럼 막막한 눈덩이 속에 파묻힌 채로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삽의 이력」에서처럼 서로의 존재를 완강하게 부정하거나, 「당분간 인간」에서처럼 미력하나마 서로에게 의지하며 자신을 지탱한다.
「타인의 삶」의 두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삼년 동안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관찰하고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다. 서로 무척이나 다른 사람이었던 둘은 그러나 서로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이 점차 서로의 생활과 습관을 바꾸어 닮아가게 되고, 갈수록 자신의 삶이 지워지고 상대에게 물들어가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세개의 시선」에 등장하는 두 사람, 부유한 삶을 살고 있지만 평범한 여자로서의 행복을 동경하는 ‘경’과 그런 그녀의 윤택한 환경과 성공을 부러워하는 ‘진’ 역시 각자의 욕망과 사랑을 서로 마주하는 인물들이다. 알레고리로 가득한 소설인 「검은 문」의 등장인물들은 나아가 번호로서만 서로 구별되는 수인들이다. 이들은 하루하루의 단순한 생활에 매인 채 등 뒤에 있는 캄캄한 출구의 존재를 애써 거부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그 출구 너머에도 역시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생활이 있을 뿐임을 소설은 서늘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사방이 완강하게 막힌 이곳에서도 가냘프나마 따뜻한 온기가 존재한다. 「그곳의 단잠」에서 고층아파트에 사는 K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반지하방에 사는 L은 폐소공포증 때문에 똑같이 날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서로 형편과 처지가 같지 않지만, 우연히 만난 K와 L은 어느새 서로 가까워지고, 서로의 방을 번갈아 찾으면서 오랜만의 단잠을 누리는 단짝이 된다. 이처럼 팍팍한 생활 속에서 다르면서도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주고받는 작은 호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주는 것이 서유미의 소설이다. 똑같이 발버둥치고, 좌절하고, 서로 나직한 위로를 전하는 소설 속 이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일, 그것이 서유미의 소설이 주는 특별한 공감의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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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는 분명 귀한 작가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덟편의 소설은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인간을 공부해왔는지 입증하고 있다. 모든 작품에서 서유미는 그녀 특유의 시선으로 관찰하고 해부한 인간을 내세운다. 끊임없이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의 즐거움이나 보람은커녕 실직의 위험을 상시적으로 느껴야 하는 인간. 언제라도 닥칠 생계의 위협을 걱정하느라 온몸이 물렁해져 퍼져버리거나, 굳어서 부스러질 지경인 인간. 따라서 한시적으로만 ‘인간’인 우리의 초상을 설명하기 위해 서유미의 인간학은 ‘당분간’이라는 수식어를 새로 발굴해냈다. 「당분간 인간」을 통해 ‘당분간’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인간답게’ 살아가기 어려운, 아이러니한 삶의 조건을 적확하게 꼬집는 어휘가 되었다.
이 세계의 구조는 여전히 완강하다. 그러므로 세계가 허물어지는 조짐을 보이는 바로 ‘그곳’을 가리키고 있는 서유미의 인간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곳’의 얼룩이 ‘이곳’을 점령해 완전히 ‘저곳’으로 탈바꿈할 때까지, 더불어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는 우리는 그녀의 소설에서 늘 새로 배울 것이다. - 신샛별(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