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어」로 등단한 백가흠의 두번째 소설집『조대리의 트렁크』. 냉혹한 현실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불쾌한 감정과 불편한 경험들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담긴 9편의 단편들로 엮어졌다. 9편의 단편 속에는 2007년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에 오른 「루시의 연인」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목차
장밋빛 발톱
웰컴, 베이비!
웰컴, 마미!
매일 기다려
조대리의 트렁크
로망의 법칙
루시의 연인
사랑의 후방낙법
굿바이 투 로맨스
해설-차미령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 지면
저자
백가흠
출판사리뷰
비루한 인생들의 비뚤어진 가족 판타지
백가흠 소설에는 일간지 사회면을 장식할 법한 인물과 사건들이 등장한다. 「웰컴, 마미!」의 유아 유기와 영아 매매 사건, 「매일 기다려」의 노숙자 노인과 가출 청소년 이야기, 「웰컴, 베이비!」의 신생아 유기 사건 등이다. 현실에 기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실화를 통째로 끌어들인 작가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을 애써 드러내보인다. 현대적인, 너무나도 현대적인 비극들임에도 그 근저에는 하나같이 ‘가족’이라는 단위를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과 그럼에도 실현되지 못한 욕망에 대한 비틀린 심리와 아이러니가 내재되어 있다.
「웰컴, 베이비!」에는 철없는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를 세 차례나 버리고 네번째 아이마저 여관방에 유기하고 만 부부, 죽은 동성 애인의 아들을 키우며 엄마 역할을 하는 미스터 홍과 그의 또다른 동성 애인 재영이 등장한다. 비록 허름하나마 그들은 ‘웰컴 모텔’에 함께하며 비정상적인 가정의 꼴을 갖추고 살아간다. 「웰컴, 마미!」에는 채팅으로 만난 연하남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영아 매매를 시도하는 ‘진숙’과, 미성년의 신분으로 아이를 낳았지만 어른 행세에 지쳐 결국 떠난 남자를 원망하며 반지하방에 아이와 미니핀셔를 함께 가둬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순미’가 등장한다. 역시 가족에 대한 비뚤어진 판타지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그러한 판타지를 가장 처절하게 욕망했던 이는 「매일 기다려」의 노인이다. 평생 제대로의 가정을 가져본 적이 없고 여전히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는 노숙자 신세이지만 그 앞에 나타난 가출 청소년 ‘연주’를 향한 마음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도 않는,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부모의 마음에 다름아니었다. 친구들까지 몰고 와 노인을 괴롭히다 못해 노인의 마지막 꿈이었던 집 한 채 마련할 돈을 털기 위해 친구들을 강도로 위장 침입시키기까지 하는 연주를 두고도 노인은 끝내 원망 한 자락 내비치지 않는다. 가진 것도 없고, 그래서 더이상 잃을 것도 없는 노인에게 마지막 꿈이자, 마지막 행복의 조건이었던 ‘가족’의 꿈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잠시나마 연주를 보살피는 동안 느꼈던 행복감만으로도 노인에게는 충분한 것이다.
미완성인 상태였지만, 미스터 홍이 운영한 웰컴 모텔도, 순미 부부와 아이도, 진숙씨와 연하의 남편도, 심지어 노인과 연주의 관계도 일종의 ‘가족’이다. 근대 이후 파괴될 대로 파괴된 가족에서 떨어져나온, 낱낱으로 보면 비루하기 짝이 없는 개인들이 다시 가족으로 묶이고자 하는 욕망은 새삼스럽고도 아이러니컬하다.
고장난 사랑의 부속물들이 숨겨진 트렁크
두 개의 트렁크가 있다. 「루시의 연인」에서 트렁크에는 주인공 준호의 애인인 ‘루시’가 숨겨져 있고,「조대리의 트렁크」에서 트렁크에는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고등학교 동창 장영수의 노모가 숨겨져 있다.「루시의 연인」의 준호는 군대시절 태권도 승단시험을 준비하다가 다리의 신경이 찢기는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어 돌아와 인터넷 싸이트에 포르노소설을 연재하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루시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대신해주는 쎅스 인형이다.
「조대리의 트렁크」의 조대리는 병들어 대소변을 가릴 수도 없는 노모를 모시는 서른일곱살의 노총각으로, 역시 ‘가능성있는 여자’를 찾아야 하는 처지여서 곰보자국이 있는 편의방 여자에게 눈길을 보낸다. 어느날 그의 앞에 자칭 고등학교 동창이라며, 한때 성공가도를 달리다 모든 것을 잃고 고향에 돌아온 장영수가 나타난다. 병든 노모뿐, 가족도 재산도 없는 조대리지만 ‘사람을 소유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그에게 자동차를 떠맡긴 장영수는 여관방에서 변사체로 발견되고, 장영수의 트렁크에는 조대리의 노모보다 더 가벼운 장영수의 어머니가 숨겨져 있었다.
두 개의 트렁크에는 모두 비극적인 사랑의 대상이 숨겨져 있는 셈이다. 「루시의 연인」의 준호는 전재산을 날린, 몸이 불편한 미순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조대리는 장영수의 노모를 업고 집으로 돌아간다. 허름하고 비루하지만 그 안에 웅숭깊게 자리한 빛나는 삶의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결말이다.
바깥의 시선에서 안의 감각으로
문학평론가 차미령은 현실의 무간지옥을 동력으로, 독자들의 불편한 마음조차 유난스럽고 과장된 것이라고 반문하는 듯한 백가흠 소설의 세계에 주목한다. 작가는 “그만의 방식으로 우리 삶의 심연을 고찰하는 동시에 그 삶의 윤리를 고집스럽게 추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순간 분노하고, 순식간에 망각하고 마는 참혹한 현실을 향한 시선을 결국 우리 내면의 감각으로 되살려 내재화하는 것이 백가흠 특유의 역설적 기법이라고 논한다. 현실이 소설보다 더 극적이고 기이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백가흠 소설은 자극적인 사건사고 파일을 냉정하게 펼쳐 보여준다. 현실의 엄연한 반영임을 부인할 수 없고, 진한 울림과 감동을 부인할 수 없다면, 백가흠 소설 속 세계에서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