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역동적인 서사와 강력한 흡인력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감동이 되살아난다!
한국 근현대사의 숨겨진 인물과 진실을 발굴해 다수의 평전과 노동·역사 소설을 집필해온 작가 안재성의 신작 장편소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가 출간되었다. 북한 노동당 청년간부로 한국전쟁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혀 10년간의 수용소, 감옥 생활을 겪은 실존인물 정찬우의 수기를 바탕으로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린다.
정찬우의 가족이 50년간 간직해온 수기를 우연한 기회에 입수하게 된 작가는 “관념적인 작전명령과 실제 전선에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 간의 괴리”와 함께 “지구상에 어떠한 전쟁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휴머니즘적 가치에 매료되어 소설화를 결심했다. 수기를 바탕으로 한 만큼 실감나는 묘사와 역동적인 서사의 흡인력에 책장을 넘기다보면 “극한 상황이기에 오히려 더 빛나는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추천사, 현기영)이 묵직한 감동을 남긴다. 전쟁에서 비롯된 갈등이 여전히 한국사회를 지배하는데도 불구하고 ‘잊혀진 전쟁’의 시대가 되어가는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을 다시 묻는 소설이다.
목차
1장 불타는 평양
2장 고요한 서울
3장 대전 해방 만세
4장 낙동강 12단고지
5장 꿈
6장 독 안에 든 쥐
7장 이영회 부대
8장 상여를 타고
9장 진주 임시수용소
10장 광주 중앙포로수용소
11장 대구형무소
12장 목포형무소
13장 이면의 곡선
14장 가난한 어부들의 노래
15장 귀향
작가의 말
저자
안재성
출판사리뷰
“남조선으로 내려가라는 말입니까?”
하루아침에 뒤집어진 북한 엘리트의 인생
1950년 7월 초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시기, 정찬우는 노동당 교육위원으로 발탁되어 남한 영남지방으로 파견된다. 당시 그의 나이 22세, 김일성대학 역사학과를 갓 졸업하고 교사로 발령받은 직후였다.
전남 고창에서 출생하였지만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정찬우는 금주성 일대에서 이름난 수재로, 국립사범대학에 남들보다 2년 일찍 들어갈 정도로 영민했다. 그는 또한 남다른 정의감으로 조선독립에 투신해 조선의용군으로 활동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승진을 거듭했지만, 학문에 대한 열망에 1947년 이북으로 귀국, 장학생으로 김일성대학 역사학과에 진학한 것이다. 틈틈이 써둔 소설로 공모전에 당선한 소설가이기도 했다.
그의 인생이 한순간에 뒤집어진 것은 한국전쟁에 참가하면서부터였다. 김일성의 직인이 찍힌 임명장을 받고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 남쪽으로 내려와 목격한 전선의 상황은 북에서 듣던 승전보와는 전혀 달랐다. 서울과 대전에서 맞닥뜨린 제트기의 기총소사와 소이탄 폭격에 생사의 고비를 넘기는 것은 예삿일이 되었고,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유엔 연합군에 궤멸되다시피 한 이후로는 빨치산 신세로 산속에 은둔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신세가 된다.
결국 포로로 잡힌 정찬우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고 전범재판을 통해 남한에서 10년의 세월을 복역한다. 정찬우는 노동당 간부라는 출신 때문에 수용소와 감옥에서 빨갱이로 취급받고 공산주의 사상을 교도소 내에 전파한다는 누명을 쓴 채 고난을 겪기도 하지만, 마침내 사면 받아 고향인 전남 고창으로 돌아간다.
“소설로 각색하는 작업을 하는 내내,
흥분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안재성은, 평전과 소설을 넘나들며 30년간 꾸준히 “불행했던 우리 역사의 숨겨지거나 외면된 진실을 복원하고 비극적으로 숨져간 영혼들을 달래는 글 무당”으로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박헌영, 이일재 등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념적인 이유로 가려져 있던 근현대사 속 인물들의 평전을 집필해온 작가에게 정찬우라는 인물은 특별했다. 이북의 고위 간부이긴 했지만 실제 전선에서 끔찍한 전투와 공중폭격을 목격한 한 사람으로서 정찬우는, 사상적 지도자라기보다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로서 이념 전쟁의 속죄양”이었던 것이다.
50년간 은밀히 숨겨졌던 정찬우의 수기를 바탕으로 소설화한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에는 살았다고 감히 이야기하기 어려운 비참과 고통이 미시적이고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최전선에서의 전투,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 기슭에서 보낸 한겨울 그리고 진주, 광주, 목포 등 수용소의 비인간적인 실태 등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의 연속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실제를 실감케 한다. 뿐만 아니라 비처럼 쏟아지던 미 공군의 폭격과 그에 대한 인민군의 대응, 인민군 내부의 갈등이나 극좌에서 극우로의 이념변화 등은 “기존 역사 연구에서 볼 수 없었던 한국전쟁의 중요한 편린”(추천사, 김태우)이기도 하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한 인간주의자의 일대기
북한 엘리트로 전쟁에 참여했다가 남한에서 전향한 정찬우는 남과 북 그 어디에도 소속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 대한 그의 증언은 보다 객관적이며, 이 소설은 초국적의 정찬우가 바라보는 전쟁의 풍경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가 포착한 전쟁의 단면은 전쟁을 주도한 남?북한 지도세력의 이념과는 괴리되어, 전선에서 동족간의 전쟁을 강요당한 사람들 간의 갈등과 무자비한 폭력에 다름이 아니다. 평화시대라면 지극히 평범했을 사람들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 추악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정찬우는 생사를 넘나드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총 한발 쏘지 않고 전선에서 여러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등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고난을 택한다.”
더욱 묵직한 감동을 주는 것은 사람의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라지는 전쟁을 통과하고, 비참한 포로수용소 생활을 몸으로 견뎌내는 정찬우의 ‘살아남는’ 삶 자체다. 기어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정찬우의 모습은 “극한 상황이기에 오히려 더 빛나는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을 핍진하게 보여주고, 우리로 하여금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의 감각을 경험하게”(추천사, 현기영) 한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난 한 ‘인간주의자’라고 밖에 할 수 없을 정찬우의 일대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옳은 전쟁이나 필요한 전쟁이란 없다는 교훈을 간직한다. 전쟁에서 파생된 갈등과 대립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맴돌고 있는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추천사, 조해진) 건져올린 증언이자 우리를 향한 역설적인 당부다.
작가의 말
불행했던 우리 역사의 숨겨지거나 외면된 진실을 복원하고 비극적으로 숨져간 영혼들을 달래는 글 무당처럼 살아온 내게 정찬우의 증언은 흥미로웠다.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이 미시적으로 생생히 묘사되었을 뿐 아니라, 현대사 공부를 깊이 한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당대의 전설적 인물들이 조연처럼 잠깐씩 등장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로서 이념 전쟁의 속죄양이 되어야 했던 정찬우라는 인물의 기구한 운명에도 동정이 갔다
내가 이전에 다룬 역사적 인물에는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회주의 계열의 지도자가 여럿 있다. 그들은 전쟁을 반대해야 할 위치에 있었으나 막지 않았으며 스스로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반면, 정찬우를 비롯한 전쟁 참가자 대다수는 개전의 새벽까지도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정찬우의 수기는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관념적인 작전명령과 실제 전선에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 간의 괴리가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주며, 그의 수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구상에 어떠한 전쟁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에 맞춰져 있다. 그의 수기에서 단순한 전쟁 체험기 이상의 가치를 발견하고 소설화해 널리 알리고자 결심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