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창비장편소설상’의 제1회 당선작. 2005년 제5회 문학수첩 작가상을 수상하기도 한 젊은 작가 서유미의 장편소설이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지치고 불안한 현대 여성들의 내면적 욕망을 향한 이 작품의 따뜻하고 정직한 시선으로 감싸안으며 소설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실감과 문학적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국소설의 새시대를 이끌 기대주로 문단 안팎에서 큰 관심을 지니고 있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쿨하게 한걸음』은 이렇게 서른살을 지나서도 여전히 철들지 못하고 무엇 하나 정해진 바 없이 방황해야만 하는 서른셋 여자의 일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애인과 헤어지기도 직장을 함부로 옮기기도 힘든 서른셋의 연수는 정작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 이 책에는 연수 외에도 젊은 시절 전형적 히피 청년이었지만 현실적인 결혼을 택한 선영, 뒤늦은 성장통을 겪고 있는 연재 등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다시금 사춘기를 겪고 있는 셈이다.
『쿨하게 한걸음』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세태를 서른셋이라는 특정한 연령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의 일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진지한 성찰을 가볍고 경쾌한 시선으로 그려냈다. 이 소설은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바로 우리네 환멸의 일상을 따뜻하게 비춰준다는 평가를 얻었다.
목차
방으로의 귀환
울 수 있어 다행이야
지금의 자신을 좋아하나요?
그래, 잘되겠지
나를 향한 주파수
어른들의 인사법
웬디들의 세상
우리에겐 마법이 필요해
따뜻하고 달콤한 캐러멜라떼
응답을 기다리는 중
심사평
작가 데이트
수상 소감
저자
서유미 저자(글)
출판사리뷰
서른셋, 문제적 인간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노래하고, 최승자의 「삼십세」가 노래하는 ‘서른살’은 젊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도 어중간한 나이로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는 중요한 시기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대학졸업 후 취업까지, 결혼하고 출산까지의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요즘의 현실에서 서른살은 오히려 젊은 축이고, 성숙해지고 철드는 연령대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듯싶다. 『쿨하게 한걸음』은 이렇게 서른살을 지나서도 여전히 철들지 못하고 무엇 하나 정해진 바 없이 방황해야만 하는 서른셋 여자의 일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를 향해 일보전진―연수
주인공 연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점퍼 차림으로 나타난 K와 과감히 헤어진다. 요란스러운 크리스마스이를 원한 것은 아니었으나 “크리스마스를 평소와 똑같이 보내고 싶을 만큼 스페셜한 인생”을 살고 있지도 않은데, 남자친구는 도통 협조를 하지 않는다. 서른셋 나이에 새삼 솔로가 된 용감무쌍한 연수는 직장마저 자발적으로 그만둔다. 애인과 헤어지기도 직장을 함부로 옮기기도 힘든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정작 연수는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확실히 알 수 없다. 사실 그것이 더 큰 문제이다.
나도 내 마음을 또렷이 알 수가 없었다. 일단 회사는 그만두기로 한 것이고, 그렇다면 왜 다른 회사를 고르는 데 이토록 까다롭게 구는 걸까. 정말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다른 일이라면 무슨 일? 혹시 그냥 좀 쉬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닌가? (…) 나는 어느 대학 어느 과에 지원할까, 이후 처음으로 심각하게 진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 길은 의외로 많았다. 하지만 삼십대가 되니 나도 어쩔 수 없이 갈 수 있는 길과 갈 수 없는 길을 나누게 된다. 하고 싶은 것은 이상하게도 갈 수 없는 길에서 반짝이는 기분이다. 물론 내가 잃을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지만 그래도 두렵기는 하다. (…) 이정표와 목적지가 사라진 도로 위에 망연히 서 있는 기분이었다. 뒤에서는 끊임없이 경적 소리가 들려오고 낯선 차가 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면서 욕설을 퍼붓는다. 누군가는 차창 밖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머뭇머뭇, 핸들을 어디로 꺾어야 할지 모르겠다.
네버랜드와 피더 팬을 떠나온 웬디―선영
한편 연수의 ‘베스트 프렌드’인 선영은 요란한 액세서리와 울긋불긋한 염색머리로 젊음을 한껏 누리던 전형적인 히피 청년으로, 여러차례의 연애 끝에 결혼을 결심한 상대는 조건 좋은 안과의사이다. 선영은 집안사정과 자유분방하기만 했던 철없던 지난시절을 보내고 택한 현실적인 결혼이었다고 변명한다. 웬디가 되어 날아간 선영 뒤에서 연수는 쓸쓸하지만 그녀의 앞날을 축복한다.
어른이 되어서 날 수 없게 된 웬디를 본 피터 팬은 잠시나마 쓸쓸한 표정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웬디가 피터 팬과 함께 다시 네버랜드로 날아가기를 바랐던 내 마음도 쓸쓸해지긴 마찬가지였다. (…) 선영이는 이제 웬디로 성숙해갈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세상은 웬디들의 것이다. 네버랜드가 피터 팬의 것인 것처럼. 이곳에 살면서 언제까지나 네버랜드를 그리워하며 살 수는 없다. 피터 팬과 네버랜드로 갔던 소중한 추억을 간직한 채 얼마나 더 멋진 웬디로 성숙해가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나는 멋진 웬디의 탄생을 축복해주기로 했다.
뒤늦은 성장통―연재
연수나 친구들과는 달리 연수의 동갑나기 사촌인 연재는 어릴 적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치장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지만 빼어난 인물 덕에 조건 좋은 남자에게 일찍이 시집을 가 벌써 두 아이를 낳았고 50평대의 아파트를 분양받아 살고 있다. 어린시절에는 공부로나 성숙도로나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사회에서 인정하는 번듯한 주부이자 아내의 삶을 잘 꾸려나가는 것이다. “정신적으로는 미성숙하지만 미모도 출중”한 연재에 비해 “가진 것도 없고 인구감소의 주범 역할”이나 하는 연수 자신은 초라하기만 한 서른셋이다. 그러나 연재조차 실은 자신만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연수가 찾아간 연재는 예전과 달리 시집(詩集)을 가까이 하고 산후우울증에 시달리며 또다른 사춘기를 겪고 있다.
내겐 너무 무거운 시절―동남
서른셋의 삶의 모습이 저마다 다르듯이, 모두가 하나씩 고민을 끌어안고 살고 있고 그 고민에 대처하는 방법도 해결하는 방법도 역시 저마다 다르다. 실직과 실연을 겪은 연수 자신이 ‘소외된 타자의 현실’에서 바라본 세상에는 오히려 안쓰러운 존재들뿐이다. 연재와 구립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하는 대학동기 동남 역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재취업을 준비하며 신통치 않은 결과에 속을 태우지만 겉으로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원하던 직장에서 최종면접 통보를 받은 동남은 자신에게 행운을 준 볼펜을 연수에게 선물하고 며칠 뒤 자살한다. 실패한 삼십대의 전형이었음에도 동남은 늘 밝고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으나 한순간 감당할 수 없었을 그의 삶의 무게를 생각하며 연수는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평생이 질풍노도
꼭 서른셋이 아니라도 ‘평생이 질풍노도’이고 ‘평생이 ○○기’인 삶 또한 안쓰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은퇴 후에도 일자리를 위해 취업싸이트를 찾아다니시는 아버지, 대학 못 간 설움에 갱년기까지 맞은 엄마는 남들 앞에서 자식 자랑은 못하실망정 이제 연수가 돌봐드려야 할 나이가 되신 것이다. 연수는 자신에게 희망을 불어넣기라도 하듯 이들을 감싸안는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
서른셋에 다시금 사춘기의 성장통을 맞고 있는 연수 주위에는 온통 모두들 ‘문제적 인간들’뿐이다. 애인도 없고 직장도 없고 캐러멜라떼 한잔을 먹을 여유조차 부리기 힘든 채로 서른셋을 맞이한 연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비관적이지만도 않고 ‘문제적 인간들’에 대한 따뜻한 공감과 애정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의 마법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 나이”인 서른셋을 지나면서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삶의 고통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한 결과이다. 사회적인 평균에 맞춰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대신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찾아나선 연수에게 미래는 마냥 두렵거나 위협적이지만은 않다.
서른세살이 되고 보니 서른세살이라는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고, 애인이 있거나 없거나, 결혼을 했거나 안했거나,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거나 없거나, 있었는데 모호해졌거나, 없었는데 생겼거나, 행복하거나 불안하거나, 그럭저럭 살 만하거나, 혹은 그것들의 혼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재의 양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나의 서른셋 이후는 과연 어떤 풍경이 될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나는 한번 멋지게 꾸려가보기로 했다. 숨을 가다듬고 일보 전진하면서! 절대로 삶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 채 막을 내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하나 성취한 바 없는 보잘것없고, 그렇다고 앞날이 대단히 나아질 여지도 없는 서른셋의 일상이지만 쿨하게 내딛는 한걸음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준비와 용기를 다지는 것으로 이야기를 맺는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세태를 서른셋이라는 특정한 연령대를 살아가는 여자들의 일상으로 풀어낸 서유미 장편소설 『쿨하게 한걸음』은 진지한 성찰에서 출발하되 경쾌하고 발랄한 시선과 묘사를 유지한다. “별나게 튀지도 않고 그렇다고 모범답안은 더더욱 아닌 인물들”(강영숙)이어서 더욱 실감있게 읽히는 이 소설은 바로 우리네 환멸의 일상을 따뜻하게 비춰준다는 미덕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