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는 삶보다 난해하고, 때론 슬픈 액체로 채워진다”
한국시의 거장 고형렬,
일천여편 가운데서 엄선한 첫 시선집
민중시와 서정시의 아름다움을 한데 모은 걸작
“고형렬 시 생애 전체를 한권의 시선집으로 압축하면서, 나는 그 모두를 풀이할 수 없다는 점을 가장 먼저 깨달았다.” -정과리 한국 문학평론가
“언어의 유전자를 새롭게 전달하는 시인” -린 장취안(林江泉) 중국 시인, 건축가
“명상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미지가 풍부한 시” -피터 보일(Peter Boyle) 호주 시인
“친절의 빛, 숭고한 이타심, 깊은 슬픔과 유머로 가득 찬 시 세계” -마이 반 판(Mai V?n Ph?n) 베트남 시인, 문학평론가
“여기, 상상력의 최고봉이 있다” -시바타 산키치(柴田三吉) 일본 시인
1979년 등단 이후 ‘서정시’와 ‘민중시’의 경계를 불식하는 시적 갱신을 끊임없이 도모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해온 고형렬의 첫번째 시선집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 출간을 맞아 전세계 유명 시인들의 축전이 쏟아진바 국내를 넘어선 고형렬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전문은 책 뒤표지에 수록). 저자가 펴낸 열여섯권의 단독 시집과 두권의 장시집에 수록된 시편에다 잡지 등에 발표한 시편을 더하면 무려 일천여편에 이르는데, 이 방대한 작품 전체를 꼼꼼히 검토해 한권의 정수로 묶어낸 이는 문학평론가 정과리(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두 거장이 협력해 빚어낸 이번 시선집은 독자에게는 저마다의 향수를 자극하며 감동을 선사하는 한권의 책인 동시에, 한국 시단에 선사하는 기념비적 성과다.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에는 고형렬 시의 수많은 미덕 가운데도 특히 치우침 없는 중용(中庸)의 자세가 오롯이 드러난다. 특정한 시세계에 국한되지 않는 품 넓은 서정성을 가꾸고 발전시켰음은 물론, 심미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노동·분단·평화·생태 등의 묵직한 주제의식을 날카롭게 펼쳐낸 시인의 일대기가 더없이 찬란한 것도 이 때문이다.
목차
일러두기
제1부
노을
장자(莊子)
1980년대에 살았는가
벽돌공장
백두산 안 간다
도리깨춤을 추면서
어머니 친구들
서울 1
대청봉(大靑峯) 수박밭
아프레 걸
속초
처용이 동해
해청(海靑)
야동리 어린 모
거진 생각
마포 노을 보며
경험
십자드라이버
다도해
금호동 백야(白夜)
차의 칼날
79년도
벌판에 와서
난지도 겨울
제2부
사진리 대설(大雪)
우수
산딸기
안 보이는 시
모자(母子)
황지1동을
바람의 신선
아이
달맞이꽃
화곡리 봄에
강원도 백로밤
북(北)설악
미역줄거리
사진리
옛 여자
김상철 죽음
미시령 아래 집
눈망울
마당식사
목비행기
정릉4동 세월
용포동 여름
제3부
리틀보이 제1장
여치
산비둘기
영랑(永郞) 호수
내린천에 띄우는 편지
성에꽃 눈부처
바쁨 속에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
정자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어둠속의 풍악호
중
광양제철소
작은 칼
청제비 울음소리
하류(下流)의 시
나옹
꽃이 올라오는 나이테
다시 비선대
4월
흰 모래의 잠
도문(圖們)의 쥐
달개비들의 여름 청각
육체의 시뮬레이션
가재
나방과 먼지의 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너와 나의 밑바닥의 밑에서
조금 비켜주시지 않겠습니까
검은 백설악에 다가서다
제4부
붕(鵬)새 서분序分
붕(鵬)새 태허에 들다
별
지구, 한 컵의 물
눈 오는 산수병풍
또 한번의 밑바닥의 밑바닥에서
한켤레 구두
손의 존재
유리체를 통과하다
비가 그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
풍찬노숙
세한목(歲寒木)
대기권 밖에서 고구마 먹기
강설이 시작되는 유리창 속에
구름 얼음을 깨는 남南 시인
평면의 지옥
제5부
풀과 아파트
해니(骸泥)여 어디 있는가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황무지 모래톱
덩굴손 잔잎 좀 보세요
장미처럼 발화하는 것 같다
로봇 사이버나이프 다빈치의 고백
지구의 노숙자, 하늘 시인
소켓과 기억
해가 지는 고형렬 땅콩밭
눈물의 종(種)이라는 것
사북(舍北)에 나갔다 오다
비선대와 냉면 먹고 가는 산문시 1
북천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외설악
스티코푸스과의 해삼
둥그런 사과
그 여자 기억상실 속에서
아직도 생각하는 사람에 대한 착각
서울 사는 K시인에게
해설|정과리
시인의 말
연보
작품 출전
엮은이 소개
저자
고형렬 (지은이), 정과리 (엮은이)
출판사리뷰
각자의 그리움을 자극하는 보편적인 정서
시대를 보듬으며 미래로 향하는 고형렬의 시
고형렬의 시는 저마다의 그리움을 자극한다. “젖은 눈망울의 물명태들 울멍거리는 속초 바다여/(…)/흐르는 바닷물로 묶고 싶어요/저 산과 사람을 묶고 싶어요”(「속초」)라며 시인이 떠나온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면 독자는 자기가 떠나온 곳을 반추하게 된다. 그의 시에 속초뿐만 아니라 거진, 금호동, 사북, 난지도 등 시인이 거쳐 간 수많은 지명이 들어가는 것도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와 맞닿은 대목이다. 그러나 이 그리움은 어느 순간 가상의 세계까지 확장된다. “원산에서 어물점을 차리고 있는 매제가/오는 가을엔 백두산 가자”(「백두산 안 간다」)고 하며 슬쩍 말을 걸어오기도 하는데 이 능청스러움 안에 분단된 조국에 대한 회한을 깊이 숨겨두는 식이다. 그렇기에 독자들은 시의 아름다움을 한껏 음미하다가도 “안 보이는 이름을 찾아내느라/한줄기 목숨을 얻어 끊어진 길 이으려고”(「4월」) 한다는 시인의 다짐, 즉 세월호참사를 두고 쓴 이러한 구절 앞에서 크게 가슴을 두들겨 맞게 된다.
그런가 하면 시인은 미래를 향한 메시지 또한 끊임없이 발산하는데, 「지구, 한 컵의 물」 「대기권 밖에서 고구마 먹기」 「로봇 사이버나이프 다빈치의 고백」 등 생태와 환경을 너른 시야로 살펴보는 시들도 풍성하다. 등단작이 「장자(莊子)인 데다 전부 7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산문인 『고형렬 에세이 장자』(에세이스트 2019)를 펴낸 시인이 ‘장자’ 전문가임은 이미 유명한데 이러한 자연 본위의 웅숭깊은 사유가 시선집 곳곳에 샘물처럼 스며들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시대순으로 구성된 이번 시선집을 첫장부터 끝장까지 읽다보면 이 시인의 시 세계가 파격적일 정도로 갱신되어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이번 시선집은 고형렬 시 세계의 총결산이기보다는 중간 점검에 가까우며,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는 앞으로 펼쳐질 그 세계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한 필독서라고도 할 수 있다.
끊임없는 발전의 결과물
앞으로도 언제나 푸르를 시의 목소리
“선집을 생각하고 써온 것이 아님에도 결과적으로 이것을 향해 뛰어온 모양새가 되었다”(‘시인의 말’)라며 올해 고희를 맞은 시인은 이번 출간의 의미와 이번 시선집에 대한 애정을 넌지시 보여준다. 지난 44년간 시 쓰기뿐만 아니라 국제적 문학 교류를 이끌고, 출판사를 직접 경영하며 국내 여러 시인들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해온 고형렬은 그러나 ‘시인의 말’에 이렇게 덧붙인다. “시는 오해와 단절로 우리 앞에 서” 있으며 “여전히 시의 길은 멀고 대상은 벅차며 미래는 아득하다.” 그가 이번 시선집 이후에도 시와 시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것이며, 또다른 갱신을 하리라 기대하는 것도 이러한 말 덕분이다. 시를 향유하는 새로운 방법을 거듭 고민 중인 『바람이 와서 몸이 되다』는 늘 푸르른 “저 큰 산” “대청봉”(「대청봉 수박밭」)처럼 젊은 시집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시인의 말
시단에 나와서 44년 동안 쉬지 않고 쓰고 발표해온 시가 고작 일천여편에 지나지 않는다. 선집을 생각하고 써온 것이 아님에도 결과적으로 이것을 향해 뛰어온 모양새가 되었다. 선집을 내는 느낌은 시와 삶에 죄지은 자가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의 심정이다. 형량이 얼마가 되든 간에 무엇이 시인가에 대해 한마디는 해야겠지만 시는 작고 어렵고 불편한 가시와 씨앗 같다.
나뭇가지를 스치는 어떤 안개 바람의 이미지 하나를 붙잡고 봄마다 먼 곳으로 떠났음에도 그 꿈의 언어는 멀어졌고 나는 시에서 실종되었다. 벌써 정신이 돌아오는 듯하던 어느 봄날, 시장 앞의 전신거울 속을 지나가는 한 남자와 스친 적이 있었고 이미 십여년 전에 죽은 어느 시인 같았으며 어떻게 사는지 통 알 수가 없는 옆집 남자 같기도 했다.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 자신을 잃는 길이었다.
시는 겉도는 삶보다 난해하고 때론 슬픈 액체로 채워진다. 육체와 현실보다 있지도 않은 언어들의 지시 대상 너머의 가유(假有)를 믿고 저 스스로 조합될 때, 선명한 시간경험이 되곤 했지만 역시 정신머리가 흐려지고 길을 잃을 때 시는 기웃거리며 불행한 자를 방문하곤 했다. 그래서 일찍 망가졌으면 좋았으련만 망가지지도 않았다. 잔설이 밟히던 열여덟에 봄처럼 가출해서 시작된 그 시는 끝나지 못했고 이곳까지 유랑의 혼이 되었다. 그래서 앞에 오는 것이나 뒤에 간 것이나 절나를 잃어버리고 돌아온 어느 시인의 문 앞에서 절망과 희망으로 얼룩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