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누군가의 가난, 누군가의 혁명이 네 거름이었다면
그래 거기를 아침이라고 부르자”
삶의 모순을 치열하게 사유하며 특유의 서정적인 언어로 가난과 고통의 풍경을 그려온 김수우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뿌리주의자』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17년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몰락경전』(실천문학사 2016)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며 인간 존재의 근원과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통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비약과 역설의 미학”(장은영, 해설)이 담긴 은유와 상징의 언어가 선명하게 빛나는 시편들이 매혹적이면서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표제작 「뿌리주의자」를 포함하여 “살아 부풀어오르는 적막”과 “끝끝내 향을 피우는 꽉 찬 공허”(이정록, 추천사)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삶의 철학이 오롯이 녹아든 52편의 시를 묶어냈다.
목차
제1부
칸나, 노란
하강
문어
뿌리주의자
소금 엽서
하필
해골
봉래산 마고
제의(祭儀)
변신 이야기
흔들의자
겹
선생들
허리 디스크
제2부
아침
감자 싹
약력
가오리
빚을 견디는 법
안개 손톱
등짝
단추를 달다가
대추꽃
실,업
틈
구름의 도시
환멸문(還滅門)
제3부
고무발가락
이승잠
중얼중얼
단풍 씨앗
물꽃 아래
작은 가방
비탈
유령의 딸꾹질
근대화슈퍼
기점(起點)
공범
고고한 대답
제4부
한바퀴
찔레
바위는 걷는다
청둥호박의 까닭
연각(緣覺)
한올의 실
묵은빚
서랍엔 영혼이 산다
신을 창조해놓고도
후두염
신단수(神檀樹)
키메라
훈장
해설|장은영
시인의 말
저자
김수우
출판사리뷰
합리와 절망을 뛰어넘는 역설의 미학
삶의 근원을 향해 뻗어 내리는 단단한 시
삶의 모순을 치열하게 사유하며 특유의 서정적인 언어로 가난과 고통의 풍경을 그려온 김수우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뿌리주의자』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17년 최계락문학상 수상작 『몰락경전』(실천문학사 2016)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재와 과거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펼치며 인간 존재의 근원과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통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비약과 역설의 미학”(장은영, 해설)이 담긴 은유와 상징의 언어가 선명하게 빛나는 시편들이 매혹적이면서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표제작 「뿌리주의자」를 포함하여 “살아 부풀어오르는 적막”과 “끝끝내 향을 피우는 꽉 찬 공허”(이정록, 추천사)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삶의 철학이 오롯이 녹아든 52편의 시를 묶어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시집의 근간을 이루는 정신은 ‘뿌리주의’이다. 이는 “내려가고 내려가면 히말라야 끝자락 수미산에 도착”(「하강」)하는 ‘하강’의 역설을 함축한 표현이다. 시인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현실 세계를 응시하며 삶의 기원이자 존재의 근원인 ‘뿌리’를 찾고자 “까맣게 잊어버렸던 원시”(「허리 디스크」)의 시간으로 비약하기도 하고, 자아의 세계를 벗어나 무한 공간과 접속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현실을 발판으로 삼아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도약하는 상상력은 곧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이자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는 실천적 사유의 흔적이다. 내면을 파고들며 끝없이 하강하는 사유의 과정에서 시인은 ‘진보’라는 명분 아래 물질적 성장만을 추구해온 인간의 비루한 역사를 돌이켜보며 “지구를 유령선으로 만든 자본”(「기점(起點)」)의 폭력에 짓눌린 가난한 현실을 냉철히 비판한다.
당신을 잊지 않으려는 시
잊지 않으려 앓는 시
“가난이 진화하는 방식”(「문어」)을 목격하는 시인은 한 사람이 가난으로 겪는 고통과 슬픔을 곡진하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가난을 방치하고 생산하는 체제의 불합리를 시의 언어로 낱낱이 밝히고자 한다. 이는 절대자를 향한 막막한 절규가 되어 울려 퍼지고, 문명과 그 이기를 누리는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그 비탄과 반성을 절망의 언어로 적되, 절망 속에서 멈추지 않으려 누군가가 가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 그 간절한 물음 속에서 “뽑아내도 몰래몰래 자라는 혁명”(「고무발가락」)을 외면하지 않으려 애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부산에서부터 쿠바까지 망각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 존재들을 기억하고 증언하면서 유구한 가난과 고통의 역사를 끊어낼 혁명을 꿈꾼다.
『뿌리주의자』에서 혁명이란 편협한 자아에서 벗어나 타자와 연결되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다. 김수우의 ‘뿌리주의’는 “플라스틱을 삼킨 앨버트로스를 어떤 것에도 비유하지 말자”(「뿌리주의자」) 다짐하며 타자를 대상화하는 자기반성에서 벗어나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시는 편리한 이론과 값싼 비유를 통해 지금 여기와 자기 자신을 고쳐 쓰려 하지 않는다. ‘무엇도 하지 말자’고 선언하는 ‘뿌리주의’는 현실을 비관하는 패배주의가 아니다. 이는 진보와 합리를 변명으로 하여 세계를 손쉽게 교정해왔던 폭력에 반대하는 강한 의지다. 자신의 욕망에서 벗어나 타자와 함께 전혀 다른 세계를 꿈꾸고자 하는 혁명의 시작이다.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뿌리는 결국 타자라는 기원에 다다라 “폐허가 된 영혼들”(「구름의 도시」)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이 따뜻하다.
김수우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 시집 『몰락경전』 이후 5년 만에 새 시집을 묶으셨습니다. 소감과 함께 독자분들께 시집에 대해 간단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갈수록 시집을 내는 게 두렵습니다. 여섯번째면 조금씩 시 세계가 안정돼야 하는데 여전히 강박과 불안이 따르네요. 시란 어쩔 수 없는 ‘틈’이고 결코 숙련되지 않는 혁명임을 다시 느낍니다.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해외창작거점 파견’ 프로그램을 통해 쿠바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호세 마르티라는 19세기 시인을 만났는데 제게 중요한 문학 기점이 된 것 같아요. 이후 세번 더 쿠바에 들락거렸어요. 그의 문학과 사상을 공부하면서 왜 시인의 언어가 쿠바 정신의 뿌리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문학의 소명은 타자성의 회복임을 깨달았다고 할까요. 이번 시편들은 그런 감성에서 쓴 것이라 강박도 많겠지만 무언가 근원적 힘에 대한 열망이 작동한 것 같아요. 『뿌리주의자』라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보이는 세계보다 보이지 않는 본래적 삶을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 이번 시집을 묶으면서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신 점이 있으신가요?
이제 우리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살아야 합니다. 당면한 전 지구적 위기는 이 문명이 책임져야 하고, 그리고 문명을 누리는 제게도 책임이 있지요. 지구라는 행성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타자성을 회복하는 새로운 감수성이 절실한 것 같아요. 여기엔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공감하는 능력은 용기에서 생성됩니다. 인간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평생을 소비한다고 하죠. 결국은 직면해야 할 죽음 때문입니다. “먼저 죽음을 배우라, 그래야 그대는 삶을 배울 것이다.” 이는 『티베트 사자의 서』의 전언입니다. 하이데거도 죽음을 선구하라고 했죠. 먼저 미래를 이해할 때 타자를 마주하는 용기가 생기지요. 죽음은 삶의 뿌리입니다. 하여 이번 원고를 묶으면서 죽음을 친밀하게 응시하려 했고, 또한 이 시대의 문명에 대해 누군가를 탓할 수 없는 나의 책임을 돌아보고자 했어요. 처음엔 시집 제목을 『해골』이라고 붙였다가 주변의 권유로 『뿌리주의자』가 되었습니다. 둘 다 ‘타자성 회복’의 은유입니다.
- 고향이 부산이고 또 현재 부산에서 인문학 서점 ‘백년어서원’을 운영하며 시를 쓰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시집에는 부산역, 남부민동, 흰여울길 등 부산의 지명도 자주 등장하는데요. 시인에게 부산은 어떤 의미를 지닌 공간인가요?
영도 산복도로에서 자랐어요. 영도 앞바다가 제 문학의 심연이지요. 예전엔 조선의 변방에 불과했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부산은 갑자기 커졌습니다. 일제강점기엔 부관연락선을 타려는 모든 지식인들이 모였고, 한국전쟁 땐 엄청난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삶과 꿈을 꾸린 피란수도였지요. 부산은 포용과 열림을 가진 도시입니다. 제가 운영하는 글쓰기 공동체 ‘백년어서원’은 원도심에 있어요. 피란수도 한가운데죠. 신도시에 밀리면서 많이 쇠락했지만, 저는 도시에게 중요한 것은 기억이라고 생각해요. 부산 원도심은 한국 근대 전체의 기억을 오롯이 품고 있죠. 그 역사성과 장소성이 시의 뿌리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요. 계속 개발로 성장해온 부산이 장소성이 잃게 될까 걱정이 많습니다.
- 작품 가운데 유난히 어렵게 완성하신 작품이 있으신가요? 그런 각별한 작품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한편 한편이 다 힘들었어요. 꾹꾹, 단어나 문맥을 누를 때마다 핏물이나 진물이 배어나오는 시를 쓰고 싶었어요. 그러다보니 자꾸 무거워집니다. 사실 가볍고 재담 있는 시들이 매우 부러운데, 저는 잘 되지가 않아요. 혼자 진지하고 재미가 없는 편이지요. 「변신 이야기」 「제의」 「뿌리주의자」 등의 작품은 원형적인 상상력으로 시공을 가로지르고 싶었던 욕심 때문에 많이 고민했어요. 또 「허리디스크」 「신단수」 「고무발가락」 등은 우리나라 현실에 절실한 ‘평화’를 말하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고뇌가 많았던 시들을 아끼게 되는 것 같아요.
- 시집 외에도 산문집, 번역 시집 등 다양한 저서를 펴내셨는데요. 차기작 등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독자분들께 나누어주시길 바랍니다.
서사시를 쓰고 싶어요. ‘마고’ 등 신화시대에서부터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울툭불툭 굽이치는 생명의 산맥을 따라가보고 싶어요. 또 자연적·원형적 세계를 민중적 상상력으로 짚어보고 싶은데 아직은 욕심뿐입니다. 특히 역사 공부가 많이 필요하겠지요. 안되면 도반을 찾아 함께 공부하려 궁리 중입니다. 또 저는 비서구 문학에 관심이 많은데, 쿠바 시인 호세 마르티의 산문을 계속 번역할 꿈을 가지고 있죠. 모두 긴 시간이 걸리는 일들이라 꾸준히 해야 할 작업들입니다.
시인의 말
발원지를 기억할 수 있을까.
녹슨 칼로 새긴 목판의 오래된 글씨처럼
어줍은 이상주의자.
등뼈를 곧추세우려던 공룡 같은 날들, 모두 혁명을 소비했을 뿐.
두개골 뒤통수에서 돋는 실뿌리가 저릿저릿하다.
창틀 위로 차오르는 방울벌레의 울음은
몇번의 허물을 벗었을까.
파이고 파인 서사들이 부스럼투성이지만
도둑질한 꿈도 언어도 부유하는 비닐처럼 떠돌지만
뿌리는 안다.
이상이 현실을 바꾼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세계를 업고 있다는 것을.
바람의 대합실에 저녁불이 들어온다.
미얀마의 눈물은 나의 제국주의 때문이다.
한발 내디딜 땅도 바다도
내가 버린 쓰레기로 가득하다.
미안하다.
2021년 11월
김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