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
쓸쓸하고 누추한 삶을 위로해주는 환한 슬픔의 노래
한국 시단의 빼어난 서정 시인으로 손꼽히는 박형준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1991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가장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은 내년에 등단 30주년을 맞는 중견 시인으로서 서정 시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왔다. 시간의 깊이가 오롯이 느껴지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감각적 이미지와 서정적 감수성이 어우러진 세계를 펼쳐가면서 암담한 삶에 꿈을 불어넣고 아픈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위로의 노래를 나지막이 들려준다. 특히 섬세한 감성과 “미립자 감각의 탄성(彈性)”(이원, 추천사)이 돋보이는 온유한 시편들이 깊은 울림과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목차
제1부 ㆍ 달나라
달나라의 돌
봄비 지나간 뒤
빛이 비스듬히 내리는데
나무 속의 새
아침의 추락
비의 향기
저런 뒷모습
아침 인사
은하
달빛이 참 좋은 여름밤에
쥐불놀이
부탄 두루미
나비는 밤을 어떻게 지새우나
오후 서너시의 산책 길에서
해바라기
이 봄의 평안함
달
전철의 유리문에 비친 짧은 겨울 황혼
저녁나절
득도
제2부 ㆍ 패턴
동네 천변을 매일
불광천
패턴
밤의 선착장
튤립밭
아침이 너무 좋아
토끼의 서성거림에 대하여
발밑을 보며 걷기
그의 창문을 창문으로 보면서
강변의 오솔길
아스팔트에서 강물 소리가 나는 새벽
교각
혼인비행
산책로 벤치에 앉아 있는 노인들
죽은 매미의 날개
바닥 예찬
아기 고양이의 마음
빈터
겨울 호수를 걷는다
느리게 걷는 밤산보 길
제3부 ㆍ 은하수
우리가 아직 물방울 속에서 살던 때
귀향일기
백년 도마
아기 별자리
나는 달을 믿는다
칠백만원
들녘에서
겨울 서리
겨울 귀향
세숫대야
백일홍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은빛 창문
은하수
달콤한 눈
가을이 올 때
나무 속 유리창
제4부 ㆍ 테두리
외성(外城)
반사광
여행의 꿈
인도 기차 여행
태양 속으로 떠나간 낙엽
발리슛
돛이 어디로 떠나갈지 상상하던 날들
눈빛
실보 고메로
빙하 나이테
어느 북 장인과의 인터뷰
뒤란의 시간
시선
테두리
둑방에서 쓴 일기
눈망울
발문|박연준
시인의 말
저자
박형준
출판사리뷰
“자신의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모든 테두리는 슬프겠지”
쓸쓸하고 누추한 삶을 위로해주는 환한 슬픔의 노래
한국 시단의 빼어난 서정 시인으로 손꼽히는 박형준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이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1991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가장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은 내년에 등단 30주년을 맞는 중견 시인으로서 서정 시단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왔다. 시간의 깊이가 오롯이 느껴지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감각적 이미지와 서정적 감수성이 어우러진 세계를 펼쳐가면서 암담한 삶에 꿈을 불어넣고 아픈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위로의 노래를 나지막이 들려준다. 특히 섬세한 감성과 “미립자 감각의 탄성(彈性)”(이원, 추천사)이 돋보이는 온유한 시편들이 깊은 울림과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박형준의 시는 맑고 고요하다. 가슴을 저미는 쓸쓸한 풍경 속에서 삶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가녀린 존재들의 숨 냄새를 살피며 “표현할 수 없는 슬픈 소리”(「튤립밭」)로 써내려가는 그의 시는 “애타는 마음도/너무 오래되면 편안해지”(「밤의 선착장」)고 삶의 숙명과도 같은 상처와 “슬픔도 환할 수 있다는 걸”(「저녁나절」) 보여준다. 시인은 “꽃에서도 테두리를 보고/달에서도 테두리를 보는”(「테두리」) 예민한 감각으로 가냘픈 생의 미세한 떨림을 응시하며 삶의 “그 진동을 담은 시를/단 한편이라도 쓸 수 있을까”(「비의 향기」) 묻는다. 그리고 “수천 미터 심연”(「바닥 예찬」)의 아득한 바닥, “성냥불만 한 꿈을 살짝 댕기던”(「쥐불놀이」) 아련한 기억의 창을 통해 현재의 삶을 돌아보고 먼 미래의 시간을 떠올리며 스스로 깊어진다.
시력 30년의 연륜이 쌓인 만큼 차분한 시적 성찰이 두드러지는 이번 시집은 “달, 별, 바람, 나무, 고향 같은/닳고 닳은 그리움”(「은하」) 속에서 “우리가 아직 물방울 속에서 살던 때”(「우리가 아직 물방울 속에서 살던 때」)의 소중한 기억들을 찬찬히 더듬어가는 고독한 산책자의 명상록과도 같다. 주로 저녁나절, 동네 천변이나 산책로, 재개발지역의 빈터를 느릿느릿 거닐며 골똘히 “생각이란 걸”(「토끼의 서성거림에 대하여」) 하며 사색을 즐기는 시인의 모습이 시집 곳곳에 고즈넉한 풍경으로 서 있다. 기억과 현재 사이에서 늘 “상처들이 많”은 “발밑을 보며”(「발밑을 보며 걷기」) 길을 걷는 시인은 “언제부터인가 삶에서 서성거림이 사라졌다는 생각”(「토끼의 서성거림에 대하여」)에 젖기도 하다가 서럽고 눈물겨운 도시 변두리의 삶에도 “가볍게 가볍게 발바닥으로 풀잎처럼 들어올리는 세상이 있다는 것”(「동네 천변을 매일」)을 깨닫는다.
시인은 오래전 “아름다움에 허기져서 시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동트는 새벽이 무작정 희망이 되지 못하”(「나비는 밤을 어떻게 지새우나」)는 허망한 삶의 무늬들을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채색하는 그의 시는 사물에 깃든 “잠자는 말”(「달나라의 돌」)들을 깨우고 “마음속에서만 사는 말들을 꺼내주는/따뜻한 손”(「이 봄의 평안함」)과 “내 안에 쓸쓸하게 살다 간 말들을 받쳐줄/부드러운 손”(「은하」)이 되기도 한다. 박연준 시인이 발문에서 “등이 순한 짐승처럼 빛을 베고 자는 사람”이라고 비유했듯이, “꽃 앞에 서면 마음이 어려진다”(「오후 서너시의 산책 길에서」)고 할 만큼 여린 심성을 지닌 시인은 불현듯 “이제까지 시를 너무 쉽게 써왔다는 자책”(「시선」)에 빠진다. 하지만 우리는 박형준의 시가 깊은 시심(詩心)으로 누추한 삶의 아픔과 슬픔을 견디어내며 세상의 그늘을 환하게 밝혀주리라는 것을 안다.
[박형준 시인과의 짧은 인터뷰]
- 내년이면 등단 30주년입니다. 30주년을 앞두고 7년 만에 일곱번째 시집을 출간하게 되셨어요. 소회를 듣고 싶습니다.
올해가 30년이 안 되어서 다행입니다. 제 삶에서는 기념할 만하지만 시를 쓰는 게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요. 시를 쓸 때나 시집을 낼 때나 다음번에는 달라지는 게 있겠지 기대를 합니다만, 결과적으로 매번 똑같습니다. 다만 별다를 게 없는 반복에서 저 나름대로 배우는 게 있고, 7년 만에 일곱번째 시집을 출간하게 되어 편안과 체념 가운데 거짓말 조금 보태면 어린아이처럼 자유로운 게 있습니다.
- 시인께서는 일상을 어떻게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성향적으로 뭐든지 되풀이하면서 그전보다 조금 내가 나아지는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번 시집과 관련해서는 걷는 것, 자전거 타기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국토 종주하는 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지만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편이라 단시일 내에 실행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때가 되면 자전거 타고 국토 종주하다가 불현듯 고향의 빈집에 가보고 싶습니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다보면 낯선 길이나 사물, 작은 동물들과 만나게 되고 어떤 기억이나 상상이 일체가 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되풀이되는 행동 가운데 불현듯 나타나는 갈망이나 그리움. 그런 실제 풍경과 체험이 하나가 되는 방식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 이번 시집을 엮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부분이나 특징은 무엇인가요?
7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일까요. 그 기간 동안 삶의 중요한 변곡점들이 있었습니다. 기성세대가 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기성세대라면 기성세대로서 갖추어 나가야 할 것들을 현실적으로 마련해야 했고, 따라서 세속화되어가는 과정이었어요. 거기서 뭔가를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단순함이 내 안에 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뭔가를 의식하면서 시를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시집을 정리하면서 그 단순함에 대한 나름의 성찰과 고민의 흔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에 대한 한계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사물과 생명체들과 대화하는 법을 걸음마하듯이 배우려고 한 점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작품이 있다면 소개와 이유를 부탁드립니다.
쓴 것들에는 쓰려고 했는데 쓰지 못한 것들이 있지요. 정작 시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게 시의 이상한 법칙이고 묘미인 듯합니다. 저는 원래 이번 시집 제목을 ‘서성거림과 강물 사이’라고 지으려 했습니다. 그런 시 제목이나 시 구절도 없고 뭔가 구체적이지 못해서 포기했습니다만 서성거림과 강물 사이에,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을 빌리면 널빤지 같은 걸 대어보려 했습니다. “머리맡에는 별/발 밑엔 바다”(에밀리 디킨슨 「널빤지에서 널빤지로 난 걸었네」 )가 있는 것같이 불안한 채로 미숙한 채로 다음 걸음을 걸어보려 했죠. 강물을 바라보는 것은 편안하지만 그 안엔 서성거림이 있고 불안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런 걸 바라보고 내 안에서 생겨나는 말을 자연스럽고 단순하게 해보고 싶었습니다. 뜻을 두고 쓴 게 아니라 그냥 느끼는 대로 사물과 나 사이에 널빤지를 만들 듯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시로 작은 동물들을 소재로 한 「밤의 선착장」 「토끼의 서성거림에 대하여」 「눈망울」 같은 시가 해당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밤의 선착장에서 나란히 붙은 채로 강물을 바라보는 오리 둘, 산책로의 한복판에서 서성거리는 토끼, 자전거에 치인 참새의 눈망울과 그 참새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망울……
- 앞으로의 활동 방향이나 삶의 계획 등이 궁금합니다.
기회가 되면 산문집과 서평집을 묶고 싶습니다. 대부분 흘러간 옛날 일이나, 읽은 책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은 글이지만 그게 제가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대안 중 그나마 제일 나은 게 아닌가 생각되네요. 글을 잘 정리하는 편이 아니라서 일단 컴퓨터 여기저기에 흩어진 글을 모아볼 작정입니다. 책을 묶는 건 그뒤에나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눈앞에 닥친 일을 저 나름대로 성실하게 하다보면 나중에 삶의 계획이나 행로가 어떻게든 펼쳐져 있겠지요.
[작가의 말]
시집 교정지를 출판사에 보내려고 언덕의 우체국으로 간다. 가는 김에 굽이 닳은 구두를 언덕의 구두 수선집에 맡기려고 함께 들고 간다. 구두를 수선해주듯이 누군가 내 시도 수선해주었으면 좋겠다.
2020년 6월
박형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