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 시대의 ‘리얼리스트’ 김현
현재와 미래에서 ‘서로의 긍지’가 되어주는 생생한 시편들
2009년 『작가세계』로 등단한 이래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김현 시인의 두번째 시집 『입술을 열면』이 출간되었다. 하위주체와 대중문화, 퀴어와 SF 등의 소재를 자유롭게 넘나든 첫 시집 『글로리홀』(문학과지성사 2014) 이후 4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입술을 열면』은 악(惡)과 위악(僞惡)이 낮과 밤처럼 연속되는 우리의 사회현실에 대한 시인의 담대한 저항이자 이 상황을 함께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의 민낯을 오래 바라본 다정의 기록이다.
김현을 두고 ‘리얼리스트’ 또는 ‘참여시인’이라는 익숙한 명명을 떠올릴 수도 있다. 아니 이런 명명법이 아니면 그와 그의 작품을 온전히 설명해낼 도리가 없다. 다만 시인은 구호가 아닌 부호로, 가르침이 아닌 보여줌으로, 계몽이 아닌 전위로 우리에게 새롭게 온다.
목차
제1부 ㆍ 심장이 멀게 느껴지고
불온서적
인간
기화
노부부
보는 자의 관점
죽음과 시간
조선마음 8
빛의 뱃살
떨리는 눈
사람의 장기는 희한해
너는 순종을 가르쳐주고
영혼결혼식
애정만세
제2부 ㆍ 슬픔의 송곳니가 빛나고
조선마음 11
감상소설
조선마음 4
마르가리따
빛의 교회
미상
무성영화
흰 것은 검은 것을 남기고
방공호
박물
조선마음 3
순수문학
신년
이것은 뮐러다
제3부 ㆍ 침묵 흐르고 꽃나무 흔들리고
오랑주리
황혼의 빛
조류사
강령회
소년이 든 자루
무서운 꿈
조선마음 5
조선마음 6
가슴에 손을 얹고
일요일 아침 태현이는
석류의 빛깔
은판사진
유구
제4부 ㆍ 가만히 흰 말이 가만히 기쁜 말에게 다가간다
빛은 사실이다
어떤 이름이 다른 이름을
망각하는 자
사랑의 알
귓속말
이 가을
생명은
장례식장에서
죽은 말
종말론
인권
미래가 온다
열여섯번째 날
해설|양경언
시인의 말
저자
김현
출판사리뷰
“입술은 행동할 수 있다”
“거리에서 당신은 당신의 입술을 느끼리라”
‘지금 이곳의 사회’에 전하는 연대의 노래 「조선마음」 연작시 수록
시인은 『입술을 열면』에서 디졸브(dissolve, 장면전환기법)라는 영화적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시적 진술과 화자의 관념 사이에 다른 장면과 낯선 목소리를 끊임없이 중첩시키는 것으로, 시편들마다 각기 다른 기호로 디졸브가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김현의 새로운 시도는 파편화된 삶의 장면들을 온전히 재현해내는 통로이자, 파편이 낳은 세계의 불화들을 쓰다듬는 재건의 방법론이 되기도 한다.
이번 시집을 펼치면 「조선마음」 연작시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끌 것이다. 애초에 시인은 ‘조선마음’을 가제로 두고 이 시집을 엮었다. 시인이 끌어들인 ‘조선’이라는 낯선 과거는 곧잘 암울한 미래(‘헬조선’)처럼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빠르게 흘렀지만 사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우리의 비루한 현실을 되비추는 것이기도 한다. 아울러 이는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 청소년 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자원봉사자 등 다양한 삶의 궤적들을 오가며 시인이 직접 마주한 소수자들, 그들의 마음자리에 남아 있는 말들을 그러모아 이것을 다수의 목소리로 만들어온 시인의 이력과도 관련이 깊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 대부분은 2013년부터 2015년, “인간의 존엄에 무심한 정권에 의해 삶이 삶으로, 죽음이 죽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시기”(양경언, 해설)에 씌어졌다. “특별히 연도를 밝혀 적는 건, 우리가 과거의 시를 현재로 앞당겨오는 데 함께 연루되어 있음을 환기하기 위해서다.”(시인의 말) 다행히도 우리는 이 어둡고 힘든 시기를 촛불의 힘으로, 그 거리의 밝은 빛을 통해 현재로 건너올 수 있었다. 그 거리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르고 손 잡아주면서 “빛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살아갈 힘을 다”(해설)질 수 있었다.
김현의 시집을 품에 안은 당신이 현재에도, 미래에도 ‘서로의 긍지’가 되어 그 거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 “거리에서 당신은 당신의 입술을 느끼리라.” 동시에 “응축된 상처의 시간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는 당신을 만나게 되리라. 그 순간 같은 거리에서 손을 흔들며 반갑게 당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김현의 시는 그렇게 “오랜 약속이었다는 듯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송종원, 추천사)
[자시(詩) 소개]
감히, 스스로 자신의 시집을 소개할 수 있을까, 주저주저하면서도 한번쯤은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시집 제목을 ‘입술을 열면’이라고 붙이고 나니 열린 다음에 오는 말은 역시 저보다는 읽는 사람의 몫이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됩니다. 최초에 저는 입술을 열면 ‘미래가 나타나고’라는 말을 붙였었습니다. 궁금합니다. ‘당신의 입술을 열면……’
꽤 오랫동안 시집이란 시인이 만들고 조정하는 세계, 시공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세계 속으로 독자들이 그저 왔다 가는 것이라고요. 그러나 이 시집을 묶으며, 시집이란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한명의 사람이라는 신비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시집은 육체를 가지고 있고, 또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살아 있다’는 거지요. 그때 그 몸과 마음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통과해온 시민의 것이며, 투쟁하고 연대하는 겁먹은 시위자의 것이며, 계속해서 지워지는 사회적 약자의 것이며, 지금 가장 뜨겁게 선언하는 페미니스트의 것이며 무엇보다 노동하는 가운데 꿈을 꾸는 예술가의 것이라는 겁니다. 새로운 화자의 것이지요.
한명의 독자가 한권의 시집과 독대하고 앉아 멈춰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미래의 흐름’에 속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미래란 반응하고 생성하는 일이니까요. 겹이 많은 시집이어도 좋겠지만, 겹쳐지는 시집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길, 스스로도 제 시집의 건강과 안온을 기원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