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슬픔은 어떤 자세로 태어나는가
내밀한 삶의 경험에서 차오른 투명하게 빛나는 시편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젊은 시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박연준 시인의 세번째 시집 『베누스 푸디카』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앞의 두 시집과는 다른 방향의 시세계를 선보인다. 내밀한 삶의 경험 속에서 차오르는 “은밀하고도 섬세한 언어를 통해 뿜어나오는 명랑하고도 발랄한 에로티시즘의 미학”과 사회적 억압과 편견에 대항하는 독창적인 시적 목소리로서의 “부끄러움의 감수성”(조재룡, 해설)이 투명하게 빛나는 시편들이 깊은 공감과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목차
제1부ㆍ정숙한 자세
베누스 푸디카
녹
고요한 싸움
침대
침대 2
비 오는 식탁
무용수
이별에 관한 일곱개의 리듬
꽃밭, 흡혈
혀 위의 죽음
실언 트라우마
아홉번 죽은 별들만 아름답다
암늑대들이 달아나는 법
음악에 부침
제2부ㆍ당신이 물고기로 잠든 밤
흠향(歆饗)
당신이 물고기로 잠든 밤
기다리는 자세
침대 3
화살과 저녁
고양이
꽃, 가장 약한 깃발
가벼운 장례식
자오선
여름의 구심력
가라앉은 방
서랍
여름낮, 여름밤
울음 안개
쏟아지는 부엌
아침을 닮은 아침
제3부ㆍ깨지지 않는 꽃잎들
줄지어 선 매화나무 곁을 지날 때
베누스 푸디카 2
내가 귀신이었을 때
침대 4
침대 5
그애가 저녁에 하는 행동
생각담요 아래 살다
커튼
귀가 무거운 사람
계란 일곱개 복숭아 세개
발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하층민
뱀의 노래
그릇
빈 잔
제4부ㆍ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
하늘에서 돼지들이 떨어지는 저녁
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
베누스 푸디카 3
꽃 필 때 같이 잤다
모래와 밤
검은 짐승들
동굴 앞을 지날 때
흡혈
붉은 마디〔寸〕
네가 사라지기 전에
바람의 혀
전동차 안에서
잠과 꿈
키스의 독자
발등에 내리는 눈
증발 후에 남은 것
해설|조재룡
시인의 말
저자
박연준
출판사리뷰
“외면할 수 없는 하나의 자세, 잊을 수 없는 하나의 표정”
슬픔은 어떤 자세로 태어나는가
내밀한 삶의 경험에서 차오른 투명하게 빛나는 시편들
사랑하는 사람아/얼굴을 내밀어보렴/수면 위로/수면 위로//네가//떠오른다면//나는 가끔 눕고 싶은 등대가 된다(「서랍」 전문)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젊은 시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박연준 시인의 세번째 시집 『베누스 푸디카』가 출간되었다. 첫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창비 2007)과 두번째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2012)를 통해 직설적인 화법과 도발적인 시어로 새로운 세대의 독특한 감수성을 보여주었던 시인은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앞의 두 시집과는 다른 방향의 시세계를 선보인다. 내밀한 삶의 경험 속에서 차오르는 “은밀하고도 섬세한 언어를 통해 뿜어나오는 명랑하고도 발랄한 에로티시즘의 미학”과 사회적 억압과 편견에 대항하는 독창적인 시적 목소리로서의 “부끄러움의 감수성”(조재룡, 해설)이 투명하게 빛나는 시편들이 깊은 공감과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옛날, 옛날, 옛날/(뭐든지 세번을 부르면, 내 앞에 와 있는 느낌)//어둠을 반으로 가르면/그게 내 일곱살 때 음부 모양/정확하고 아름다운 반달이 양쪽에 기대어 있고/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았지/아름다운 틈이었으니까//(…)//꿈, 사랑, 희망은 내가 외운 표음문자/습기, 죄의식, 겨우 되찾은 목소리, 가느다란 시는/내가 체득한 시간의 성격//(…)//후에 책상 위에서 하는 몽정이 시,라고 생각했다가/나중엔 그의 얼굴을 감싼 채 그늘로 밀려나는 게/사랑,이라고 믿었지만(「베누스 푸디카」 부분)
표제인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는 비너스상이 취하고 있는 정숙한 자세를 뜻하는 미술 용어로, 한 손으로는 가슴을, 다른 손으로는 음부를 가리는 자세를 뜻한다. 슬픔은 어떤 자세로 태어나는가, 하는 시인의 고민이 「베누스 푸디카」의 연작시에 담겨 있다. 시인은 시를 쓰게 된 과정과 동기를 고백하는 시편으로 시집의 문을 연다. “보자기가 되어/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고 안간힘을 쓰”(「녹」)며 살아왔던 삶에서 “꿈, 사랑, 희망”은 한낱 텅 빈 기호로서의 “표음문자”에 불과했다는 시인의 고백에는 ‘부끄러움’이 깃들어 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줍음이 아니라 사회적 통념과 편견, 억압과 폭력에 대항하는, “시를 똥처럼 지리”던 “말이 부끄러운 아이”(「그애가 저녁에 하는 행동」)의 시적 목소리이다. 시인은 “비극의 원형을 들여다보고, 상실의 순간을 마주하고, 결여의 장소를 불러내어”(조재룡, 해설) “작고, 고요하고, 가느다란 옛날”(「생각담요 아래 살다」)의 기억들을 기록해내며 “뜨거운 주물(鑄物)로 탄생하는 꿈”(「당신이 물고기로 잠든 밤」)을 꾼다.
탈탈 털어 죄다 갖다 버린 그늘에는/무릎에서 떨어진 딱지도 있고/취한 아버지가 내 이름을 오래 부르다 고꾸라져 잠든 밤도 있고/뒤틀린 다리를 끌고 사라지던 여름도 있다//뭉뚝한 연필, 가느다란 연필, 부러진 연필로/새벽의 어깨선을 열심히 그리던 시간들도 모두/모두 갖다 버렸다//버렸더니 살겠다/내가 나를 연기하며/(시도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연기를 하며)/그늘을 기억하는 일과/들어가 사는 일 사이에서 도르래를 굴리며/살 수는 있겠으나//(…)//도망가봤자 소용없어,/아름다운 그늘!(「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된다」 부분)
사회적 통념이 덧씌운 편견 속에서 “고인 채로 찰랑이다,/온 세상으로 흘러다녔”(「베누스 푸디카 3」)던 시인은 억압된 감각들을 풀어내어 “괄호 안에 갇힌 말들이 희미해”(「기다리는 자세」)질 때까지, “시작도, 선언도, 기억도 없이/깊어진 것들”과 “이름 귀퉁이가 부서진 것들”(「침대 3」)을 기록하는 일에 전념한다. 이로써 “종이 위 다섯개의 무덤을 짓고/기억을 해독하고 싶을 때마다 하나씩 부숴 먹”는 시, “가난한 사람들의 뒤꿈치가 모여 자”고 “목이 쉰 남자들이 목적을 잃어버리는” 저 “흰 장송곡들의 종착역”에서 “무덤 위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무덤의 무덤”(「이별에 관한 일곱개의 리듬」)을 기록하는 시가 우리 앞에 당도하고, 시인은 “노래하는 뱀들이 구불구불 전진하는 새벽”(「뱀의 노래」)을 맞이한다.
패배자들의 무릎을 닦아주고 싶다/눈가의 주름을 더 깊이 파고/아스팔트 같은 목덜미 위를 지나/마을이 사라진 지도 같은,/빈손 위에 눕고 싶다//그들의 걸음과 복사뼈와 낯빛에 대하여/무릎으로 생각하다/저녁이 되면/옛 광장을 서성이고 싶다//왜 나는 당신 얼굴을/쓰다듬으며 살지 못했을까/얼굴이 사라지기 전에//곱고 천진하게 패배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뒤척일 수 있을 때/가라앉고 싶다(「네가 사라지기 전에」 전문)
이 지점에서 시인은 “미래를 펼쳐보다/안쪽이 환해지면”(「커튼」)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내는 미지의 존재, 곧 사랑의 대상에 다가선다. 여기서 시인은 ‘실패하는 실연’을 말하며, 사랑의 종말이나 파국, “잠정적으로/잠정적으로//살아 날뛰는//이별들”(「이별에 관한 일곱개의 리듬」)을 삶의 이치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사랑의 실패가 패배하는 사랑, 그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떨어지기 위해 물방울이 시작하는 일”(「녹」)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버티어야 할 것은/버틸 수 없는 것들의 등에 기대어/살기도”(「고요한 싸움」) 하는, 실연의 실패로 가득한 현실에서 시인은 “입을 반쯤 벌린 채/가장 고음으로 죽어가는” 존재들의 소리를 듣고, “정신없이 머리카락을 뜯어 먹”거나 “지워진 거리에서 차가운 발과 끊어지는 리듬으로/완성되는 과거”(「빈 잔」)를 되새긴다.
실연에 실패한 자가 걸어가고 있다/북을 치던 손은 가고 흔들림만 남았다//승리한 거울들이 돌아눕는다/일렬종대/별들의 함성/함몰된 얼굴에서 일어나는 빛의 산란//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자지러지는 거울들/복에 겨워 죽을 것 같다/자지러지는 거울들//(…)//아홉번 죽은 별들만 아름답다는데 대관절/아름답게 죽은 별이란 게 무슨 소용일까/살아나면 어쩌지/이 많은 생의 궁극들,/피어나면 어쩌지//밤의 이적수(耳赤手)로 죽음에 성공한 귀신들,/실연에 실패한 자가 언덕을 오르고 있다(「아홉번 죽은 별들만 아름답다」 부분)
시인은 이제 “문턱에 널어놓은/살아보지 못한 날들”을 열어 보이며 “조그만 것들의 과거”(「가벼운 장례식」)에서도 ‘지금-여기’ 살아 있다는 실감을 찾아낸다. 아직도 “가닿지 못한 이름들이/기름처럼 떠 있는 방”, 오로지 “풍경으로 박히”고 말 뿐인 저 “부러진 시간들이 초로 꽂힌 방”(「가라앉은 방」)을 더듬거리며, “죽은 이름들”과 “으깨져 발끝에서 곤죽이 되”(「쏟아지는 식탁」)어버린 것들의 비극을 ‘해독자’의 언어로 담아내고자 애쓰면서 시인은 한줄 한줄 시를 써나가며 제 삶을 살아낸다. 어느날부터인가 “모든 면에서 가난해졌”(「베누스 푸디카」)지만 “실패에 엉기는, 실패(失敗)들”(「화살과 저녁」)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시를 쓰겠다는 시인의 간절한 목소리는 자못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아주 커다란 원을 그리다 지치고 싶다//하늘에서 매미들이 다 쓴 날개를 떨어뜨리고/투명한 죽음들로 무거워지는 여름/우리의 밤이 모여 백야를 낳고/종이다!/흰 종이다!/글자들이 뛰어내리고//신발을 잃어버린 발들이 멀리서 걸어오고 있어/그들을 기다리자/힘이 센 혀가 그늘을 걷어내려다/한꺼번에 무너진다 해도/무너져, 흐른다 해도/물결치는 그늘과 파도치는 벽을/차고! 넘어!//노래해//중요한 건/칼이 진정으로 날카로워/문장들이 겁에 질리는 거야//그 짓을 오래 하다 나자빠진 저녁,/그게 시인이야(「음악에 부침」 부분)
[추천사]
박연준의 세번째 시집 『베누스 푸디카』를 읽는 내내, 길어지는 상상을 했다. 몸이 길어지고 해가 길어지고 그림자가 길어지고 이야기가 길어지는 상상은 생(生)이 길어지는 데까지 나아갔다. 태어나면서부터 깨지는 존재들인 우리는 사는 일이 결국 벌을 받는 일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절감한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삶은 지난하고, 살아 있다는 실감(實感)을 느끼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는 고개를 길게 늘여빼고 시선은 더 길게 유지함으로써, “조그만 것들의 과거”(「가벼운 장례식」)에서도 기어이 실감을 찾아낸다. 실감을 찾아내는 일은 살아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는 가장 적극적인 일이다. 길어지는 상상이 길어져 한밤에 잠들지 못하고 시를 쓰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활자 속으로 “사라지는 연습”(「귀가 무거운 사람」)을 하다 “기이한 울음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난”(「검은 짐승들」) 사람이. 그 사람이 마주한 더없이 생생한 순간이, 불현듯 떠오른 유년 시절의 질문이, 누군가에게 “돌아가려는 사람”은 또다른 누군가를 “떠나려는 사람”(「바람의 혀」)이라는 아이러니가. 시집을 다 읽고 나니 나도 모르게 정숙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외면할 수 없는 하나의 자세가, 잊을 수 없는 하나의 표정이 된 박연준이 내 앞에 비밀처럼 서 있었다. - 오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