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그윽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포착해온 이정록의 시집『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깊은 사유와 섬세한 관찰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일상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질박한 언어가 살아 숨 쉬고 정밀한 묘사와 명료한 비유가 은은한 감동을 선사한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긍정의 시선으로 사소한 존재들의 낮은 곳을 바라보며 인간과 자연, 사물과 사물이 교감을 이루는 조화로운 풍경 속에서 삶의 가치와 본질을 차분한 마음으로 성찰한다.
목차
제1부: 가슴우리
해 지는 쪽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물뿌리개 꼭지처럼
생(生)
영혼의 거처
새표
젖은 신발
별
조문
맨발
가슴우리
백두
묵
코를 가져갔다
문상
제2부: 내가 좋다
내가 좋다
색동 시월
사루비아
츰 봐
청양행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독한 농담
은방울꽃
고정과 회전
간장게장
궁합
버티고
신불출(申不出)
까치설날
설중매
명맥
비둘기
제3부: 시의 쓸모
꽃은 까지려고 핀다
시인
바가지 권정생
실소
시의 쓸모
말줄임표
시론
강원도시인학교
이팝나무 연주회
눈
꽃그늘
흰 붓
경주 남산
춤
제4부: 우주의 놀이
못
뻥그레
성(城)
밥그릇 뚜껑
상추꽃
까치내
물푸레나무라는 포장마차
세석평전
단추를 채우며
간이역
삼계탕
우주의 놀이
모시떡
몸의 서쪽
해설|김상천
시인의 말
저자
이정록
출판사리뷰
사소한 존재들을 바라보는 이해와 긍정의 시선
“자연과 인간이 융화하고, 인간과 인간이 화해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경”
느티나무는 그늘을 낳고 백일홍나무는 햇살을 낳는다./느티나무는 마을로 가고 백일홍나무는 무덤으로 간다./느티나무에서 백일홍나무까지 파란만장, 나비가 난다.(「생(生)」 전문)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그윽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포착해온 이정록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이 출간되었다. 삶의 지혜와 해학이 넘치는 연작시집 『어머니학교』(열림원 2012)와 『아버지학교』(열림원 2013)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과 인간이 융화하고, 과거와 현재가 만나며, 인간과 인간이 화해를 이루는 아름다운 절경”(김상천 해설)의 세계를 펼치며 웅숭깊은 사유와 섬세한 관찰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일상의 구체적인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질박한 언어가 살아 숨 쉬고 정밀한 묘사와 명료한 비유가 돋보이는 “슬프고 아름답고, 맑고 깨끗한 시들”(신경림, 추천사)이 깊은 울림 속에서 은은한 감동을 선사한다.
햇살동냥 하지 말라고/밭둑을 따라 한줄만 심었지./그런데도 해 지는 쪽으로/고갤 수그리는 해바라기가 있다네.//나는 꼭,/그 녀석을 종자로 삼는다네.//벗 그림자로/마음의 골짜기를 문지르는 까만 눈동자,/속눈썹이 젖어 있네.//머리통 여물 때면 어김없이/또다시 고개 돌려 발끝 내려다보는 놈이 생겨나지./그늘 막대가 가리키는 쪽을/나도 매일 바라본다네.//해마다 나는/석양으로 눈길 다진 그 녀석을/종자로 삼는다네.//돌아보는 놈이 되자고./굽어보는 종자가 되자고.(「해 지는 쪽으로」 전문)
이정록의 시는 “높은 곳에는 올라가보지 못한 바닥의 나날”(「바가지 권정생」) 같은 일상의 그늘진 소재를 다루면서도 따듯함이 깃들어 있다. 시인은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긍정의 시선으로 사소한 존재들의 낮은 곳을 바라보며 인간과 자연, 사물과 사물이 교감을 이루는 조화로운 풍경 속에서 삶의 가치와 본질을 차분한 마음으로 성찰한다. 나아가 “순간순간이 연명”(「별」)인 삶은 죽음의 한 순간이며, “영혼을 부화시키는 일”(「영혼의 거처」)인 죽음은 생명의 한 고리일 뿐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러 시인은 “해 지는 쪽으로/고갤 수그리는”(「해 지는 쪽으로」) 여린 존재들에게 공감과 연민의 눈길을 보내며 “어둠을 몰고 가는 차창에 달라붙는 별빛”(「별」) 같은 “푸른 봄”(「세석평전」)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사바나 초원,/죽은 어미 옆에/송아지가 누워 있다.//송아지는 죽어 석양을 보고 있다./어미 혓바닥은 엉덩이 쪽을 가리키고 있다./암소의 자궁이 쩍 벌어져 있다./몸의 동쪽은 언제나 생식기다.//초원은 너무 넓어요./엄마 발과 제 발을 잇대어 방을 만드세요./여기 작은 방에 들어와 젖을 짜세요./제 부드러운 가죽도 드릴게요.//눈이 커다란 사내가/죽은 암소의 젖을 짠다./몸의 북쪽은 등짝이다./아기가 업힌 곳이다./마른 젖 보채던 아이가 울음을 멈춘다.//사람의 몸이 성전인 까닭은/기도의 시간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눈물 젖은 두 손을 맞잡기 때문이다./몸의 남쪽은 손바닥이다.//울음소리가 없다./송아지도 어미 소도 눈물 짜지 않는다./붉은 눈망울만이 몸의 서쪽이다.(「몸의 서쪽」 전문)
고단한 삶에 건내는 위로의 말
시인은 자연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 또한 잃지 않는다. “그늘이 어둠이 되지 않게 나지막이 살아”(「내가 좋다」)가면서 “높고 험한 데로 밥벌이하러 나가야 하”(「젖은 신발」)는 이웃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의 손길로 어루만진다. 시인은 인생이란 “숨막힘의 연속”이면서 “목젖에 걸린 주먹만 한 씨앗을 틔우는 일”(「별」)이며 “마지막은 다 밤길”(「젖은 신발」)이라는 통찰에 이르러 삶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시인은 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너는 죽고 나만 살아야 한다는” “구더기의 역사”(「새표」)가 아니라 애틋한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스미는 평화로운 세계라는 일깨움을 넌지시 전한다.
눈에 넣어도/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산다//자주감자가 첫 꽃잎을 열고/처음으로 배추흰나비의 날갯소리를 들을 때처럼/어두운 뿌리에 눈물 같은 첫 감자알이 맺힐 때처럼//싱그럽고 반갑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눈물겹고 흐뭇하고 뿌듯하고 근사하고 짜릿하고 감격스럽고 황홀하고 벅차다//눈에 넣어도/아프지 않은 것들 때문에, 운다//목마른 낙타가/낙타가시나무뿔로 제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을 찔러서/자신에게 피를 바치듯/그러면서도 눈망울은 더 맑아져/사막의 모래알이 알알이 별처럼 닦이듯//눈망울에 길이 생겨나/발맘발맘, 눈에 밟히는 것들 때문에/섭섭하고 서글프고 얄밉고 답답하고 못마땅하고 어이없고 야속하고 처량하고 북받치고 원망스럽고 애끓고 두렵다//눈망울에 날개가 돋아나/망망 가슴, 젖는 깃들 때문에(「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 전문)
생명력 있고 풍성한 언어의 향연
이정록 시인은 묘사와 비유가 뛰어난 만큼 언어를 부리는 솜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이각반합(二角飯盒)” “반상군자(飯床君子)”(「간장게장」), “鼠錄(서록)” “菊英水(국영수)”(「꽃그늘」) 같은 한자어의 절묘한 사용도 그렇거니와, “자작고개에 올라 삼박사일 자작부터 시작하지” “조롱고개에 올라 수수께끼 같은 세상에 풍자를 날리는 비수의 문장을 갈빗대 삼지” “재치고개에 올라 해학의 너털웃음으로 가슴의 터널을 뚫고”(「강원도시인학교」) 등에서 보듯 실제의 지명에서 시상을 떠올리는 대목에 이르면 감탄할 정도이다. 「문상」 「색동 시월」 「츰 봐」 「고정과 회전」 「궁합」 등 구성지면서도 능청스러운 충청도 방언이 그대로 생명력 있는 시어로 되살아나는 시들에는 유머와 재치와 익살이 넘쳐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게 마지막 버스지?/-한대 더 남었슈./-손님도 없는데 뭣하러 증차는 했댜./-다들 마지막 버스만 기다리잖유./-무슨 말이랴? 효도관광 버슨가./-막버스 있잖아유. 영구버스라고./-그려. 자네가 먼저 타보고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줘. 아예, 그 버스를 영구적으로 끌든지./-아이고. 지가 졌슈./-화투판이든 윷판이든 지면 죽었다고 하는 겨. 자네가 먼저 죽어./-알았슈. 지가 영구버스도 몰게유. 본래 지가 호랑이띠가 아니라 사자띠유./-사자띠도 있남./-저승사자 말이유./-싱겁긴. 그나저나 두 팔 다 같은 날 태어났는데 왜 자꾸 왼팔만 저리댜./-왼팔에 부처를 모신 거쥬./-뭔 말이랴./-저리다면서유? 이제 절도 한채 모셨고만유. 다음엔 승복 입고 올게유./-예쁘게 하고 와. 자네가 내 마지막 남자니께.(「청양행 버스기사와 할머니의 독한 농담」 전문)
시뿐 아니라 동시, 동화, 그림책 등 다양한 장르에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은 “감동이 아니라면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시 창작법의 전부”(「실소」)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천진한 웃음이 넘치는 재미뿐 아니라 “망망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아릿한 감동이 있다. 이제 ‘지천명’의 나이 쉰 넘어 “얼과 씨가/삶의 얼개”(「춤」)라는 답을 얻은 시인은 “천권을 읽어야/시 한편 온다.//(…)//천편을 써야/겨우 가락 하나 얻는다”(「시론」)는 겸허한 자세와 우주를 여는 “첫 이파리의 떨림” 같은 순정한 마음으로 “아득한 어둠”(「우주의 놀이」)을 노래한다. 그 노래 마디마다 “눈보라의 열정”(「이팝나무 연주회」)과 “최선을 다한 헐떡거림”(시인의 말)이 있기에 그의 시는 더욱 넓고 깊어지리라.
몽당연필처럼/발로 쓰고 머리로는 지운다./면도칼쯤이야 피하지 않는다.//몽당(夢堂)의 생,/자투리에 끼운 볼펜대를 관(冠)이라 여긴다./뼈로 세운 사리탑!/끝까지 흑심(黑心)을 품고 산다.//한 사람의 손아귀/그 작은 어둠을 적실 때까지./검게 탄 마음의 뼈가 말문을 열 때까지.(「시인」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