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삶의 진풍경을 포착하는 특별하고 놀라운 투시력
등단 이후 줄곧 시적 갱신을 도모하며 독특한 발상과 어법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중견 시인 고형렬의 열번째 시집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최근 2년간 전작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2012 실천문학사),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2013 문학동네)를 잇달아 펴내며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2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세계를 바라보는 예민한 투시력으로 어설픈 “깨달음보다는 느껴짐”의 시학을 펼쳐 보인다. 불안과 혼돈의 세계에서 희망보다는 절망과 어둠을 통해서 길을 내고, 그 어둠 너머의 빛을 탐색하는 “회한과 좌절과 망연자실”의 “녹록지 않은 정서”(김소연, 추천사)와 비장한 감정들이 담긴 시편들이 심금을 울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삶의 치열성과 시 쓰기에 대한 열정이다.
목차
풀과 아파트 008
화곡동의 빨간 벽돌 속에는 009
입맞춤의 난해성 010
어떤 새에 대한 공포 011
손에서 번쩍거려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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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땅속 피아노 100
거울 도시 102
참나무시드름병감염목 104
보잘것 없는 인간 105
저 98층에서 무엇이 내려오나 106
브이꼬프의 재봉틀 108
나는 너에게 그려진다 109
통어 110
발문 박형준 111
시인의 말 130
저자
고형렬
출판사리뷰
삶의 진풍경을 포착하는 특별하고 놀라운 투시력
등단 이후 줄곧 시적 갱신을 도모하며 독특한 발상과 어법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중견 시인 고형렬의 열번째 시집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최근 2년간 전작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2012 실천문학사),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2013 문학동네)를 잇달아 펴내며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2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세계를 바라보는 예민한 투시력으로 어설픈 “깨달음보다는 느껴짐”의 시학을 펼쳐 보인다. 불안과 혼돈의 세계에서 희망보다는 절망과 어둠을 통해서 길을 내고, 그 어둠 너머의 빛을 탐색하는 “회한과 좌절과 망연자실”의 “녹록지 않은 정서”(김소연, 추천사)와 비장한 감정들이 담긴 시편들이 심금을 울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삶의 치열성과 시 쓰기에 대한 열정이다.
해변의 황무지를 쓰고 죽고 싶다/풀 서너줄기 이어진 석양의 모래톱//고독한 동북아시아,/변방의 한 시인 어린 킹크랩의 눈단추처럼/늘 기울어진 하늘을 찾는 물별을/기다리며//스스로 황무지가 된 해변의 나는/안쪽에 옹벽을 올린 절벽의 주거지에서/새물거리는 동북의 샛눈//황무지 모래톱에 눕고 싶어라/황무지 풀밭에서 나를 붙잡고 싶지 않아라/못 죽어 눈물도 없이//바람 우는 황무지 해당화야/흰 불가 갯메꽃 나 수술에서 혼자 운다//먼 곳에서 해변의 황무지가 된다(「황무지 모래톱」 전문)
고형렬의 시는 편안하게 읽히는 서정시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다. 시적 발상이 낯선데다가 “해니(骸泥)”(「해니(骸泥)여 어디 있는가」), “좌안의 어둠속 망막”(「빛의 아들에게」), “우주의 다이어프램”(「나에게도 조금 보여주지 않겠어요」), “인공막창” “씰리콘 펠릿”(「태양의 인공막창집」), “풍계묻이를 한 미술의 비밀 사다리” “행려시(行旅屍)”(「죽음 속의 기척을 위하여」), “손바닥만 한 경구개의 문”(「푸른 물고기의 울음」), “상한(傷寒)의 검은 목내이들”(「참나무시드름감염목」), “회맹판” “랑게르한스섬”(「보잘것없는 인간」) 등과 같은 생경한 언어와 요령부득의 표현들이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일상의 세목을 재현하는 섬세함을 넘어 과학적인 사유에 바탕을 둔 기발한 상상력과 언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그만의 개성으로 힘을 발휘한다.
허공의 그대가 살며시, 땅에 첫발을/내딛는 순간, 눈록들은 전율한다/신이 툭, 히말라야에 던져놓은 재규어/돌이 발에 닿는 순간, 눈이 열리고/그 눈을 찢은 영혼은 갑자기 태어났다/모래를 심장에 전하던 백만분의 찰나/짧은 정강이 아래 봉합된 발바닥/지평선과 대칭한 복부의 곡선과 음부/그 안에 걸린 복잡한 장기들/왜 그것들이 꼭 있어야만 했는가/꽉 다문 입처럼 강인한 항문의 괄약근/그 위를 뛰어가는 한주먹의 흰 돌들/만약 스스로 존재한다 할지라도/누가 저 재규어를 상상할 수 있을까/등골을 타고 성기를 가린 긴 꼬리/호랑가시나무 잎사귀가 뒤덮인 혓바닥/사뿐, 검은 바람의 호명이 되던/헤아릴 수 없는 그 세월, 몰록 흐른 뒤/지구 밖의 허공 속 벼락을 쥐고/공전궤도를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마지막 재규어는 지금 어디 있는가/살며시 지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아, 한묶음 꽃의 울음이 터져나왔다(「애채들이 우는 지문의 기억」 전문)
상투성을 거부하는 시, 냉소 속에 연민을 품다
시력 35년이 넘었음에도 시인은 지금까지의 시적 성과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적 형식을 탐구해왔다. 이번 시집에서도 색다른 시적 대상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상투적인 문법을 뛰어넘는 독특한 표현을 창조해내는 노련한 솜씨가 돋보인다. 그런 가운데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도 삶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는다. 입술은 “가장 취약한 부분에 붙어 있는 살”에 불과할 뿐이지만 “입맞춤은 그러나 입술로만 가능하다”(「입맞춤의 난해성」)는 진술에서 보듯이, 시집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시의 발단은 한결같이 냉소적인데 결말은 세상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법을 박형준 시인은 “시라는 온도의 변증법”이라고 명명한다.
나뭇가지에 앉아 심장을 꿰맨다/새벽 한시의 대낮, 머리에 도끼가 솟은 검은 새//반고리관의 공명은 미명 속으로 사라졌을 뿐/일할의 빛이 구십구할의 어둠을 지운다/기구한 형상의 유전자를 남기고 결국 노숙(露宿)이 된 꿈들/다시 소통되지 않는 빛과 말/치실은 그들의 이빨에서 끊어지지 않는다/새는 너덜대던 도시와 자기 생을 기억하지 않고/발톱과 날개는 서로 상상하지 못한다/한점을 친다, 밤을 색칠한 필름 속 나뭇가지//혼돈을 향한 아침 길을 다시 잃고, 하늘옥상에/새의 집을 지은 유역의 오랜 기숙자들/손거울 들고 심장을 깨 영혼을 다듬는다(「어떤 새에 대한 공포」 전문)
거대한 혼돈과 암흑의 세계에서 “지난 십년간 망가진 언어를 붙잡고 허둥거렸”던 시인은 “삶의 어떤 언어도 폭력적인 저 바깥을 읽어낼 수가 없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시인은 “간혹 개 짖는 소리와 닭 울음소리뿐”(「적막황홀의 아침에」)인 자연의 한가로움을 즐기는 게 아니라 “눈물겹게 나는 자신을 너무 깊게 관찰했던 것”(「보잘것없는 인간」)임을 고백하면서 시가 “책 속에서 절규”하는 저 “죽음의 거리”(「시(市)는 죽었다」)이던 도시의 삶을 돌아본다. “수많은 시인들이 존재하지만 시인은 없다”(「언제부턴가 Y는」), “한국의 젊은 시인들은 빨리 늙는다”(「거울 속 상하이 귀뚜라미」)는 구절을 보면 시인이 최근 글에서 밝힌 “시대가 시와 시인을 바보로 만들었다”(『포지션』 2015년 봄호)는 진단이 뼈아픈 공감으로 다가온다.
신간은 출간되지 않는다/새로운 언어와 음울함과 서사와 메타포/시행 자체가 사랑의 핏줄이던 시절은/다시 제본되지 않을 것이다/우리는 어떤 문장에도 유혹되지 않는다/서로 붙지 않으려는 접착제처럼/아무도 죽지 않는 시단에서/난조(亂調)는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황사바람의 어둠속에서 술잔을 기울인다/아름다운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언제나 못난 자들이 주인이 된다/피도 꿈도 절규도 없는 죽음의 암실에서/파괴된 아뜰리에, 시인은 사라졌다/옷걸이에서 시가 죽는다(「날개/옷걸이」 전문)
시인은 “현실적 언어의 빗방울과 조우하길 바라면서”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치고 말 못하는 자의 통어(通語)가 건너오길”(시인의 말) 꿈꾼다. “바람도 서로 열지 못하는 문만 굳게 잠겨 있”(「풀과 아파트」)고 “아무도 부르지 않고 아무도 붙잡지 않는/흰 침묵의”(「눈과의 문답 시절」) 도시에서 “기구한 형상의 유전자를 남기고 결국 노숙(露宿)이 된 꿈들”(「어떤 새에 대한 공포」)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뜨거운 위안을 건네주는 이 시집에서 우리는 시에 자신의 전부를 의탁하며 묵묵히 시의 길을 열어가는 시인의 오롯한 자세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김소연, 추천사)을 맞이한다. 시인은 이제 뜨거운 시심(詩心)을 가다듬으며 “더욱더 극심한 아름다운 혼돈 속에서 비애의 꽃나무로 서 있을 것이다.”(박형준, 발문)
너와 말이 통하는 순간 아픔이 왔다/통하는 것은 고통이 해소되는 일임에도/너는 하얀 뼈로 말하는가/말이 건너오다가 마른 눈 되어 사라진다/사라지는 눈을 보다가 너의 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내 몸이 불처럼 열려가는 그 말/아, 다시 한번만 그 말을 하고 싶다/그 끊어지지 않는 말/너에게까지 가는 데 번역이 필요 없는 말/마치 누군가 가까이 다가와/고자에게 북을 치는/제대로 된 말, 나를 뛰어넘어 날아가는 작은 날개의/새 같은 말, 그 눈과 발톱만 한 말/구름 속에서 빗방울이 발생하는//어느 오후 같은(「통어(通語)」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