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마를 짚어주는 서정시 본래의 감동
깊고 오랜 사랑으로 빚어낸 다정다감한 노래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유려하게 흐르는 전통적 가락과 선명한 언어로 뭉근하고 깊은 서정의 세계를 펼쳐온 신미나 시인의 첫 시집 『싱고,라고 불렀다』가 출간되었다. 등단 7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섬세하고 살가운 몸의 언어와 우리의 옛 연시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전적인 구조와 상상력, 그리고 개성적인 화법과 어투”(이홍섭, 해설)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감각적 이미지의 세계를 선보인다. 평범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감각적인 시선과 사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풍요로운 상상력, 언어를 부리는 빼어난 솜씨가 돋보이는 가운데 “농경적 삶의 배경과 지난 연대의 서정시 쓰기가 달성했던 언어와 미감의 한 진수”(김사인, 추천사)를 보여주는 단정한 시편들이 고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돌아오지 않았을 때/나는 저무는 태양 속에 있었고/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다/그때부터 그 기분을 싱고,라 불렀다//싱고는 맛도 냄새도 없지만/물이나 그림자는 아니다/싱고가 뿔 달린 고양이나/수염 난 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 있지만/아무래도 그건 싱고답지 않은 일//싱고는 너무 작아서/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풍선껌처럼 심드렁하게 부풀다가/픽 터져서 벽을 타고 흐물흐물 흘러내린다/싱고는 몇번이고 죽었다 살아난다//아버지가 화를 내면/싱고와 나는 아궁이 앞에 앉아/막대기로 재를 파헤쳐 은박지 조각을 골라냈다/그것은 은단껌을 싸고 있던 것이다//불에 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이상하게도(「싱고」 전문)
시인은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돌아오지 않았을 때” “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던 경험에서 그 상실감과 결핍감, 또는 외로움을 상징하는 “싱고”라는 자신만의 조어를 만들어낸다. 그로써 상실에서 비롯된 그 정서는 생기와 몸을 얻어, 시인 자신이면서 또한 자신이 아닌 실체가 된다. 시인은 이렇듯 삶의 체험을 지극히 민감한 감각으로 붙잡고 거기에 생생한 상상력을 더해 깊은 서정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빼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몸때가 오면 열 손톱마다 비린 낮달이 선명했다//물가를 찾는 것은 내 오랜 지병이라, 꿈속에서도 너를 탐하여 물 위에 공방(空房) 하나 부풀렸으니 알을 슬어 몸엣것 비우고 나면 귓불에 실바람 스쳐도 잔뿌리 솜털 뻗는 거라 가만 숨 고르면 몸물 오르는 소리 한 시절 너의 몸에 신전을 들였으니//참 오랜만에 당신//오실 적에는 볼 밝은 들창 열어두고 부러 오래 살을 씻겠네 문밖에서 이름 불러도 바로 꽃잎 벙글지 않으매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귀를 적셔가매 당신 정수리 위에 뒷물하는 소리로나 참방이는 뭇별들 다 품고서야 저 달의 민낯을 보겠네(「부레옥잠」 전문)
신미나의 시에는 오래된 농촌의 자연과 가난한 삶의 정경 속에서 빚어진 애잔한 서정이 배어 있다. 시인은 “몇촉의 그리움으로 환해”(「입김」)지는 지난 시절을 애틋한 마음으로 노래한다. 받아쓰기를 하다가 “자기 이름을 쓰고는 천천히 지워버렸”던 엄마(「받아쓰기」), “열일곱에 여공이 된” 큰언니(「입동」), 어느날 배가 불룩해져 돌아와 “물에 불린 생쌀을 소리 안 나게 퍼먹”던 버릇이 생긴 언니(「윤달」), “벌초하러 갔다가 예초기 날이 튕겨 즉사했다는” 삼촌(「꼬막각시의 노래」), 산달도 못 채우고 태어나 “젖니가 오르기도 전”에 홍반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다섯째 언니(「다섯째 언니」), “평생을 장사치로 떠돌다 역병으로 죽었다던” 할머니(「거스름돈」) 등 가슴 아픈 상처를 안겨주었던 불우한 가족사를 시인은 곡진한 어조로 곰곰이 되새긴다.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찌르기도 전에 너무 쉽게 부러졌다/나는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머리를 감고 논길로 나가면/볏짚 탄내가 났다/흙 속에 검은 비닐 조각이 묻혀 있었다//어디 먼 데로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동생은 눈밭에 노란 오줌 구멍을 내고/젖은 발로 잠들었다/뒤꿈치가 홍시처럼 붉었다//자꾸만 잇몸에서 피가 났고/두 손을 모아 입 냄새를 맡곤 했다//왜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고/도시로 간 언니들은 오지 않을까/가끔 뺨을 맞기도 했지만 울지 않았다//몸속 어딘가 실핏줄이 당겨지면/뒤꿈치가 조금 들릴 것만 같았다(「연」 전문)
“돌탑 쌓고 허무는 싱거운 재미만 헤아리다/엄마 없는 집으로 해를 안고 가”(「손오목에 꼭 맞는 돌」)던 유년 시절의 깊은 상실감과 상처, 그로 인한 삶의 부조리와 사랑의 결핍을 시인은 자신과 세계가 가장 밀착된 ‘몸의 언어’로, 몸의 언어가 부르는 간절한 사랑 노래로 달래고자 한다. 일찍이 삶의 비의를 깨달은 듯 “구천구곡 흐르는 물을/오늘 일만은 아닌 듯 바라보”(「손오목에 꼭 맞는 돌」)곤 했던 시인은 “너 없어도 찢어진 살 위에 새살 돋고/밑이 젖는”(「옛일」) 몸의 언어를 빌려 “눈 뜨고는 허락 없는 이생의 치정”(「화교(花轎)」) 같은 치명적 사랑을 노래하는가 하면, “당신 눈짓과 살내를 곁에 두고”서 “유산 후에 돋는 입덧 같은”(「칸나꽃 분서」) 지난 사랑을 오래오래 가슴속에 묻고서 사랑의 상실과 고통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살 무르고 눈물 모르던 때/눈 감고도 당신 얼굴을 외운 적 있었지만/한번 묶은 정이야 매듭 없을 줄 알았지만/시든 꽃밭에 나비가 풀려나는 것을 보니/내 정이 식는 길이 저러할 줄 알아요//그래도 마음 안팎에 당신 생각을 못 이기면/내 혼은 지읒 시옷 홑겹으로 날아가서/한밤중 당신 홀로 잠 깰 적에/꿈결엔 듯 눈 비비면 기척도 없이/베갯머리에 살비듬 하얗게 묻어나면/내가 다녀간 줄로 알아요, 그리 알아요(「눈 감으면 흰빛」 전문)
슬픔의 빛이 어룽지던 지난날 시인은 “오랜 지병”인 듯 “물가를 찾”(「부레옥잠」)곤 했다. 그곳에서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얻으며 “내천에 젖이 불면/간질간질 이빨 가는/어린 조약돌 몇개 씻어/주머니에 넣고 가지요”(「첫사랑」)라고 첫사랑을 노래했던 시인은 때로는 “기척할 수 없는 사랑”(「따듯한 가습기」)일지라도 훗날 “누군가 작은 주머니를 열고/나를 꼭꼭 뭉쳐서 그 안에 집어넣었으면 좋겠다”(「아쿠마」)는 소망을 품는다. 그러나 “한 사흘만/조용히 앓”(「이마」)기도 하다가 “입술이 까맣게 탄”(「상여꽃점」) 채로 꿈속에서도 간절하게 노래해왔던 사랑이 문득 ‘빈 주머니’가 되었음을 깨닫게 된 시인은 그것이 곧 “등 뒤에는 갑문(閘門)을 휘도는 소소리바람 소리뿐”(「석녀」)인 꿈 밖의 현실의 삶이요 ‘운명’임을 선선히 받아들인다.
매미가 울다가/어느 순간 뚝 그쳤다/뜨거운 길 위에서/내 영혼을 만났다//이게 네 운명이야//내 영혼은/작은 주머니를 주고 떠났다/주머니 끈을 풀자마자/뭔가가 휙 날아갔다//그때 알았다/소중한 걸 놓쳐버렸다고/다시는 찾을 수 없을 거라고//가지 마/가지 마/꿈속에서 나는 울었다//무언가 날아가버렸고/빈 주머니만 남았다(「환생」 전문)
2007년에 등단한 시인은 이제 7년 만에야 첫 시집을 엮는다. 그런 만큼 여느 시인들의 첫 시집과는 달리 작품들 사이에 시간적 거리가 있고, 내용 면에서도 진폭이 크다. 오랜 숙련을 거친 내공 또한 녹록지 않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홍섭 시인은 해설에서 “시가 원래 노래의 딸이요 노래의 아들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지금은 아득하기조차 한 시의 시원으로 데려가는 힘센 마력”을 지닌 시집이라고 끝을 맺는다. “불에 타버린 집이/불 냄새를 기억하듯이”(시인의 말) 지난 시절의 삶을 간직한 채, 요즘 젊은 시단의 시류에서 한발 비켜서서 다감한 손길로 아프고 가난한 삶의 이마를 짚어주며 서정시 본래의 감동을 자아내는 그의 시를 음미하다보면, “저마다 새로워서 결국 누구도 새롭지 않은 시대”에 “옛것이라 버리지 않고, 새것이라 혹하지 않”으면서 “덜 새로워 오히려 새로운 이 시인에 대해 뜨거운 기대를 갖는다”는 김사인 시인의 말(추천사)이 충분히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닷새면 피가 상한다고 했다//선지피 받아온 날/한쪽 귀가 흔들리는 냄비를 들고 가다/눈 쌓인 마당에 자빠졌다//돈벌레의 작은 발처럼/수백갈래로 퍼져서/흰 눈을 갉아 먹는 붉은 다리들, 붉은 이빨들//응고된다는 것은/누군가 잰걸음을 멈추고/문득 멈춰 선다는 것이다//내 머릿속에 지금 고인 것은/한사발의 붉음인데/처음 본 붉은빛은 다리를 달고 달아났다/뿔뿔이 흩어져 천만갈래 비슷한 붉기만 번지고 있다(「시」 전문)
추천사
깊은 곳에 ‘첫정’과 ‘양은 대야’와 ‘쇠죽’과 ‘늙고 지친 아버지’를 아프게 간직하고 있는 영혼이 있다. 그가 이 사이비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시쓰기로써 자신을 가누고자 할 때 가능한 몸가짐은 어떤 것이겠는가.
신미나의 시집에는 시류에 편승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이를 수 있는 어떤 안간힘과 참됨의 기척들이 갈피마다 묻어 있다.
농경적 삶의 배경과 지난 연대의 서정시 쓰기가 달성했던 언어와 미감의 한 진수가 이 젊은 시인 속에 생생히 보전되어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나아가 그 섬세함이 늙거나 닫혀 있지 않고, 오늘의 나날을 향해 물오른 채 반짝거리며 살아 있다는 것은 더 갸륵한 일이다.
이제 저마다 새로워서 결국 누구도 새롭지 않은 시대, 열매에 팔린 나머지 아무도 뿌리를 돌아보지 않는 이상한 세계로 우리는 밀려오고 말았다. 응분의 깊이를 지니지 못한 ‘새로움의 흉내’들이 도처에서 진정한 새로움을 대신한다.
그는 옛것이라 버리지 않고, 새것이라 혹하지 않는 채로, 독실하게 견뎌왔다. 손쉬운 양자택일은 정신의 나태함일 뿐 답이 아닌 것이다. 갈등을 자기 안에 품고 진득하게 견디는 일, 그 긴 진통의 자리에 스며 번진 진물 같은 것, 그쪽이 시라면 시의 길일 터이다. 이 지점이 어찌 한국어, 한국시의 고투의 한 현장이 아니겠는가.
‘비린 낮달’의 관능을 한켠에 지닌, 덜 새로워 오히려 새로운 이 시인에 대해 뜨거운 기대를 갖는 까닭이다. 김사인 시인
도서명 | 싱고,라고 불렀다 | ||
---|---|---|---|
저자/출판사 | 싱고(신미나) (지은이),창비 | ||
크기/전자책용량 | 180g | ||
쪽수 | 112쪽 | ||
제품 구성 | 상품상세참조 | ||
출간일 | 2014-09-02 | ||
목차 또는 책소개 | 상품상세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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