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계와의 불화 속에 피어난 서늘한 아름다움
등단 이후 ‘가난’과 ‘소외’의 문제를 깊이있게 파고들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잔혹한 현실을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로 그려온 최금진 시인의 세번째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이 출간되었다. ‘비극적 리얼리즘의 미학’으로 주목받았던 『황금을 찾아서』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특유의 직설적이고 냉소적인 어법으로 불행과 결핍으로 얼룩진 삶의 비애와 부조리한 세상의 살풍경한 현실을 곡진하게 그려낸다. 생의 고통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세계와의 불화 속에서 무중력의 역사를 살아내고 있는 한 ‘상처 입은 영혼’의 모습”(이재복, 해설)과 비루한 “운명의 거친 바닥을 죄다 허적여 보여주”(신용목, 추천사)는 간절한 시편들이 가슴 저미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목차
제1부
모래시계의 구조
우리 집 사랑의 내력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개구리가 우는 저녁
있었다
시베리아행 기차를 탄다
모자를 사랑하는 사람들
아가에게 데칼코마니
늙어가는 처사랑 애인에게
패배하는 습관
저녁 여덟시
아이의 기차놀이를 보며
검은 일요일
드라큘라
밤 인사
사랑의 감옥
밥을 먹으면 조금 멀쩡해진다
제2부
착한 사람
낯선 방
계단의 비밀
피뢰침
나의 손
좀머 씨는 어디로 갔을까
광주
이사 가는 날
연포탕 끓이는 여자
해변의 묘지
동백
여행자
아이와 달팽이
모래의 날들
쥐들의 나라
쇄빙선처럼 흘러간다
고닥한 혀,즐거운 이빨
너를 검색하다
마법을 믿을 때
새들은 강릉에 가서 죽다
선운사
제3부
커피를 마시는 밤
매표구에 손 한마리가 산다
여전히 ㅅ하십니까
휴일의 드라이브
어린예수
잔혹한 사랑의 연주법
개미귀신
갯장어
부활절아침에 목검3종세트를 샀다
그해 여름의 끝
혁명에게
아내가 돌을 낳았다
부족한거리,초과한거리
지구를 떠나며
칼춤
귀뚜라미와 나
그곳에 갔었다
폭탄먼지벌레
저자
최금진
출판사리뷰
나와 나 아닌 것의 투쟁, 이 대립구조가/당신과 나의 육체의 골격을 이룬다/불투명한 유리를 텁텁, 씹으며/서로가 내연의 사막을 견디고 있을 때/벗은 몸으로 증오의 더께를 가늠할 때/이 싸움은 누구든 패한다/낙타 위에서 낙타가 된 사막의 전사들/그 전쟁 같은/관계,/핥아 먹을 수 없는 성기와 등의 관계/두개의 유방과 브래지어의 관계/(…)/당신과 나는 양극단에서 만나/증거를 지우기 위해 서로를 매립한다/당신의 얼굴이 사라지고 나면/비로소 내가 한개의 무덤이 되는 구조/그 대칭의 병목에/당신과 내가 살아 있다는 추문만 가득 몰려온다(「모래시계의 구조」 부분)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불편하리만큼 삐딱하다. “말도 안 통하고, 법도 안 통하고, 울음도 안 통하는”(「칼춤」) 모순투성이 세계와의 불화 속에서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에 놓인 시인은 “불투명한 유리를 텁텁, 씹”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간다. 더불어 살아가기보다는 “믿음 소망 사랑, 어느 것 하나도 믿지 않는 얼굴로”(「밥을 먹으면 조금 멀쩡해진다」) “웃으면서, 농담하면서 때리는 사람들”(「패배하는 습관」)의 속물적 본성을 들추어내면서 시인은 “여전히 거짓말쟁이들과 건방진 녀석들이 득세하”(「드라큘라」)는 세상을 향해 “엿이나 먹고 떨어지라고, 하늘 꼭대기까지, 凸凸, 똥침!”(「피뢰침」)을 날리며 상처와 고통뿐인 참담한 현실에 맞선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뜻이지/어디 한번 덤벼보라는 얘기지/그깟 논리나 법 조항 갖고는 말하지 말자는 거지/학벌로, 돈으로, 백으로 말하는 놈들이 있으니까/씨도 안 먹히는 말로 깐죽거리는 놈들이 있으니까/폭탄으로, 식칼로, 주먹으로, 깡으로/모든 간섭과 월권으로부터 나를 지키겠다는 거지/엘리트 민주주의자, 강남좌파, 리무진 리버럴/오케이, 해볼 테면 해보라는 거지/나와서 알몸으로 한판 떠보자는 거지/네가 터지든 내가 터지든 한번 해보자는 거지/조용하며 예의 바른 웃음, 살뜰한 표준어/다 먼지로 만들어줄 테니까/뜨거운 속을 바깥으로 까뒤집으며/나는 반정부군, 나는 동학당, 나는 폭탄과 먼지의 벌레/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지/올 테면 와보라는 거지(「폭탄먼지벌레」 전문)
시인은 “하루 종일 황사가 끼”(「모래의 날들」)는 “가파른 생애”(「계단의 비밀」)에서 “사랑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비굴한 짓”(「시베리아행 기차를 탄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불투명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부정하면서도 “하루라도 사랑이 없으면 안되는 절실함”을 아는 시인은 “제발 서로 사랑을 하자”고 “세번, 네번, 열번이라도 사랑을 연설”(「우리 집 사랑의 내력」)하며 “사랑도 없이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나”(「너를 검색하다」) 하고 묻는다. “사랑이 없는 시간, 사랑이 없어도 아침이 오는 시간”(「늙어가는 첫사랑 애인에게」)은 시인에게 “내가 없는 해저에” 살거나 “바다 밑에 지느러미가 없는 새들이 기어다니는 시간”과 다를 바 없이 “혼돈과 무질서뿐”(「저녁 여덟시」)인 헛된 꿈속, “어떤 진보도 없”는 “변종의 시대”(「커피를 마시는 밤」)일 뿐이다.
혀는 제 몸을 맛보며 묘비명을 읽는다/나사를 박을 수는 있지만 핥아서 먹을 수 없는 혀/살려둘 수는 있지만 죽일 수 없는 혀/볼펜으로 명언을 쓸 수 없는 곳에 혀가 있다/그 살점으론 신조차도 배불리 애인의 말을 굽지 못할 것이다/혀는 생각을 미리 알고, 먼저 말을 삼킨다/얼굴은 혀가 파내려간 고통스러운 문신/혓바닥의 무늬는 얼굴에 옮겨붙어 화문석이 된다/혀는 언제나 먼저 몸에 도착하고, 먼저 사랑을 지운다/이빨로 맹세해,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팽이버섯처럼 생긴 어금니로 오래 씹어주면 좋겠어/피 냄새, 달 냄새, 정액 냄새, 무덤 냄새/가장 어리석은 암컷으로 널 기억할게/사랑한다면 이빨을 전부 뽑아줄 수도 있어/얼굴을 다 뜯어 먹고, 골을 빠개어 씹어도 울지 않겠어/혀가 이빨들을 훑어주면 이빨들은 웃는다/혀는 이빨의 안쪽에서 사랑을 낭송한다(「고독한 혀, 즐거운 이빨」 전문)
전망의 불빛이라곤 어디에도 비치지 않고 “피를 잔뜩 머금은 얼굴로 꽃들이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그해 여름의 끝」)는 어둡고 불안한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인은 그 이면에 존재하는 밝고 희망적인 세계로 통하는 길을 탐색한다. 자신의 내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시인은 “난 무덤, 넌 구멍, 세상엔 이제 너와 나만 남았는데”(「부활절 아침에」)라는 진술에 여실히 드러나듯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둠이 결국은 한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덤’의 어둠을 통해 ‘구멍’의 투명한 세계로 나아가면서 시인은 신생의 존재로서 다가오는 ‘아가’를 호명한다.
네 몸을 우연과 필연에 맡기기 위해/아가, 너는 홀딱 벗고 온다//네 아비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걸린 시간은/꼬박 육일, 그다음 날은 너에게도/술주정과 마스터베이션과 음악이 주어질 것이다/너에게 줄 백일 선물은/바람 빠진 달 풍선과/지구를 제 죽음으로 끌어당기는 태양의 유모차/너에게 기존의 방식은 금지되고/이후에 너는 마음껏 불행해져도 좋다/거대한 꿈을 자궁처럼 안고 잠이 든 아가/항상 주민등록증을 소지해야 한다/네 아비는 너를 사랑하므로/너도 악몽을 반복적으로 꾸다가/제칠일엔 우리 모두/고름과 정액과 혈액에 절여진 채 쉬게 되리라/너는 똥을 누기 위해/뒤뚱뒤뚱 달아나기 위해, 시간을 지우기 위해//아가, 너는 멀리 먼지의 행성에서 온다/내게로 온다, 내게로 와서 울음을 가르친다(「아가에게」 전문)
절망과 불신과 좌절뿐인 현실 속에서 “편견과 왜곡과 편력으로만 살아온/불행”한 나날을 건너온 시인은 때로 “망할 것이다, 망할 수밖에 없다, 우라질!”(「갯장어」)이라며 비관적 전망을 내비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는 가장”(「커피를 마시는 밤」)으로서의 무력함을 자책하면서 자신을 “미친놈, 샌님, 또라이, 비관주의자, 암사내, 집짐승”(「착한 사람」)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만 더 절망하”(「그해 여름의 끝」)면서 살 뿐이고, 살아 있으니 다만 그저 쓸 뿐이기에 시인은 “아름다운 것들과 인간적인 것들”(「여행자」)을 찾아서 끊임없이 여행을 떠난다. “시의 빈 젖을 물고”(시인의 말)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사랑도 없이 귀신이 되어가는 세월/시를 쓰기엔 인생이 너무 짧은 건 아닐까/(…)/침침한 눈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듯 언어를 골라내기엔/너무 늦은 저녁, 신경쇠약으로 잔뜩 찡그린 얼굴로/어제 먹다 남은 말을 마저 먹는다, 아득바득/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수도복을 입은 개미귀신들이 미사라도 보는 걸까/모래 속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울고 있다/부스스, 내 손에서 사라지는 고운 모래의 언어를 만져본다/시를 쓰기엔 너무 캄캄한 모래 구덩이에서/죽은 비유들을 해골처럼 주렁주렁 꿰어 목에 걸고/그중 입맛에 맞을 것 같은 시 한줄을 맛보다가/퉤, 하고 뱉어내는, 당최 입맛이 없는 개미귀신 한마리/폐업신고라도 해야 할까(「개미귀신」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