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세월과 기품이 서린 순정하고 강인한 시
여린 듯하면서도 강인한 시정신으로 지난 반세기 한국 시단을 오롯이 지켜온 ‘문단의 작은 거인’ 민영 시인이 올해 팔순을 맞아 펴낸 아홉번째 시집이다.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은 지나온 삶을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아스라한 기억 속의 시간들을 회상하며 자신에 대한 치열한 냉엄성과 이웃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겹치는, 냉엄과 온정이 공존하는 아늑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한평생 오로지 시의 외길을 걸어온 노시인의 묵직한 연륜과 단아한 기품이 서린 정갈한 시편들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언어와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에 실려 진실한 삶의 의미와 자연의 섭리를 일깨우는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
목차
제1부
이 가을에
바람의 길
새벽에 눈을 뜨면
가을날
봄을 기다리며
새의 길
돌산에서
출항의 꿈
격양가
늦가을 단풍
冬至의 시
모기에 관한 단상
가을 나무
겨울 초성리에서
겨울 강에서
제2부
매화를 기다리며
소야곡
비무장지대에서
하늘나리꽃
비 오는 날
다시, 이 가을에
호궁 소리
흔적
갈대밭에서
매지리에서 쑥을 캐며
평사리에서
?年
별꽃
기차를 잘못 내리고
소록도에서
제3부
부활
이름 모르는 새싹에게
꿈에 본 어머니에게
봄, 중랑천에서
목백일홍
봄소식
멧비둘기 소리
제주 시편
은행나무의 꿈
늦가을 햇빛
해 저무는 거리에서
햇볕 모으기
잠 안 오는 밤에
바리소에서
매미
제4부
꿈
애가
大雪의 시
창밖으로 동부 간선도로를 바라보며
고속도로 위에서
달에 관한 명상
이카로스의 귀환
여명
독도
북명의 바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1946년 봄 만주 화룡역에서
1946년 초여름 두만강에서
겨울 들판에서
해설 김응교
시인의 말
저자
민영
출판사리뷰
세월과 기품이 서린 순정하고 강인한 시
여린 듯하면서도 강인한 시정신으로 지난 반세기 한국 시단을 오롯이 지켜온 ‘문단의 작은 거인’ 민영 시인이 올해 팔순을 맞아 아홉번째 시집 『새벽에 눈을 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를 펴냈다. 『방울새에게』(실천문학사 2007)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어느덧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은 지나온 삶을 겸허한 마음으로 되돌아보고 아스라한 기억 속의 시간들을 회상하며 “자신에 대한 치열한 냉엄성과 이웃을 향한 무한한 애정이 겹치는, 냉엄과 온정이 공존하는”(김응교, 해설) 아늑한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한평생 오로지 시의 외길을 걸어온 노시인의 묵직한 연륜과 단아한 기품이 서린 정갈한 시편들이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언어와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에 실려 진실한 삶의 의미와 자연의 섭리를 일깨우는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꽃도 철 따라 피지 않으리라/그리고 구름도/嶺 넘어 오지는 않으리라//나 혼자 남으리라/남아서 깊은 산 산새처럼/노래를 부르리라/긴 밤을 새워 편지를 쓰리라(「序詩」 전문)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시인은 실향민으로서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몽매간에 도 잊지 못할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기며 시인은 “저 멀리/북만주 땅에 누워 계”신 아버지와 “저 산 너머/용인 땅에 누워”(「다시, 이 가을에」) 계신 어머니를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비록 “육신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고요히 감은 영혼의 눈”(「꿈」)에는 또렷이 떠오르는 고향 마을을 애달픈 마음으로 노래한다. 또한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인은 또 하나의 고향인 그곳, “슬픈 아비가//해란강 언덕 위 흙 속에 누워 있”는 “그 북간도의 화전 마을”(「새벽에 눈을 뜨면」)을 간절히 그리며 또다른 향수에 젖기도 한다.
새벽에 눈을 뜨면/가야 할 곳이 있다./밤새도록 뒤척이며 잠 이루지 못하다/새벽에 눈뜨면 가야 할 곳이 있다./울타리 밖에 내리는 파리한 눈,/눈송이를 후려치는 아라사 바람이/수천마리의 양처럼 떼지어 달려와서/왕소나무 숲을 뒤흔드는 망각의 땅,/고구려와 발해의 옛 터전을/새벽에 눈을 뜨면 찾아가야 한다.//(…)//장백산 올라가는 멧등길에/하얗게 피어 있던 백도라지 꽃,/그 북간도의 화전 마을을/새벽에 눈을 뜨면 찾아가야 한다./더 늦기 전에!(「새벽에 눈을 뜨면」 부분)
잃어버린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속에는 때로 “무의식의 영사막 위에/오래전에 떠난 고향 마을이 나타나고,/숨바꼭질을 하던 옛 동무들이/요지경처럼 비”(「잠 안 오는 밤에」)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로 갈라지고 “병들어 만신창이 된 이 국토”(「별꽃」)의 반쪽에서 아렴풋이 고향을 건너다보고 “기다림에 지친 보고 싶은 얼굴들”(「갈대밭에서」)을 호명하며 “얘들아, 다 어디 있니,/밥은 먹었니,/아프지는 않니?//보고 싶구나!”(「비무장지대에서」) 안부를 묻는 시인의 공허한 외침은 사뭇 애절하기만 하다. 시인은 또 상처로 얼룩진 “거칠고 사나운 역사”(「이 가을에」)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땅을 다녀간 수많은 순례자들은/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겨울 들판에서」)졌음을 탄식하며 막막한 가슴을 애써 달래기도 한다.
가을이 깊다./이역만리 먼 곳에서 날아온 새들이/갈대밭에 내려앉아 지친 몸을 쉬고,/이슬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이/불어오는 바람에 깃을 여민다.//생각해보아라/얼마나 모진 세월을 살아왔는지,/이제 너에게 남겨진 일은/그 거칠고 사나운 역사 속에서/말없이 떠난 이들을 추념하는 일이다.//아,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이냐/끝까지 올곧고 아름다웠던 젊은이들,/시월 상달 이 눈부신/서릿발 치는 푸른 날빛 속에서/어디로 가야 만나볼 수 있단 말이냐!(「이 가을에」 전문)
온화하기 그지없는 노시인의 눈길은 비단 까마득히 사라져가는 과거의 시간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 가난하고 소외받은 삶의 풍경은 변함없이 시인의 관심 대상이다. 시인은 “눅눅하고 쓸쓸한 지하 단칸 셋방”(「겨울 강에서」)에서 폐지를 주워 파는 노부모와 살아가는 아이들을 연민의 마음으로 감싸안는가 하면, “술 한잔 마시고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지하철역을 찾아가는 노숙자”(「바람의 길」)들이며 “살아온 날의 절반을 또다시 집 없이 헤매야 할”(「해 저무는 거리에서」) 철거민들처럼 “작고 하찮은 목숨”(「별꽃」)을 살아가는 이웃들에게 따듯한 눈길을 건넨다. 그런 한편 “새파란 젊음이 스러진 자리에는/검은 재만 남고, 몸 안에서 출렁이던/생명의 물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모기에 관한 단상」)는 그 자신은 겸허한 자세로 삶을 받아들이며 “눈부신 여명을 맞이하기 위해”(「여명」) “출항의 깃발을 높이 올”(「출항의 꿈」)리는 희망의 불꽃을 지핀다.
이제부터 나는/햇볕을 사랑하기로 했네./그 옛날, 만주에 있는 우리 집 토담 밑에서/아편쟁이 중국 노인이/때 묻은 저고리 풀어 헤치고/뼈만 남은 앙상한 가슴에/햇볕을 그러모으며 졸고 있었듯이.//그러기에 눈 어둡고/고개 휘는 시절 앞에 선 나도/볼품없이 여윈 몸뚱어리에/햇볕을 조금씩 모아 담기로 했네./하늘에 매달린 용광로에서/하느님이 내려주시는 생명의 불을/다소곳이 모아 간직하기 위해!//그럴 수 있는 날이/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햇볕 모으기」 전문)
문단의 원로 시인으로서 근엄한 시인 정신을 지켜온 민영 시인은 스물다섯살에 미당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래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줄곧 올곧은 서정시인의 길을 걸어왔다. 사람의 길도 문학의 길도 꼭 한편의 아름다운 시처럼 되기를 꿈꾸며 “온몸으로 노래하는 종달새처럼”(「가을 나무」) 혼신의 힘을 다해 시를 쓰리라던 시인은 이제 황혼이 깃든 여든 고개에 이르렀다. 시 쓰는 일을 “유일한 노동, 유일한 기쁨”으로 삼으며 “참으로 아름다운 시 한편을 쓰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시인의 말)을 간직한 채 “난세를 참고 견디는 선비”(「冬至의 시」)의 정신을 가다듬으며 살아온 노시인의 순정한 마음과 고결한 정신을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예전에 읽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에/「만년」이란 단편이 있었다./다자이 오사무는 그 만년이 오기도 전에/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지만,/죽을 때 한 여자를 가슴에 안고/동반 자살을 했다고 한다./최근에 낸 시집 뒷글에서 도종환 시인은/내 시를 ‘만년시’란 낯선 이름으로 불렀으나,/나는 과연 내가 만년이란 정거장에 도달했는지/지금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내게는 아직 같이 죽을 여자가 없고/같이 죽을 여자가 없는 만년은 쓸쓸하다./해 저문 바닷가에서 물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내게도 하루속히 그날이 오기를 기다린다.(「晩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