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시대와 사유와 음악을 넘나드는 특별한 시간
시.소설.평론 등 문학 장르 외에도 역사.음악.미술.인문 등 문화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전방위적 글쓰기를 해온 김정환 시인의 신작 시집. 최근 4년간(2007~2010)에 걸쳐 완결한 ‘전작 장시 3부작’(『드러남과 드러냄』 『거룩한 줄넘기』 『유년의 시놉시스』)을 빼면 『레닌의 노래』(2006)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지나온 세월, 20세기의 시대정신에 대한 성찰과 모색을 통하여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다정하고 슬프고 강건한 아포리즘”(진은영, 추천사)의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집 전반에 걸쳐 선명하게 드러나는 폭넓은 지식의 깊이와, 특히 ‘늙은 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유가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연작시 「다시 읽는 『지구 위의 생물』」과 「전집의 역전」 등에서 보이는 독특한 형식과 행갈이의 파격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목차
서시
제1부
독수리
귀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
황인숙 중부식자재 할인마트 가격
조각의 언어
국광(國光)과 정전(停電)
Amazon.com 마분-골판지 포장 박스
장모 승천
수박색 샤프펜슬
제2부
목제가면
양수겸장
여성 모델의 언어
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후
다시 읽는 『지구 위의 생물』
늑대 동거
선물과 명작
서울특별시 용산 4지구, 남일당, 355일, 쉿, 쉿, 바람 소리
제3부
음악의 세계사 그후
고향 친구
길을 감싸안다
공백의 횡재
봄비
그 여자네 집
제4부
전집의 역전
생가
한강을 건너며
新宿. 신주쿠, 밀주
매혹
보유: 착한 윤리와 시의 시사(時事)
해설|황현산
시인의 말
저자
김정환
출판사리뷰
시대와 사유와 음악을 넘나드는 특별한 시간
시.소설.평론 등 문학 장르 외에도 역사.음악.미술.인문 등 문화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다산성의 상징’이라 불릴 만큼 전방위적 글쓰기를 해온 김정환 시인의 신작 시집 『거푸집 연주』가 출간되었다. 최근 4년간(2007~2010)에 걸쳐 완결한 ‘전작 장시 3부작’(『드러남과 드러냄』 『거룩한 줄넘기』 『유년의 시놉시스』)을 빼면 『레닌의 노래』(2006)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지나온 세월, 20세기의 시대정신에 대한 성찰과 모색을 통하여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다정하고 슬프고 강건한 아포리즘”(진은영, 추천사)의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시집 전반에 걸쳐 선명하게 드러나는 폭넓은 지식의 깊이와, 특히 ‘늙은 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유가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연작시 「다시 읽는 『지구 위의 생물』」과 「전집의 역전」 등에서 보이는 독특한 형식과 행갈이의 파격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이제는 너를 향한 절규 아니라/이제는 목전의 전율의/획일적 이빨 아니라/이제는 울부짖는 환호하는/발산 아니라 웃는 죽음의 입 아니라 해방 아니라/너는 네가 아니라/내 고막에 묻은 작년 매미 울음의/전면적, 거울 아니라/나의 몸 드러낼 뿐 아니라, 연주가 작곡뿐 아니라/음악의 몸일 때/피아노를 치지 않고 피아노가 치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내 귀로 들어오지 않고 내 귀가 들어오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너는 나의/연주다.//민주주의여.(「서시」 전문)
평론가 황현산이 해설 서두에서 “죽음의 시집”이라고 말했듯이, 이번 시집에서는 유독 ‘죽음’에 대한 시인의 오랜 성찰이 두드러진다. 연작시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을 비롯하여 「국광(國光)과 정전(停電)」 「장모 승천」이 그러하며, 연작시 「전집의 역전」에서 불러내는 인물들도 아일랜드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를 제외하면 로르카, 아흐마토바, 실비아 플라스, 박완서, 김근태, 김대중 등 모두 저세상 사람들이다. 다른 시라고 해서 죽음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시편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진다. 시인은 특히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에서 ‘모기’ ‘거미’ ‘간장게장 게’의 입을 통해, 또 ‘LP 음반’ ‘수의 역사’ ‘매김씨’ ‘늙은 몸’에 비춰 죽음의 여러 양상들을 묘사하며 그 자신의 죽음을 “일종의 구원처럼” 혹은 “가장 신뢰해야 할 전망처럼 암시”(황현산, 해설)하면서 “죽음을 능가하는 죽음”(「여성 모델의 언어」)을 통해 오히려 삶의 명징성을 깨닫는다. 시인은 또 “죽음이란 살아온 생 거슬러/걸어가는 것”(「선물과 명작」)이라고 말한다.
늙은 몸은 간간이 늙은 몸속이다. 어떻게 보면/투명한, 이게 무슨 소리지? 어떻게 보면 무덤이라는/소리.아직 광경은 생화학을 주재하는 두 손/(누구?). 육화인 성교, 그러나 무덤이라는/소리, 떨림의 몸. 아직 광경은 자연과 추상이/평면 속으로 색의 몸을 섞는/이야기. 그러나 죽음이라는/소리는 말씀의 집인 고요. /(…)/그러나/죽음이라는/소리는/거룩한 형식./늙은 몸은 번번이 늙은 몸속이고/그게 소리다./내 몸은 돌과 청동, 그리고 무쇠/상상력의/소리인 유리/의 소리.(「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 중 ‘7. 늙은 몸’ 부분)
세칭 ‘전방위 예술가’로서 특히 클래식 평론가로도 정평이 나 있는 김정환 시인에게 ‘음악’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종합”(해설)이자 “만국 공통 언어”(「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후」)로서 포괄적인 상징어로 쓰인다. “어둠과 음악이 서로를/육체적으로 탐하는 죽음”(「전집의 역전」)에서 드러나듯 시인은 죽음이 음악으로, 음악이 죽음으로 느껴지는 어떠한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내 이빨은 하루 종일 달그락대며 바야흐로/무너지는 중이지만/내 귀의 나이는 뭔가 긁히는 잡음까지 걸러낸다”는 시인은 “‘음반=음악=평면=세계’”(「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로 보기도 한다. 시 「음악의 세계사 그후」에서 시인은 고전음악의 거장들의 생애와 그 뒷이야기를 한편 한편의 시로 형상화하여 연주하듯 들려준다.
경건의 광포를 평생 음악의 근면으로 다스리려 했던/나의 연습이 나의 신약이었다./들판에 낭자한 주검들이 예수 죽음과도 같이/내 음악의/형식을 이루었다. 어디까지가 생명이 흔들리는/형식인지 끝까지 가보았다./육체 예수는 없음이 있음의 유일한 증거였으니/내가 본 것은 검음이 무한 햇빛 먹고 남빛으로/무르익는 순간, 소리의 동굴이 소리의 건축으로/건축이 문법으로 문법이 사전으로 가는/소리에서 태어난 언어가 더 분명하고 영롱한 소리인/순간이었다. 그리고/경건은 더욱 광포하다.(「음악의 세계사 그후」 중 ‘5. 바흐라는 3백년’ 부분)
김정환 시인은 또 번역가로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셰익스피어 전집』(40권)을 번역 중인 시인은 최근에는 5개 언어권 12명 시인의 시전집을 혼자서 완역하는 작업에 돌입하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발상을 얻은 시 「전집의 역전」에서 시인은 “폴란드어 낱말/하나하나 번역하다가 음악과 미술이 만국 공통 언어이듯/시는 만국 언어 공통의 문법”(「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후」)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세계적인 시인들의 위대한 시정신과 그들의 전생애에 걸친 삶과 고뇌의 흔적들을 선명한 이미지와 감성의 언어로 되살려낸다. 아울러 “역사가 내내 비명의 참사인 것에” “평생 울었”던 김근태, “평화와 희망의 이름” 김대중, 죽어서도 “저승의 슬하 쪽을/더 배려하려는 내색으로 유구”한 박완서, “부유한 집 자제로 가산을 가난한 친구들 시집 출판 비용으로/물 쓰듯” 썼던 강태열(시인) 등을 추억하며 기린다.
살아 있는, 일흔 넘은 아일랜드 시인의 이제껏 시집/열두권을 번역, 한권으로 묶은 책이다. 겉 하얗고 단단하다. 누구는/이글루 벽돌 한장이라 했다. 시 한편 생활의 응축이니 시집 한권/그간 생애의 응축인데 어떻게 응축되지, 생활보다 더 뭉툭하게?/이 위험한 순간, 한권 전집은 기다렸다는 듯 사태를 역전시킨다. 그/전집은 물질이다./시인도 번역도 생애가 물질의 물질성으로 빛난다.(「전집의 역전」 중 ‘1. 셰이머스 히니, 물질’ 부분)
뭐니 뭐니 해도 탁월한 시인이자 문화운동가로서 시대의 불의에 맞서는 결의를 다지며 변혁의 시대를 기관차처럼 쉬지 않고 내달려온 시인은 올해로 이순의 나이에 이르렀다. 그러나 시인은 “나는 늙지 않았다. 한달을 채 못 넘기고 또/부고를 받는 나이에 달했을 뿐”(「수박색 샤프펜슬」)이라고 말한다. “우린 갈수록 천박해지는/시대를 살밖에 없다는”(「봄비」) 냉엄한 현실 인식 속에서 시인은 “‘우리’ 없는 우리‘나라’의/그리고 우리, 나라의/광채/의 허상”(「수박색 샤프펜슬」)을 직시한다. “걱정이 생의 영역 아니라 생이 걱정의 영역인 것처럼”(「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후」) 걱정이 밀려오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시인은 이제 “제 몸에 귀를 기울이”(「귀」)며 “숭배보다 더한” “어떤 떠받침”(「독수리」)을 제 안에 끌어들이고 지난 시절의 좌절된 희망과 그 역사의 엄숙함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새로운 전망의 ‘거푸집’을 ‘디자인’하고 ‘연주’한다.
잘난 사람들은 모른다/내 날개가 바로 어깻죽지의/운명이라는 것을./날아오르는 날개는 없다./내 무게보다 더 무거운 어떤/떠받침이 있을 뿐./숭배보다 더한/그 무엇이 있을 뿐./내 날개가 느끼는 것은/유가족 집단의, 집단적인/위의(威儀)./산 귀 속 슬픈 노래/죽은 귀 속으로/살아남는 선율의./그 사이 벽의./그 벽인 나의./(…)/삶이 삶이기 위하여 때로는/죽음의 껍질이 되고/죽음이 죽음이기 위하여 때로는/가장 떨리는 그/X-레이를/나는 안다.(「독수리」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