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자유롭고 풍성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이며 2000년대 한국 시단을 이끌어갈 젊은 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중일 시인의 두번째 시집.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감각적인 언어와 현란한 이미지가 눈부신 시편들을 선보인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어우러진 가운데, 이질적인 소재를 포개어 새로운 이미지를 끌어내는 시적 상상력이 단연 돋보인다.
시인은 현실을 재현하는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탄탄한 비유를 곁들인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여 환상적 분위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통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어법을 구사하는 시는 알 듯 모를 듯 모호하면서도 잘 읽히는 맛이 있다. 독자들은 이 젊은 시인이 “낙뢰가 구름을 치듯” “고독의 긴 손가락으로 적막을 가르며 드럼을 단 한번 격렬하게 내려”치며 활짝 펼쳐 보이는 다채롭고 발랄한 상상력과 감각의 세계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목차
제1부
물곡
새벽의 후렴
아스트롤라베
고독의 셔츠
구름의 주름
새들의 직업
불면의 스케치
재의 텔레비전
비의 자화상
커튼콜
초의 시간
까만 편지지 하얀 연필
이와 오
완벽한 원
bed&bird
사구의 달이 자라는 겨를
고양이는 새의 그림자
아무튼 씨 미안해요
깊은 밤의 무야 씨 그리고 보트캣
제2부
맹견
대망(大妄)
구름의 곁
잘 지내고 있어요
늙은 역사와의 인터뷰
거짓된 눈물의 역사
눈물이라는 긴 털
바람으로부터의 보호
우리 귓속에서의 거짓 시절
황색 날개를 달고 우리는
환절기에 찾아온 변성기
체온의 탄생
기념일
생일날의 부비트랩
저녁의 끝으로 내몰리 개그우먼들
이해해요
품
유빙들의 고열
가신들의 결혼식
제3부
중력이란 이름의 신발주머니
천문학자 안의 밖에 대한 매우 단순한 감정
태양에 대한 나의 고심
외과의사 늘의 긴 그림자
건강
무적의 스파링 파트너
날개들의 추격전
욕조 속의 낙조
천사
복화술사
튤립
十二총잡이들의 몽따주
내 꿈은 불면이 휩쓸고 간 폐허
식어버린 마음
침대 이야기
벽돌의 시간
작별의 먼지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
해설│조강석
시인의 말
저자
김중일
출판사리뷰
고독한 세계를 가로지르는 매혹적인 언어와 상상력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자유롭고 풍성한 상상력이 넘쳐나는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이며 2000년대 한국 시단을 이끌어갈 젊은 시인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중일 시인의 두번째 시집 『아무튼 씨 미안해요』가 출간되었다. 첫 시집 『국경꽃집』(창비 2007)에서 “이국적 신비와 몽환적 우수가 떠도는” “신비롭고 환상적인 초현실의 세계”(강계숙)를 보여주었던 시인은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감각적인 언어와 현란한 이미지가 눈부신 시편들을 선보인다. 사물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시선과 세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어우러진 가운데, 이질적인 소재를 포개어 새로운 이미지를 끌어내는 시적 상상력이 단연 돋보인다.
김중일 시인은 현실을 재현하는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탄탄한 비유를 곁들인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여 환상적 분위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현실과 가공의 4차원적 공감각 세계에서 시인의 상상력이 발동하는 지점은 으레 ‘자정’의 시간이다. “이번 생의 나와 다음 생의 내가/우리가 정말 하나가 되어/서로를 그림자처럼 깔고 덮고 눕는”(「초의 시간」) 이 밤의 경계에서 “반드시 나는 밤에 죽을 것이다”(「아스트롤라베」)라고 선언하는 시인은 “가없는 밤의 적소에 남겨진, 가엾은 이들에게로 졸음처럼 흘러”(「생일날의 부비트랩」)간다.
거대한 태풍 ‘불면’이 1899년 이후 니이가따현 쪽으로/하루에 일 센티미터씩 북상 중이다/북상 중인 달팽이……/태풍의 이동경로를 따라 장거리주자인 나는/불면의 중심에 가건물로 세워진 재해대책본부가 있는/결승점을 향해 오늘 밤도 달리는 중이다//누군가 내게 묻는다/이봐, 힘들게 너는 왜 하필 지금 잠을 청하려 하지?//오늘 밤엔 재밌는 일도 많은데/나는 적요한 불면의 눈을 향해 줄곧 달리는 중이다/나는 돌풍이 휘몰아치는 불면 속에서/팥죽 같은 잠을 뚝뚝 흘린다(「내 꿈은 불면이 휩쓸고 간 폐허」 부분)
몽상과 인식의 경계에서 여전히 “미농지보다 얇은 꿈속을 달”(「내 꿈은 불면이 휩쓸고 간 폐허」)리는 시인은 한편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진단한다. “불면증 환자의 낡은 옷장, 몽유병 환자의 커다란 신발장”이 버려져 있고 “불면증과 몽유병은 집 안에 따뜻하게 잠들어 있”(「까만 편지지 하얀 연필」)는 이 세계를 거대한 병동으로 여기는 시인은 “서울 한가운데의 폐건물 옥상 위로, 점거농성 중인 불길들”이 솟고 “물대포처럼 커다란 구렁이가 사람들의 허리를 으스러뜨릴 듯 휘감”(「구름의 곁」)는 끔찍한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이라는 뼈아픈 진단을 내린다.
우연히/아름답게 찢어진 커튼처럼 폭우가 내리고/일만삼천백사십번째로 간이 진료실을 방문했을 때/(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수련의의 피곤한 눈꺼풀을 열고 손 흔들었건만/내 손에 만져지고, 내 손을 붙잡고 흔드는 건/단지 비바람뿐이었습니다//피가 침에 섞이듯/자다 깨 겸연쩍은 그의 웃음이 미명에 뒤섞였습니다/어젯밤의 토사물이 말라붙은 변기 같은 창문에는/인류가 동시에 뱉어놓은 가래침처럼/추접스러운 구름이 가득했습니다/그것은 이야기가 반복 재생되는 레코드의 노이즈 같았습니다//기적이군요! 이제 괜찮습니다 (「폭설의 반대편 폭우의 건너편」 부분)
그리하여 상상과 비유는 고통스러운 세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시인의 무기가 된다. 시인의 별스러운 시적 감각은 아수라장 같은 현실의 복판에서 눈 돌리지 않고 펼쳐지는바, 그렇게 사유와 언어로 현실에 맞서야 하는 시인에겐 필연적으로 고독이 찾아온다.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 고독 속에서 사유하고 다시 그 고독 아래서 세계를 재발견하는 순환의 고리는, 김중일의 시가 발현되는 기저인 듯하다.
밤. 우리 형제는 한이불을 덮고, 서로의 발뒤꿈치를 쓰다듬었다. 잠든 마을의 길고 피곤한 꿈속에서 역사의 움직임이 느껴졌다./형! 그를 불렀으나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새까만 털과 콩알 같은 눈동자의 작은 개처럼 나는 형의 발등을 핥았다. 거실에는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제목의 판화 한점이 혼자 훌쩍이며 내걸려 있다. (「거짓된 눈물의 역사」 부분)
언어의 연금술사라 할 만큼 언어감각이 탁월한 시인은 장난감을 다루듯 ‘말’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논다. “주둥이 대신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오리는 융커튼 같은 폭설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오리(五里) 앞의 강을 보고 있었다”(「새벽의 후렴」), “마치 마차가, 마침 마차가, 마지막 마차가, 막차가”(「고독의 셔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처럼 불가피하게”(「새들의 직업」), “코끼리 코알라 코뿔소 코가 시큰한 채널들”(「재의 텔레비전」), “나는 희다 검은 자(者), 당신은 검다 흰 자. 흰 자 위에 검은 자, 검은 자 위에 흰 자, 우리는 걸핏하면 포개졌고, 우리의 희고 어두운 표정”(「욕조 속의 낙조」) 등에서 보듯 적재적소에 펀(pun)을 사용함으로써 참신한 시적 효과를 누리기도 한다.
유행 지난 면사포처럼 구름의 주름을 얼굴에 잔뜩 뒤집어쓰고도 아름다워지려나 점점 아름다워지려나 내 사랑, 아름다워 이제 지려나./(…)//구름의 주름 속에서 우리 잃어버렸던 여름을/구름의 주름 속에서 우리 잃어버렸던 이름을/구름의 주름 속에서 우리 잃어버렸던 시름을(「구름의 주름」 부분)
전통 서정시와는 사뭇 다른 어법을 구사하는 김중일의 시는 알 듯 모를 듯 모호하면서도 잘 읽히는 맛이 있다. 우리는 이 젊은 시인이 “낙뢰가 구름을 치듯” “고독의 긴 손가락으로 적막을 가르며 드럼을 단 한번 격렬하게 내려”(「비의 자화상」)치며 활짝 펼쳐 보이는 다채롭고 발랄한 상상력과 감각의 세계로 들어가봄직하다.
나는 물고기였으니//어머니가 살집을 다 발라내시면 드러나는/ 잃어버렸던 앙상한 열쇠였으니//물속에서 온몸을 비틀어/물의 금고를 열었던/열쇠의 형상을 한 물고기였으니//금고 속엔 물거품과 백지만 가득했으니//몸속에 꽁꽁 숨겨온 자물통 같은/어머니 자궁 속에 꽂힌,/한 늙은 극작가가 불행 속에 쓴/희극의 첫 막을 열었던 열쇠였으니//그리하여 여기 발밑에 버려진/오래된 극장의 열쇠였으니(「물고기」 전문)
시인은 표제작 「아무튼 씨 미안해요」에서 “아무튼 총알을 맞고도 목숨이 붙어 있다면 그때부턴 식물의 시간을 사는 겁니다. 아무튼 덤 같은 거죠.”라고 썼다. 자못 낮은 저 목소리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의 사유와 언어로 세계를 재구성할 가능성을 부른다. 시인은 “프레스에 잘린 새끼손가락을 땅에 묻으니 하룻밤 사이에 무성한 나무로”(「이해해요」) 자라나는 광경을 상상한다. 끝없이 남루해 보이는 세계이지만 바로 한 겹 아래에 기적과 같은 반전이 숨겨져 있다면, 지금은 ‘아무튼’ 그저 살아낼 뿐인 삶이라도 충분히 아름답고 풍성할 수 있는 게 아닐지. 오늘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세포가 저마다 색깔을 얻는”(「바람으로부터의 보호」)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