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명철 시인의 첫시집. 등단 당시 호평을 받았던 시인 특유의 활달한 상상력과 관찰력이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는 섬세한 시선으로 우리 삶의 일면들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이를 하나의 단면도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일상의 풍경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어법이 바로 그만의 장기이다.
경계를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는 시인은 그 안팎의 낙차를 몸소 겪는 것이 시인의 현실감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는 듯하다. 그의 시는 쉽사리 비상하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럽게 내려앉으며 가파른 삶의 진실과 마주한다. 시인은 무심한 듯 담담한 언어로 이 진실의 풍경들을 소묘하지만, 거칠고 무거운 생활의 진실들은 그 층위를 잃지 않은 채 시인의 언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첫시집에서 그가 보여준 치열하고 고유한 문법이 앞으로 어떤 행보로 이어질지 기대가 된다.
목차
제1부
고요한 균열
수직으로 막 착륙하는 헬리콥터의 자세로
어긋나는 풍경
오체투지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벽
경계를 걷다보면 선이 지워진 곳에 이를 때가 있다
바람 앞에 서서, 말총 같은
파종
살아서 별이 되지 못하거든
절애
어둠본색 1
기항
유감(有感)
눈을 베이다
죽어 별이 되지 못하거든
제2부
침묵
뿌리가 자라는 이유
흐린 날의 성좌
탄탄대로?
생각의 기원
파도타기
하늘에 낚이다
암병동
고함(高喊)
버저비터
기화
어둠본색2
꽃, 목을 드리우다
제3부
간절도(懇切度)
무영(舞泳)
노을이 조금 흔들릴 때가 있지
겨울 악어
하늘 맨 끝으로
함정
아래, 아래, 뒤에, 당신의 맨홀
책갈피의 꽃잎처럼
파도타기2
만 이십년 하루치의 고독
목신의 오후
썰물의 소리
폭염
육교 위, 천공(穿孔)
Heaven Tree
제4부
동천(動天)
한여름에 자작나무 껍질이 터졌다
당신의 전개도
역비행
루드베키아의 인과율
틈
바람[願]에게
자상(自傷)
바람이 되돌아설 때
땡볕
적
백기를 꽂겠어요
돌파
부리와 뿌리
해설|유성호
시인의 말
저자
김명철
출판사리뷰
경쾌한 문법에 담은 삶의 이면과 진실
2006년 실천문학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명철 시인의 첫시집 『짧게, 카운터펀치』가 출간되었다. 삶의 불안과 고독을 긴장감 있는 언어로 밀도있게 응축한 이번 시집에는 시인이 그간 써온 57편의 시가 담겼다. 등단 당시 호평을 받았던 시인 특유의 활달한 상상력과 관찰력이 그의 첫시집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일상의 풍경을 포착하는 예리한 시선,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어법이 바로 그만의 장기이다.
그는 섬세한 시선으로 우리 삶의 일면들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이를 하나의 단면도로 우리 앞에 제시한다. 어느 한낮의 공원에서, 거리에서 또는 전철에서의 사건과 풍경들을 다양한 감각으로 붙잡아 구체적인 언어로 그것을 빚어낸다. 재치있고 경쾌하게 언어를 다루는 시인의 솜씨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진동하는 핸드폰을 따라 호주머니에서 툭, / 동전 하나가 떨어진다. / 여보세요, 어디쯤이에요? 이제 막, / 한쪽으로만 몰두해 있던 승객들의 시선이 / 동전으로 향하고, 출발하는 중이야. / 비틀거리던 동전이 / 가속도를 받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정해진 자신의 길을 / 제대로 달리기 시작한다. / (…) / 왼쪽 사람들은 오른쪽 면으로 오른쪽은 뒤쪽으로도 눈을 돌리지만 / 굴러가는 쪽이 언제나 앞쪽이야.(「탄탄대로?」부분)
그가 포착한 우리 주변의 풍경들은 일견 고단하고 피로하며 따분하지만, 다만 공허함이나 허무함 같은 상투적인 감상으로 끝나지 않을 깊은 공감을 담고 있다. 그의 언어는 생활에 밀착되어 있으며, 그의 사유는 이 생활의 끝없는 바닥까지 집요하게 가닿는다. 신인답지 않은 탄탄한 내공이 여기에서 빛을 발한다. 시인은 한편 한편 이어지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일종의 스케치처럼 단발적으로 그려내지만, 그 기저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삶의 무거운 서사들을 불러들여 기꺼이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밀짚모자를 쓴 노인이 폐지 실은 수레를 끌고 있었다 / 생활이 나를 윽박질렀으나 / 승부를 낼 수 없는 대상이라고 스쳐 생각했다 / 누군가 먹다 버린 천도복숭아가 슬리퍼에 밟혔다 // 고개 숙인 채 힘겹게 수레를 끌던 그가 멈춰서더니 / 나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 나와 내 생활이 조금 허둥댔다 // 무게가 뒤쪽으로 쏠린 수레의 손잡이를 잡고 / 새까맣게 탄 그가 내 오른편을 뜻밖인 듯 보고 있었다 // 작은 공원을 가득 채운 만개한 나리꽃들! / 주름진 그의 입과 눈이 와아 벌어지고 있었다 // 피리소리와 / 수레와 노인이 꽃들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나와 나의 생활이 천도복숭아에 붙어 있는 개미떼 같았다(「파종」 부분)
시인이 ‘풍경’을 그리는 행위는 필연적이며, 그것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내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고요한 균열」)다고 시집의 초반부에서 스스로 고백한 화자는 그렇게 기울어진 시선으로 끊임없이 “안팎의 풍경”을 보고 그 무게를 감당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임을 일찌감치 깨닫는다. “빈틈없는 생활”을 하고 “방심하지 않는 자”도 ‘틈’에게 습격당한다. “마지막 일전을 치를 수도 투항할 수도 없으”니(「틈」) ‘틈’을 온전히 품고 ‘틈’으로 ‘틈’의 안팎을 바라보는 행위, 즉 기울어진 눈으로 사물과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을 시로 옮기는 행위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햇살이 자랐나요 벌써 늙었나요 / 난 발목을 삘 때 눈도 같이 삐었어요 그래요 / 한 친구의 나른한 남루와 / 또 한 친구의 눈부신 돌파를 / 모른 척할 수 없었지요 / 나는 내 안팎의 풍경에 묶였어요 // (…) /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소름도 돋지 않는 데자뷰 / 아늑한 천변풍경이에요 / 그런데 당신, 메스는 어디에 두었나요(「어긋나는 풍경」 부분)
평론가 유성호는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 “예술은 현존하는 것을 그것 자체로 이끌어내 자신의 모습이 고유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행위”라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첫시집이 ‘고유함’을 획득한다고 평했다. 김명철 시인은 ‘균열’을 ‘돌파’해 ‘성장’한다는 손쉬운 서사를 버리고, 대신 그 균열에 전면적으로 머물거나 최소한 그 근처를 서성거리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이 “송두리째 몸을 내어던지는 맹랑한 배짱”(「고함(高喊)」)에 불과할지라도, “어둠의 본색에 다다”르거나(「어둠본색 1」) “검은 구멍”(「기항」)을 여는 또 하나의 길이라 할지라도, 결국 시인의 걸음은 삶이 기울어지는 바로 그 자리를 밟는다. 경계를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 묵묵히 걸어가는 시인은 그 안팎의 낙차를 몸소 겪는 것이 시인의 현실감각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꿰뚫고 있는 듯하다.
물의 저항 없이 허공으로 치솟을 때의 몸과 / 허공의 저항을 받으며 낙하하는 그 까마득함과의 격차 // 물 밖으로 나오기 전에 / 지느러미로 저항을 다스리던 사람은 / 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기 전에 / 눈으로 저항과 맞닥뜨리던 사람은 // 물 안팎의 경계에서 / 젖은 몸과 마른 몸을 번갈아가며 슬퍼할 줄 아는 자의 그림자(「경계를 걷다보면 선이 지워진 곳에 이를 때가 있다」부분)
그의 시는 쉽사리 비상하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럽게 내려앉으며 가파른 삶의 진실과 마주한다. 시인은 무심한 듯 담담한 언어로 이 진실의 풍경들을 소묘하지만, 거칠고 무거운 생활의 진실들은 그 층위를 잃지 않은 채 시인의 언어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첫시집에서 그가 보여준 치열하고 고유한 문법이 앞으로 어떤 행보로 이어질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