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거침없는 상상력과 역동적인 리듬, 재기발랄한 화법으로 이른바 2000년대산 젊은 시인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개성을 인정받으며 문단의 큰 주목과 기대를 모아왔던 이제니 시인의 첫 시집. 말과 사물 사이, 현실과 상상 사이를 거침없이 내달리며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 시인의 언어는 논리적인 의미 전개를 따르지 않고도 말 자체의 탄력 있는 연쇄가 우선 시 읽는 즐거움을 준다. 말의 속도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채워 막힘없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매력적인 문장들이 빛을 발한다.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단어와 이미지와 문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듯하지만, 그 생생한 리듬을 통해 사물과 의미 사이, 현실과 상상 사이에 무한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공간에서 시인이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한 말을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다. ‘당신’을 부르는 시인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열고 있으면 그 말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페루
분홍 설탕 코끼리
후두둑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일 뿐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치마를 입은 우주 소년
우비를 입은 지구 소녀
독일 사탕 개미
요롱이는 말한다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
밤의 공벌레
공원의 두이
코다의 노래
뵈뵈
카리포니아
녹슨 씨의 녹슨 기타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별 시대의 아움
그늘의 입
양의 창자로 요리한 수프로 만든 시
모퉁이를 돌다
아름다운 트레이시와 나의 마지막 늑대
오리와 나
편지광 유우
작고 흰 공
검버섯
나의 귀에 너의 사과가
창문 사람
나선의 바람
눈 위의 앵무
미리케의 노우트
그림자 정원사
사몽의 숲으로
밋딤
블랭크 하치
갈색의 책
단 하나의 이름
들판의 홀리
자니마와 모리씨
곤충 소년이 전진한다
처음의 들판
불면의 라이라
초현실의 책받침
유리코
아마도 아프리카
피로와 파도와
고백을 하고 만다린 주스
알파카 마음이 흐를 때
완고한 완두콩
녹색 감정 식물
녹색 정원 금발령
곱사등이의 둥근 뼈
나무 구름 바람
고아의 말
두부
해설 / 권혁웅
시인의 말
저자
이제니
출판사리뷰
미끄러지고 비틀어지고 거침없이 내달리는
말과 사물 사이, 그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제니 시인은 거침없는 상상력과 역동적인 리듬, 재기발랄한 화법으로 이른바 2000년대산 젊은 시인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개성을 인정받으며 문단의 큰 주목과 기대를 모아왔다. 이제 그의 첫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로 우리는 한국시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한 신예의 눈부신 출발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니의 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놀이와 반복에서 비롯되는 발랄한 리듬감이다. “요롱이는 말한다. 나는 정말 요롱이가 되고 싶어요. 요롱요롱한 어투로 요롱요롱하게.”(「요롱이는 말한다」) “당신은 감자 샐러드만 먹는다 / 완두콩만 골라내면서 // 완두는 싫다 싫어요 / 완두는 완두 완두 하고 울기 때문에 // 당신은 완고하다 / 당신은 완고한 완두콩”(「완고한 완두콩」) 논리적인 의미 전개를 따르지 않고도 말 자체의 탄력 있는 연쇄가 우선 시 읽는 즐거움을 준다. 말의 속도가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를 채워 막힘없이 이어지고, 그 사이사이에 매력적인 문장들이 빛을 발한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발에 꼭 끼는 장화 때문에 늘 울고 다녔다. 발에 맞는 장화를 신었다 해도 울고 다녔을 테지. 어릴 때부터 울보였고 발은 은밀히 자라니까 (…) 계절이 지나자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설탕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분홍 풍선 풍선이 되었다. 아니, 그것도 잘못된 말이다. 분홍 설탕 코끼리는 풍선 풍선 풍선이 되었다. (…)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 멋진 이름이다. 어제부터 슬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분홍 설탕 코끼리」 부분)
그의 말놀이는 주로 특이한 명명을 통해 만들어지는 때가 많다. ‘분홍 설탕 코끼리’가 ‘풍선 풍선 풍선’이 되고 ‘분홍설탕코끼리풍선구름’이 되는 자유자재한 상상의 연쇄가 그렇고, ‘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과 ‘공원의 두이’와 ‘녹슨 씨’와 ‘편지광 유우’와 ‘미리케’와 ‘블랭크 하치’와… 등등, 그의 시에 등장하는, 알 수 없는 매력적인 인물들(사실 인물인지 동물인지 사물인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의 이름이 그렇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페루’와 ‘카리포니아’와 ‘아프리카’ 같은 이방의 지명(처럼 들리는 말)이 자주 등장하지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그 장소를 지칭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시인이 그 인물과 사물과 장소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는 순간, 그것들은 우리가 짐작하는 그 의미를 버리고 시 안에서 하나의 리듬이 되어 울려퍼진다.
카리포니아 카리포니아 카리포니아에 있는 누이에게 편지를 쓴다. 나의 누이는 까막눈, 눈이 까맣고 노래를 잘한다. 카리포니아 카리포니아 누이의 기타는 카리포니아 카리포니아 하고 울고, 누이의 이름엔 붉은 줄이 두 줄 그어져 있다. (…) 오늘도 나는 편지 받기 위해 편지를 쓰고, 카리포니아 카리포니아 누이는 까막눈, 눈이 까맣고 혼잣말을 잘한다.(「카리포니아」 부분)
이처럼 시인의 말은 현실을 지시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전히 가공의 언어도 아니다. 그 말은 사물과 의미 사이에서 끊임없이 출렁거리며 그 간격을 한없이 넓혀놓는다. 해설을 쓴 평론가 권혁웅은 이를 말과 사물을 일치시키는 동일시의 명명과는 다른, 타자에게 열린 은유와 다정(多情)의 언어라고 설명한다.(권혁웅 ‘해설’) 말이 본래 사물과 같을 수 없고 그 자체로 의미를 담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인은 물론 잘 알고 있다. 세계와 언어에 대한 그러한 근본인식은 등단작 「페루」를 비롯해 시집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붙어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페루」 부분)
시인이 부리는 말은 한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미끄러지기만 할 뿐이므로, 그 말은 고향을 생각나게 하지만 고향을 가리키지는 않고, 시인은 무언가에 대해 말하는 일에 항상 실패하게 되어 있다. “검은 펜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면 검은 펜을 잃어버린 것이다. 금요일의 얼굴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면 금요일의 얼굴을 잃어버린 것이다. 죽은 친구의 편지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면 죽은 친구의 편지를 잃어버린 것이다.”(「편지광 유우」) 그래서일까, 이 발랄하고 분방한 리듬에는 누군가를 소리내어 부르는 친근하고 간절한 목소리와 함께 끝내 그 누군가에게 ?가가지 못하는 슬픔과 쓸쓸함 역시 배어 있다.
블랭크 하치. 실패한 곡선에도 밤은 울까. 너는 단 한번도 똑같은 표정을 지은 적이 없고 나는 너에 대해 말하는 일에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내가 기록하는 건 이미 사라진 너의 온기. 체온이라는 말에는 어떤 슬픈 온도가 만져진다.(「블랭크 하치」 부분)
이제니의 시들은 언뜻 이해할 수 없는 모호한 단어와 이미지와 문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듯하지만, 그 생생한 리듬을 통해 사물과 의미 사이, 현실과 상상 사이에 무한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 공간에서 시인이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한 말을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다. ‘당신’을 부르는 시인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열고 있으면 그 말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어미 없이 혼자 서 있는 말 / 고아의 해변에서 고아의 말을 내뱉으며 / 혼자 울면서, 울면서 혼자 달려가는 말 // (…) // 다시 태어나는 말이 달립니다 / 빛나고 아름답게, 빛나고 아름답고 쓸쓸하게 / 당신은 고아의 말의 그 단단한 등에 앉아 당신의 몸 위에 덧난 것들이 출렁출렁 흔들리는 진동을 듣고 있습니다(「고아의 말」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