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묵직한 사색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벼리며 강건한 목소리로 단단한 시적 사유를 펼쳐온 이영광 시인의 세번째 시집. 3년 만에 세상에 노크를 하는 시인은 더 넓고 깊어진 눈길로 세상의 온갖 아픔과 죽음을 불러내어 그들과 한몸을 이루며 뜨겁고 아름다운 시를 피워낸다.
그는 지금껏 곧고 날카로운 사물의 이미지들을 통해 견고하고 염결한 정신주의를 가다듬어왔으며, 죽음의 경험을 온몸으로 육화해낸 시들은 삶과 죽음을 감싸안는 폭 넓은 울림을 지녀왔다. 그리고 그런 시적 깨달음을 힘있고 유려한 리듬으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기이자 매력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여러 시에서 삶과 죽음의 순환과 뒤엉킴에 대한 자각을 진솔하고 결연한 어조로 토로하고 있는 시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제1부
반달
칼
아귀
칼치와 칼
등
유령 1
유령 2
유령 3
물음
비관
대(大)
무소속
꾸오바디스
죽도록
사람이 잘 안 죽는 이유
포장마차
아픈 천국
마른 저수지
건재
제2부
높새바람같이는
물불
의자
고사목 지대
사랑의 미안
녹색
춘화
오리무중
저 나무
구두
작아지는 몸
버들집
향수
진화
잠 깰 무렵
길
하느님의 자연시간
시인들
고향보다 깊은 곳
제3부
그늘 속의 탬버린
현기증
전생
사실적
공중
열한살
마흔다섯
극단적인 바람
간밤
밤이 오면 산에 들에
장화 같은 몸
흔한 일
수화
한마음
독방
여행가
기우
밤이 깊으면
검은 젖
해설 / 이찬
시인의 말
저자
이영광
출판사리뷰
아픈 세상의 편에서 타오르는 단단한 시정신
묵직한 사색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벼리며 강건한 목소리로 단단한 시적 사유를 펼쳐온 이영광 시인의 세번째 시집 『아픈 천국』이 출간되었다. 3년 만의 신작시집에서 시인은 더 넓고 깊어진 눈길로 세상의 온갖 아픔과 죽음을 불러내어 그들과 한몸을 이루며 뜨겁고 아름다운 시를 피워낸다.
그는 지금껏 곧고 날카로운 사물의 이미지들을 통해 견고하고 염결한 정신주의를 가다듬어왔으며, 죽음의 경험을 온몸으로 육화해낸 시들은 삶과 죽음을 감싸안는 폭 넓은 울림을 지녀왔다. 그리고 그런 시적 깨달음을 힘있고 유려한 리듬으로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기이자 매력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마찬가지로 시인은 여러 시에서 삶과 죽음의 순환과 뒤엉킴에 대한 자각을 진솔하고 결연한 어조로 토로하고 있다.
죽은 나무들이 씽씽한 바람소릴 낸다 / 죽음이란 다시 죽지 않는 것, / 서서 쓰러진 그 자리에서 새로이 수십년씩 살아가고 있었다 // (…) 나는 높고 외로운 곳이라면 경배해야 할 뜨거운 이유가 있지만 / 구름 낀 생사의 혼합림에는 / 지워 없앨 경계도 캄캄한 일도양단도 없다 // 판도는 변해도 생사는 / 상봉에서도 쉼없이 상봉중인 것 / 여기까지가 삶인 것(「고사목 지대」 부분)
흔히 삶과 죽음은 날카로운 경계를 지닌 반대 개념으로 이해되지만, 시인은 그것이 어떤 지대에서는 함께 병존하며 서로를 감싸안고 있음을 우리의 눈앞에 생생히 그려 보인다. 그 인식은 냉정한 듯 이성적인 어조로 표현되어 있으나, 그 안에 뜨거운 열정이 내재해 있음을 느끼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물이기도 하고 불이기도 한 ‘찬란’한 ‘사랑’으로도 표현된다.
물이 키운 듯 불이 키운 듯한 버드나무 그늘에 기대어 / 나는 불인 듯 물인 듯도 한 한 사랑을 침울히 생각는데 / 그 사랑을 다음 생까지 운구할 길 찾고 있는데 / (…) /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것이, / 저렇게 미치는 것이 옳겠지 / 저 물결 다 놓아보내주고도 여전한 수량 / 태우고 적시면서도 뜯어말릴 수 없는 한몸이라면 / 애써 물불을 가려 무엇하랴 / 저 찬란 아득히 흘러가서도 한사코 찬란이라면 / 빠져 죽는 타서 죽는, / 물불을 가려 무엇하랴(「물불」 부분)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랑’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시인의 머릿속에는 ‘빠져 죽고 타서 죽는’ 죽음이 선명하다. “죽음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시인은 삶이 “헛디뎌 뛰어들고 싶으리만치 어질어질하”므로 “죽음의 희끗희끗한 젖무덤에 얼굴을 묻고 / 숨 멈추고, 검은 젖을 깊이 빤다”(「검은 젖」). 죽음을 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의 활로를 찾으려는 결연한 자세다.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천착은 이번 시집에서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도처에 만연한 숱한 죽음의 기미들에 대한 관심으로 그 폭을 넓히고 있다. 시집 전반부에 실린 시들이 그 사례들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유령과 /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몸들의 거리 / 지하도로 끌려들어가는 발목들의 어둠, / 젖은 포장을 덮는 좌판들의 폭소 둘레를 / 택시를 포기한 당신이 이상하게 전후좌우로 / 일생을 흔들면서 떠오르기 시작할 때, / 시든 폐지 더미를 리어카에 싣고 / 까맣게 그을린 늙은 유령은 사방에서 / 천천히, / 문득, / 당신을 통과해간다(「유령 1」 부분)
특히 ‘유령’ 연작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들을 ‘유령’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늦은 밤 폐지를 수집하는 노인이나 술 취한 손님들에게 시달리는 대리운전기사, 나아가 ‘희망을 아예 태워버리기 위해 폭탄주를 마신 당신’에게도 역시 ‘유령의 유전자가 찍힌다’. 유령은 도처에 있고, 누구나 유령이 될 수 있다. 생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는, 죽음 곁을 위태롭게 지나고 있는 존재들이 곧 유령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은 유령과 /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몸들”만이 있을 뿐이다.
「유령 3」은 보다 직접적으로 죽음을 낳는 폭력적인 현실을 폭로한다.
計劃的으로 / 卽興的으로 / 合法的으로 / 사람이 죽어간다 // 戰鬪的으로 / 錯亂的으로 / 窮極的으로, 사람이 죽어간다 // 아, 決死的으로 / 總體的으로 / 電擊的으로 / 죽은 것들이, 죽지 않는다 // 죽은 자는 여전히 失踪中이고 / 籠城中이고 / 投身中이다 // 幽靈이 떠다니는 玄關들, / 朝刊은 訃音 같다(「유령 3」 부분)
딱딱한 한자어들의 연속 속에서 낯선 유령의 몸이 되어 떠도는 죽음의 소식들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현실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해설을 쓴 평론가 이찬은 이를 “현실상황의 잔혹함이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대로 재현될 수 없다는 다른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하면서, 이를 통해 이영광의 시가 “리얼리즘 미학의 근간을 이룬 재현의 수사학을 넘어” “‘유령’의 ‘몸’이란 새로운 이미지의 창안을 통해 한국시 전체의 사회정치적 상상력을 다른 차원으로 도약하게 만든다”고 상찬한다. 현실의 폭력에 맞서려는 작금의 시들이 겪고 있는 일종의 미학적 곤경을 자신만의 어법으로 곧장 돌파해가는 저 강직함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실직과 가출, 취중 난동에 풍비박산의 세월이 와서는 물러갈 줄 모르는 땅 / 고통과 위무가 오랜 친인척관계라는 곤한 사실이야말로 이생의 전재산이리라. 무릎 꿇고 피 닦아주던 젖은 손 울던 손. // (…) // 살 것도 못 살 것도 같은 통증의 세계관 가지고 저 팽팽한 창밖 걸어가면 닿을까, 닿을 것이다,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환청처럼 야위는 하늘의 먼 빛 // 가시숲에 긁히며 돌아오는 지친 새들도, 아까징끼 바르고 다시 놀러나온 아이도, 장기휴직중인 104동의 나도 사실은 실전의 정예들 // 목숨 하나 달랑 들고 참전중이었으니. / 아픈 천국의 퀭한 원주민이었으니.(「아픈 천국」 부분)
시인은 제 상처를 들여다보듯 주변의 상처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멀리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도래할 것을 내다본다. 시인이 지닌 ‘통증의 세계관’은 손쉽게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서 기어이 다시 살아낼 의지를 만들어낸다. 고통과 죽음에 대한 깊고 오랜 사유로 단련된 이만이 보일 수 있는 이런 단단한 정신의 자세야말로, 그가 앞으로 오래 건재할 시인임을 역설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