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열정과 상처를 여성적 어법으로 노래해 온 김경미 시인의 네번째 시집. 7년의 공백 기간 동안 섬세한 떨림이 더해지고 감춰진 일상의 틈에서 발견한 불화와 외로움에 대해 더 깊게 천착된 시어들을 하나하나 풀어내었다. 개성적인 상상력을 통해 사랑과 관계의 사유를 펼쳐가는 각 시편에는 소외와 고통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다양하게 변주되는 관계의 불화는 기발한 상상력과 탁월한 시구들을 낳는다. 또한 그의 시는 “발성이 값지고 높으며 간절”해서 “어쩔 수 없이 목이 메어”지는 감동을 선사한다. 불화와 고통을 건너가는 방법을 제시하기보다는 그것들을 철저하게 살아내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시인의 모습과 고통과 사랑의 ‘틈/겹’에서 견디면서 발언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역설적인 힘을 가지고 더 아름답고 눈부시게 빛난다.
목차
제1부 당신이라는 근거
이러고 있는,
야채사(野菜史)
혼선
다정에 바치네
다정이 병인 양
고통을 달래는 순서
사랑의 근거
조금씩 이상한 일들 1
멸치
겹
조금씩 이상한 일들 2-저녁의 답장
고요에 바치네
누가 사는 것일까
만유인력
한낮, 대취하다
화상
제2부 맥락 없는 말을 하다
그런 말들이 1
그런 말들이 2
맥락 없음에 바치다
사람 시늉
상심
잘 모른다
그날의 배경
먼지
구멍
바닷가 절, 불타다
질-개작
눈물의 횟수
해 진다 어디에나
글씨의 시절-방송국에서
환골
무언가를 듣는 밤
제3부 미안하다 저녁이여
변덕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
봄, 무량사
7월, 넝쿨장미, 사랑
조금씩 이상한 일들 3
물의 미제(未濟)
줄 이야기
연희
식물일지 2003
해질녘
불참
겨울, 부석사, 농구
문밖의 문
첫눈
인간론
애인도시-애정성시
생화
제4부 마음이 마음을 낳다
생심기
그들의 중년 1
그들의 중년 2-명함
나의 노파
해명
다정이 나를
자동응답기
종군기
서정의 흉가
이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조금씩 이상한 일들 4-입관실에서
그 세월에
일몰의 기억들
소란지심-상권
바다의 권유
요즘 내 문제는
산문│부재에 홀리다
시인의 말
저자
김경미
출판사리뷰
매혹적인 불화에서 길어올린 다정의 시편들
청춘의 열정과 불안을 예민하게 탐구하고 상처와 허무로 가득한 비극적인 세계를 독특한 여성적 어법으로 전개해왔던 김경미 시인의 신작시집 『고통을 달래는 순서』가 출간되었다. 『쉿, 나의 세컨드는』(2001) 이후 7년의 공백을 깨고 펴내는 네번째 시집이다. 오랜 침묵의 세월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세계에 섬세한 떨림을 더하게 하고 감춰진 일상의 틈에서 건져올린 불화와 상처, 외로움에 대해 더 깊게 천착하게 한다. 그래서 이번 시집을 읽다보면 불안한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아릿해지다가도 깊은 내면에서 솟아나는 연민에 따듯하게 젖어든다.
이번 시집에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개성적인 상상력을 통해 사랑과 관계의 사유를 펼쳐가는 장면들이다. 「야채사」의 경우 ‘고구마와 가지’에서 시작해 ‘사막과 낙타’를 가로질러 ‘당신과 나’의 관계에 이르는 발랄하고 독특한 어법이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긴 여운을 준다.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꽃이었다 한다/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달디단 바람에/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보니/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나왔든가―「야채사(野菜史)」 전문
그러나 이 시처럼 관계에 대한 사유가 발랄하고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시집 전반에 걸쳐 관계맺음에 대한 비관적인 상상력이 주를 이룬다. 시인에게 시는, 일상은 순조롭게 흐르다가도 어느 순간 모든 일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느껴지고 삐걱거리거나 궤도를 이탈하는 듯 여겨진다. 그래서 시인의 하루하루는 종종 버석거림과 틈이 벌어지는 간극이 감지된다. 때문에 시인은 “세상과 세상 사람 모두가 어색하고 적응되지 않아 툭하면 말을 더듬거나 물컵을 쏟는 자. 단체버스 같은 거 타면 한사코 맨 뒷자리에 혼자 앉으려는 자. 가끔씩 비슷한 구두를 짝짝이로 신고 일터로 가는 자. 늘 어딘가 그렇게 부족하거나 기울거나 떨어져나간, 보통사람처럼 살면서도 보통사람처럼 살아지지 않는 이상한 마음 때문에 늘 실수와 자격지심과 주저를 달고 사는 자”(시인의 산문―「부재에 홀리다」)와 같다. 이처럼 사람과 세계에서 동떨어져 사는 자의 일상은 외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으나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바라보는 시공간은 시가 꽃피는 자리이자 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름아닌 일상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으나 그냥 지나치고 마는, “갑자기 눈물이 핑,”(「글씨의 시절」) 도는 순간이나 ‘조금씩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는 때와도 같다. 그래서 시인은 “침울할 때가 좋”고 “슬픔이 웃음보다” 낫다고(「조금씩 이상한 일들 3」) 여기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들은 다음과 같은 슬픔과 외로움으로 변주되기도 한다.
안심할 때만 골라서 뒷머리에 돌을 맞거나/시작하려 하자마자 떠나거나/애절하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거나/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찬밥을 먹거나/한낮의 버스 안에서 쇼핑백 터지듯 울음이 터지거나,―「눈물의 횟수」 부분
시가 탄생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순간들은 시인으로 하여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칸나꽃이 “크고 붉은 동물”(「조금씩 이상한 일들 4」)로 변하거나 창세기부터 존재해온 인간이 어느 순간 먼지로 살아간다는 기발한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그럴 리 없다 한 먼지가 죽었다는 부음 검은 먼지를/갈아입고 교통체증에 서버린 먼지들의 경적소리를/듣다가 돌아와 식탁 위 몽실몽실한 먼지로/아이먼지를 만들거나 남편먼지가 다른 먼지를/사랑한다고 친구먼지가 전화해 울 때 나라는 먼지는/시라는 먼지를 쓰고//온 세계에 그렇게 한도 없이 내려앉는/저 창세기, 끝까지 다 독서해낼 수 있을까―「먼지」 부분
물론 이러한 인식은 관계와 소통, 사랑에 있어서 시시각각 찾아오는 불화와 그로 인한 균열과 간극에서 기인한다. 사람 사이에는 “잊고 싶은 일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잘 모른다」)이 수시로 발생하고 싸움이 일어난다. 이것은 “너무 가깝거나 멀어 몹쓸/사이도 아닌데 인간이 인간을 얼마나 낙담시키는지/이미 잘 알고 있다”는 구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시인은 참담하게 고백한다. “사람과 잘 안 맞아 어떻게 사람이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그날의 배경」). 사람을 가장 심하게 실망시키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인식은 종종 “모욕을 견디느라, 꽉 다문 입술들 온통 다 헐은 채/제때 (…) 떠나지 못한 값을”(「환골」) 지불하게 하기도 한다. 또한 모든 사이와 관계에서 “나 그대에게 더 잘 전해지지 않”는 불통의 문제는 “라일락 무늬 나무받침에 뜨거운 냄비 얹다가/라일락꽃들 비명에 냄비를 놓”(「화상」)칠 만큼 일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는다. 이때 시인이 취할 수 있는 태도 중의 하나는 모든 관계에 ‘불참’(「불참」)하거나 담담하게 ‘수긍’하는 것이다. “세상에 정 주고 저물녘, 마음 허물어지지 않은 날/하루도 없”(「해질녘」)다는 시인의 고백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맥락 없음’이라는 사유에 이르러 극에 달한다. 이것은 단지 부정의 사유만은 아니다. 사람들 사이와 대화에는 일정한 맥락이 흐르는데, 시인은 자신이 그 맥락에서 누락되었다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맥락 없음’에서 나오는 ‘평화와 즐거움’을 노래하는 것이다.
아무 맥락 없다 없는 맥락이 늘 사람을 잇고 사랑을 떨어뜨리고 세월을 줍는다 맥락 없음의 평화와 신비 저녁이라는 모종삽과 어금니에 바친다 찾지 마라 나,라는 맥락 끼울 곳 없어 맥락을 잡아야만 살았다 느끼는 사람들아 나는 아무런 일목요연함도 없어 즐겁다는 것 ― 「맥락 없음에 바치다」 부분
모든 관계에서 소외될수록 시인이 누리는 삶의 통찰이나 생각의 깊이는 더 깊어지고 빛난다.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린 어제가 쓰라리다/줄곧 평지만 보일 때 다리가 가장 아팠다”(「첫눈」)거나 “칼의 크기는 제 등에 꽂힐 깊이의 크기”(「조금씩 이상한 일들 1」)라는 표현은 관계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자가 그 외로움의 바닥까지 내려간 뒤에 뿜어내는 섬광과도 같은 것이다.
시인이 집요하게 파헤치는 간극이나 사이(틈)는 끝내 불화를 향해 치닫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틈은 곧 ‘겹’으로도 변주된다. 틈과 겹은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하는 것이므로 겹치지 않는 사물과 관계는 없다는 사실을 시인은 뛰어난 감수성으로 노래한다. 하여 시인의 눈은 모든 현상과 사물들이 “서로 무늬를 빚지거나 기대”고, ‘백일홍의 저녁’과 상처를 주고받은 ‘당신의 무릎’이 “죽은 척 내게로 와 겹치는”(「겹」) 시간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시공을 초월해 “고생대 은행잎 화석사진과 내 위벽에 찍힌 당신의 말투와 기차와 물고기와 저녁의 흔적들 겹친다”(조금씩 이상한 일들 1)는 탁월한 표현을 낳기도 한다.
불화와 상처와 외로움이 갈피마다 묻어 있는 김경미의 시들을 읽다보면 역설적으로 그의 시들이 얼마나 힘들게 온기와 다정함을 놓지 않는지를 알게 된다. 이는 ‘다정 연작’(「다정에 바치네」 「 다정이 병인 양」 「다정이 나를」)에서 아주 강렬하면서도 따뜻하게 느낄 수 있다. “누가 다정하면 죽을 것” 같고 “다정이 나를 죽일 것만”(「다정이 나를」) 같지만 동시에 “세상과 나를 당신을 더욱 바짝 조여”(「다정이 병인 양」)주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내 시인은 다정이라는 말이 “봄 저녁에 듣는 간절한 한마디”이고 “온통 세상의 중심이게 하는”(「다정에 바치네」) 것이라 노래한다.
애초부터 시인은 불화와 고통과 외로움을 건너가는 방법이나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단지 그것들을 간절하게 철저하게 살아내려는 자세를 견지해온 것인지 모른다. 그렇게 때문에 힘든 세월이지만 흉한 세계를 들여다보며 ‘몇겁’을 서서 기다리기도 하고(「환골」), “더럽지만 잊을 수 없는 일생의 아름다운 또 하루”(「그 세월에」)를 노래하는 것이다. 그렇다, ‘고통을 달래는 순서’는 애초에 없었다. 고통과 사랑의 틈/겹 사이에서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발언할 수밖에 없는 시인의 일갈, “물처럼/버려지는 것들//언제나 조금씩 기운 것들이 나를 지킨다”(「조금씩 이상한 일들 3))는 말은 그래서 역설적인 힘을 가지고 더 아름답고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