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독특한 신화적 상상력과 그로테스크한 감각으로 주목받아온 김근 시인의 두번째 시집. 죽음과 탄생이 뒤엉킨 기괴한 설화와 개성적인 사설조의 리듬이 빛을 발하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안과 밖, 나와 너, 사물과 말의 경계라는 새로운 혼돈의 지대로 나아가 더 기괴하고 능청스러운, 때로는 흥겹기까지 한 주술적인 언어의 힘을 펼쳐 보인다. 가장 불온한 언어로써 불온한 현실과 마주하려는 치열하고 묵직한 시도가 자아내는 감동, 죽음과 불모가 가득한 신화의 시간에서 피어나는 신선한 서정은 이 시집의 가장 큰 성과이다. 젊은 패기와 원숙한 기량이 적절하게 배합된, 젊은 시인의 미래에 대한 기대에 충분히 값하는 작품집이다.
목차
제1부
바깥에게
잠 서기관(書記官)
복도들 1
복도들 2
복도들 3
새벽의 할례
너 오는가
여우의 시간
우우우
적산가옥이 내려다보이는 옥탑방
죽은 새
구름극장에서 만나요
제2부
이모들
가족
나무나무
국솥에서 끓고 있는 저 구렁이
간다
죽은 군대가 도착한다
잔치 잔치 벌인다
싱겁고 싱거운
물 안의 여자
저 문들이 나를
외딴집
발(魃)
늪
드렝이 우는 저녁
낫잡이 이야기
옷 짓는 여자
제3부
빨강 빨강
그 의자의 사정
어깨들
가수들
중얼중얼
웃는 봄날
죽은 나무
지하철
덜,컹
처녀들은 둥글게 둥글게 사라지고
거리
제4부
분서(焚書) 1
분서(焚書) 2
분서(焚書) 3
분서(焚書) 4
분서(焚書) 5
분서(焚書) 6
분서(焚書) 7
분서(焚書) 8
분서(焚書) 9
분서(焚書) 10
해설│함돈균
시인의 말
저자
김근
출판사리뷰
불온한 현실에 맞서는 가장 불온한 언어의 감동
독특한 신화적 상상력과 그로테스크한 감각을 무기로 토속적 세계와 현대의 기형적인 실존을 그리며 주목받아온 김근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힘있는 리듬과 서정성을 갖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개성적이고 안정된 목소리로 말과 사물의 혼돈스러운 경계를 노래하며 가장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길로 발을 내딛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인은 첫 시집 『뱀소년의 외출』에서 한 개인의 탄생과 유년의 기억을 기괴한 설화와 같은 사설조로 풀어낸 바 있다. 이번 시집 『구름극장에서 만나요』에서도 무엇보다 먼저 독자를 압도하는 것은 죽음과 탄생이 뒤엉킨 기괴한 설화들이다. 몸부림치는 뱀과 쉭쉭거리는 잉어와 중얼거리는 여우와 시커먼 송장과 삐걱거리는 해골 들이 시집 도처에 출몰하고, 감각들은 온통 축축하고 비릿하고 번들거리고 미끈거린다. 아이들은 자라기도 전에 노인이 되어버리고, 빨갛고 파랗게 피는 꽃들마저 모조리 더러운 시반(屍班)이다.
그러나 또한 이번 시집에서 감지되는 것은, 시인이 이제 개인적인 신화의 재구성을 거쳐 점차 안과 밖, 나와 너, 사물과 말의 경계라는 새로운 지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꽃도 피지 않고 죽은 나무나 무성한/무서운 경계”(「바깥에게」)인 그곳은 안인지 바깥인지도 알 수 없고 내가 누구이고 그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이 섞인 채 어딘가를 향해 가는 공간이다.
이 길고 둥근 통로에는 거칠고 반짝이는 비늘은 없으나 보드라운 살이랑 물컹하게 출렁이는 바닥과 벽,에 달린 어둡고 축축한 문들 미끌미끌한 손잡이가 몇개씩 붙은 그 많은 문들의 주소 알 수 없고 그 문들 열리기가 안으론지 바깥으론지 또한 가늠할 길 없는데 해설라무네 여기는 그의 배아지 속일거나 내 배아지 속일거나 내 먹이일거나 그가 그의 먹이일거나 내가 아니면 그와 나는 또 누구의 여태도 소화되지 못하고 썩은 내 풀풀 풍기는 살점이나마 듬성듬성만 붙어 있는 뼈다귀일러나,(「복도들 1」 부분)
그 경계 또는 통로를 노래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능청스럽거나 기괴할 뿐 기쁘거나 슬프거나, 또는 희극적이거나 비극적이지는 않다. 경계의 혼돈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혼돈과 악몽이라는 사태보다 오히려 말을 이끌어가는 힘, 또는 말이 이끌어내는 힘이다. 그럴 때 이 모든 혼돈과 악몽은 차라리 흥겨워지기까지 한다.
이번 시집의 ‘분서(焚書)’ 연작에서는 이러한 언어에 대한 시인의 자의식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평론가 함돈균의 말에 따르면 왕의 역사 또는 ‘실록’과 길항하는 재앙의 언어를 기록한 ‘비기(秘記)’이자 ‘참서(讖書)’의 형식을 취한 이 연작은 “실상 없는 언어의 타락”과 “말의 억압과 왜곡”을 폭로하면서 “더 근원적이고 강력한 또다른 말의 세계” “세계의 진상과 간극을 가지지 않는 말의 세계”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왕의 말이 그 말과는 다른 재앙을 낳고, 그 재앙의 기록이 시가 되는 과정은 예컨대 이와 같다.
선왕께서 한날은, 비로소 봄!이라 하시매, 비로소 봄!이라 적었나니,/궁궐의 나무란 나무는 모도 꽃 필 자리에 종기를 매달고 곪고 곪다가/끝내는 툭, 툭, 터져 피고름 온통 질질질 낭자하고 궐 안이 썩은 내로/진동하였으니 어린 내시들의 성기 모조리 잘리고 어린 무수리들/모조리 처녀를 잃고 꼬부랑꼬부랑 하루아침에 늙은 뒤였더이다(「분서(焚書) 3」 부분)
개인 또는 가족, 나아가 공동체의 신화를 허구적으로 재구축함으로써 그 신화에 내재하는 악몽을 드러냈던 이전의 시도에서 더 나아가, ‘기록’하고 ‘기억’하는 말의 힘 자체를 실험함으로써 낡고 견고한 말의 허위와 대결하며 그 너머의 다른 가능성(또는 불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는 가장 불온한 언어로써 불온한 현실과 마주하려는 치열하고 묵직한 시도이자, 사물의 모사와 감정의 토로에 안주하지 않는, 세계-말의 주술을 부리는 사람이라는 본래 의미에서의 시인의 자리를 환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주술로서의 말의 형상은 곧 형상이 고정되지 않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름과 같다. 그러니 시인이 짐짓 가벼운 어조로 아래와 같이 노래하는 ‘구름극장’이야말로, 곧 무정형 비인칭의 말과 사물이 구별없이 한데 있거나(또는 없거나) 하는 시인의 시가 상연되는 극장이라 할 수 있다.
구름극장에는 처음부터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네모난 영사막은 뭉게뭉게 피어올라 금세 다른 모양으로 몸을 바꾸지요 그럴 때 사람들이 조금씩 흘려놓은 구름 냄새에 취해 잠시 생각에 잠겨보는 건 어때요 오직 이곳에서만 그대와 나인 우리 아직 어둠속으로 흩어져버리기 전인 우리 서로 나눠가진 구름의 입자들만 땀구멍이나 주름 사이에 스멀거리기만 할 우리 아무것도 아닐 그대 혹은 나 지금은 너무 많은 우리 사람들이 쏟아놓은 구름 위를 통통통 튀어다녀보아요(「구름극장에서 만나요」 부분)
물론 그런 혼융이 늘 가볍고 부드러운 구름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시인이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구름극장’에서 당신과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죽음과 불모가 가득한 신화의 시간을, 구불구불 스멀거리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리듬으로 힘겹게 걸으면서, “너 오는가” 하고 당신을 마중 나가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서정이 동반되는 것이다.
너 오면 나 굳은 관절 움직여 한바탕 춤이라도 출 겐가 보타든 목을 뽑아 쇳소리로 어허이 어허이 가문 노래라도 한자락 불러재낄 겐가 나 그만 가루로 폴폴 무너질 겐가 그렇게 많은 머리를 바꿔달며 그렇게 많은 거기서 너는 오고야 마는가 해골들끼리 부딪는 소리로 눈부신 대낮 공놀이에 지친 아이들이 공은 버리고 제 머리통을 차대며 노는 먼짓길 염산처럼 뿌려지는 햇빛을 견디며 절뚝이며 절뚝이며 나 너 마중 나간다(「너 오는가」 부분)
그러니 “아직도 나는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고 있는 모양으로, 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다”(「시인의 말」)고 중얼거리는 시인은 분명 당신을 만나기 위해 계속 더 아름다운 시들을 들려줄 것이다. 젊은 패기와 원숙한 기량이 적절하게 배합된 이번 시집이 이 젊은 시인의 미래에 대한 기대에 충분히 값하고도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