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뛰어난 감성의 언어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 시인이 3년만에 펴내는 아홉번째 시집. 기다림과 침묵을 통해 삶과 사랑의 배면에 깔린 외로움을 간파해내는 시세계가 빛난다. 삶과 죽음, 늙음과 고통에 대한 시인의 천착은 끈질긴 응시를 거친 뒤 치열하고 아름다운 시의 미학을 완성한다. 긴 응시와 기다림이 동반하는 것은 생에 대한 혹독한 반성인데, 이 반성을 이끌어내는 의지는 더 나아가 고단한 삶에 대한 긍정과 축복으로까지 이어진다. 시인은 나직하나 뜨거운 목소리로 ‘기다림이 성실하게 익었을 때’ 사랑을 발언할 수 있다고, 진정한 삶과 사랑에 대해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로 들려주고 있다.
목차
제1부
빈틈
나팔꽃
낮달
끈
수표교
스테인드글라스
장의차에 실려가는 꽃
밤의 연못
허물
부러짐에 대하여
거위
못
손
돌멩이
장승포우체국
옥잠화
유등
지하철을 탄 비구니
군고구마 굽는 청년
마디
좌변기에 대한 고마움
낙죽
제2부
전깃줄
밤의 강물
여름밤
폐계
수화합창
감자를 씻으며
포옹
걸인
여행가방
누더기
무인등대
북극성
생일
돌파구
넘어짐에 대하여
젖지 않는 물
집 없는 집
가방
시각장애인과 함께한 저녁식사 시간
사막여우
실종
문 없는 문
옥산휴게소
토마토
꽃을 태우다
수의
제3부
다시 벗에게 부탁함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나무에 쓴 시
물길
물새
내 얼굴에 똥을 싼 갈매기에게
물고기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
나는 물고기에게 말한다
바다가 보이는 화장실
노부부
어머니의 물
용서
손가락
빈벽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하늘에게
꽃향기
해설/ 최현식
시인의 말
저자
정호승
출판사리뷰
반성과 응시, 침묵 끝에 들려주는 사랑의 언어들!
뛰어난 감성의 언어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 시인의 3년 만에 펴내는 새 시집이자 아홉번째 시집인 『포옹』이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에 담은 66편의 작품 중에 40여 편은 미발표작이어서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시인은 1972년 등단 이래 『슬픔이 기쁨에게』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등 많은 시집을 통해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이 짧은 시간 동안』(2004)에서는 착하고 맑은 시심(詩心)을 간직하면서 낮은 곳에 버려진 존재들의 구체적인 삶을 담아낸 시세계를 선보였다. 이번 시집은 사물과 인간을 대하는 시인의 시선이 한층 더 그윽해지면서 기다림의 언어와 침묵을 통해 삶과 죽음의 배면에 깔린 외로움을 간파해내는 감성적 시세계가 빛을 발한다.
우선 시인은 삶과 죽음을 고통스럽고 불가해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 시집에서 늙음과 죽음충동, 자살, 장례(「전깃줄) 「옥산휴게소) 「꽃을 태우다) 「수의)) 등의 소재가 빈번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러한 고통과 불가해성은 “인생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고/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가지려고 하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옥산휴게소))면서 직접적으로 발언되기도 하고, 일가족의 자살현장(「전깃줄))이나 화자의 사체를 묘사(「실종))하는 서늘한 언어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하지만 이러한 소재들은 고통과 삶을 외면하고 시를 통해 도피하기 위해 끌어온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삶을 껴안기 위한 따듯한 시선과 치열한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노숙자나 걸인의 힘겨운 삶을 묘사할 때조차 슬픔의 정조를 견지면서도 따듯한 시선을 버리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노숙자들이 물에 비친 아파트로 들어간다는 죽음의 이미지(「밤의 강물))나, 타이어 조각에 의지해 구걸하는 걸인에게 떨어지는 동전 소리가 천년이나 걸린다는 깨달음(「걸인))은 그래서 더 처연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삶과 죽음과 고통에 대한 시인의 천착은 끈질긴 응시와 기다림, 그리고 침묵을 통해서 더 치열하고 아름다운 미학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 응시와 기다림이 동반하는 것은 생에 대한 혹독한 반성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부분)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부러짐에 대하여」 부분)
기어이 인간을 버리고 혼자 울고 싶을 때/ 나는 강가로 나가 물고기의 허리를 껴안고 운다/ 침묵만이 그들의 언어이므로/ 침묵 외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므로(「나는 물고기에게 말한다」 부분)
신발 끈도 매지 않고/ 나는 평생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황급히 신발을 벗는 것일까/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울어버린 줄도 모르고 (「북극성) 부분)
이러한 냉철한 침묵과 반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그래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나는 물고기에게 말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잊을 수는 없으나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거짓을 위하여 더이상 목숨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젖지 않는 물))고 결연한 생의 의지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이 반성을 이끌어내는 의지는 더 나아가 고단한 삶에 대한 긍정과 축복으로까지 이어진다.
진정으로 살아보지도 않은 채 죽어간다는 것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무인 등대」 부분)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세운다 할지라도(「넘어짐에 대하여))
이러한 의식은 넘어져본 자, 고통의 바닥까지 내려가본 자만이 일궈낼 수 있는 축복의 언어이다. 시집 곳곳에서 시적 깨달음의 언어와 순간이 단순한 아포리즘에 머물지 않고 더 크게 울리고 빛나는 것은 고통과 삶이 시인의 몸을 통해 육화되었기 때문인데, 이것은 독자에게 설득력 있는 감동을 안겨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늙음에 대한 비애를 적절하게 포착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매미의 허물을 통해 어머니를 화자의 허물에 비유한 것(「허물))은 그 자체로 절절한 모성을 감지하게 한다. 그간 정호승 시에서 따뜻한 여성성이나 모성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시집에서는 ‘아버지’ 이미지가 더불어 등장한다. ‘아버지’는 배변도 어려울 정도로 늙었거나(「노부부)) 나팔꽃씨를 환약으로 알고 먹은 뒤 나팔꽃으로 피어나거나(「나팔꽃)), 일생을 벽에 박혀 무게를 견디다가 빠져나오면서 구부러진 못(「못))으로 비유된다. “사람이 늙은 뒤에 또다시 늙는다는”(「노부부) 시인의 깨달음은 하나의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 늙어가는 모든 인간의 육체를 처연한 슬픔의 미학으로 일궈내서 더 값지다 할 수 있다.
흔히 사랑과 기다림의 언어를 정호승 시의 감동과 특장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감동의 깊은 밑바닥에서 단순한 감성을 뛰어넘는 삶과 인생을 이해할 때 비로소 그의 시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럴 때에만 정호승 시의 감동과 울림은 진정으로 크고 오래 남는다. 신경림 시인 역시 정호승 시에 대해 “맑고 아름다운 삶을 지향하는 데서 오는 깊은 고뇌와 짙은 아픔이 있다. 이것이 감동의 원천이 되고 있는 더 큰 덕목이다. 한편 그의 시가 극히 감성적이면서도 전혀 감정의 낭비나 표현의 장황함이 없는 절제된 형상과 표현을 성취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추천사))고 찬사를 보낸다.
한편 표제작 「포옹」에서는 이 시대에 사랑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끔 해준다. 죽은 뒤에도 만년이 넘도록 껴안고서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신석기 시대의 부부의 뼈는 ‘사진만 찍고 돌아가는’ 현대인에게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시인은 또 묻는다. “사랑에서 기다림이 얼마나 성실하게 잘 익었는가.”(「군고구마 굽는 청년)) 시인은 나직하나 뜨거운 목소리로 기다림이 성실하게 익었을 때 사랑을 발언할 수 있다고, 진정한 삶과 사랑은 모두 침묵과 기다림과 응시를 통해 완성된다는 사실을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최현식은 이러한 “묵시(?視)가 오히려 존재의 자율성과 자유, 타자와의 연대감과 상호소통을 넓히는 원리가 될 것”(해설 「‘빈틈’의 생리와 윤리))으로 평가하고 있다. 삶과 사랑에 대한 반성과 기다림이 없는 이 시대에, ‘하루를 일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하루를 굶어야 한다는’(「하늘에게)) 시인의 전언은 그래서 더 커다란 경종으로 울려오는 것이다.
“신은 기쁨을 주실 때 직접적으로 주지 않고 다른 누군가를 통해 주신다고 한다. 아마 내겐 시를 통해 주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시인의 말」)고 고백하는 정호승은 그 누구보다도 상처와 고통과 용서를 깊이 체험하고 들려주는 천상 시인이다. 보이지 않는 별들 때문에 밤하늘이 아름답다는 깨달음, 보이지 않는 어둠 때문에 밝은 햇살이 비친다는 깨달음(「빈 벽」), 누더기가 되어야만 길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다시 자장면을 먹으며」)들은, 정호승만이 들려줄 수 있는 평범하면서도 아름다운 언어이다. 죽고 난 뒤 자신의 가죽으로 소파와 장갑, 지갑을 만들어, 독거노인이 쉬고 노숙자의 손을 데워주고 가난한 이들의 돈을 담는 데 쓰라는(「다시 벗에게 부탁함)) 성자의 면모는 독자들로 하여금 오래 시집에 머물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