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음식문화의 수수께끼』(The Sacred Cow and The Abominable Pig: Riddles of Food and Culture)는 문화생태학자 마빈 해리스가 전 세계 기이한 음식문화의 비밀을 밝힌 책이다. 해리스는 이 책에서 식충부터 식인까지, 특정 동물을 숭배하는 것부터 혐오하는 것까지 다양한 음식문화를 소개하며, ‘단백질 섭취’의 관점에서 이러한 문화가 생겨난 이유를 추적한다. 단백질은 인간의 진화와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따라서 인간은 단백질을 효과적으로 섭취하기 위해 각자의 환경에 적응,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해왔다는 것이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는 해리스답게 각 문화의 물질적 조건, 즉 자연환경이나 경제적 번영 등에 관한 객관적인 지표를 바탕으로 논의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굉장히 설득력 있다.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는 ‘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의 제3권으로 지난 1992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이후 꾸준히 사랑받았다. 번역을 다듬고 화보를 추가해 개정판을 출간하게 되었다.
목차
숨겨진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를 찾아서│옮긴이의 말
1 먹기 좋은 음식과 생각하기 좋은 음식
2 고기를 밝히는 사람들
3 신성한 암소의 수수께끼
4 혐오스러운 돼지고기
5 말고기
6 미국인과 쇠고기
7 우유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
8 벌레
9 개, 고양이, 딩고, 그 밖의 애완동물
10 식인
11 더 나은 음식
음식문화의 비밀을 탐구하는 문화해독자가 되기 위해│개정판을 내면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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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마빈 해리스
출판사리뷰
영미 인류학의 거장, 마빈 해리스
해리스는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다. 그는 문화의 발전과정을 이해하는 열쇠로 ‘생식압력→생산증강 과정→생태환경의 파괴·고갈→새로운 생산양식의 출현’이라는 도식을 제시한다. 이러한 생태학적 적응양식을 통해 가족제도와 재산관계, 정치적·경제적 제도, 종교, 음식문화 등의 진화와 발전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해리스는 브라질, 에콰도르 등지에서 현지조사를 했고 문화생태학적 측면에서 식민지주의의 영향, 저개발국가의 문제, 인종과 민족적 상호관계에 대한 비교문화를 연구했다. 1953년부터 컬럼비아 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플로리다 대학 교수 및 미국 인류학협회의 인류학 분과회장도 맡았다. 그는 2001년 사망하기 전까지 문화인류학이라는 넓은 지평을 문화유물론의 관점으로 횡단했다.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적 관점은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외에도 그의 저서 『인류학 이론의 발생』(The Rise of Anthropological Theory), 『문화유물론: 문화과학을 위한 투쟁』(Cultural Materialism: The Struggle for a Science of Culture), 『문화의 수수께끼』(Cows, Pigs, Wars and Witches: The Riddles of Culture), 『식인문화의 수수께끼』(Cannibals and Kings: The Origins of Cultures)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는 인류학 전공자를 위한 전문서라기보다는 일반 대중을 위한 에세이 형식의 교양서이기 때문에 초심자들도 흥미롭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해리스의 문화이론의 정수이자 핵심도 잘 담겨 있다.
암소 숭배와 돼지 혐오 “못 먹어서 안 먹는 게 아니고 안 먹어서 못 먹는다”
진화론에서 ‘단백질’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인간의 지능이 다른 영장류보다 월등히 높은 건 뇌가 커서다. 현대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두뇌가 커진 이유로 단백질 섭취를 든다. 특히 불을 사용해 고기를 익혀 먹으면서 단백질 흡수율을 기하급수적으로 높인 게 결정적이었다. 기원전 200만 년 전쯤의 일이다.
해리스도 여기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단백질이 인간 진화와 인류 문명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다양한 음식문화도 여기에 관련 있을 거라는 지극히 유물론적 판단에서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단백질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왜 모든 단백질을 좋아하지 않을까? 힌두교도는 암소를 숭배한다. 이슬람교도는 돼지를 끔찍하게 여긴다. 한국인은 개고기를 먹지만 프랑스인은 그렇지 않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전 세계 기이한 음식문화를 다룰 때 피해갈 수 없는 이 질문들에 해리스는 역시 매우 유물론적인 근거로 답을 찾는다. 바로 ‘생태학적 제약’이다. 간단히 말해 기후가 다르고 그래서 나고 자라는 식물과 동물이 달라 먹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못 먹어서 안 먹는 게 아니고 안 먹어서 못 먹는다’는 게 해리스의 주장이다.
가령 힌두교도가 처음부터 암소를 숭배한 건 아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경전이라는 힌두교 성전(聖典) 『베다』를 보아도 딱히 그런 내용은 없다. 해리스는 어떤 종교적·정신적인 이유가 아니라 인구증가의 측면에서 이를 분석한다. 즉 인구가 점점 많아져 목초지가 부족해지자 소 자체를 키울 수 없게 된 것이다. 소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식량이 되므로 그 수가 적어질수록 당연히 더 귀해졌고 결국 귀하게 보살펴야 할 사치재가 되었다.
이후 어느 정도 소의 개체수가 적정선을 이룬 뒤에도 인도에서 소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암소는 우유를 주고 수소는 쟁기를 끈다. 소똥은 거름이나 난방용 연료로 쓴다. 유지비도 많이 들지 않는데, 왕겨, 풀 따위를 먹기 때문에 인간과 먹는 것으로 경쟁하지 않는다. 소를 도축하지 못하므로(공급과 수요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으므로) 소값 자체도 싸 굳이 팔 이유도 없다. 이러한 환경에서 소를 죽이지 않는 건 굉장히 합리적이라는 게 해리스의 결론이다.
이슬람교도가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이슬람교도는 중동에서 산다. 사막이거나 사막에 가까운 건조한 지역이다. 그런 곳에서는 돼지를 키우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돼지는 인간과 먹는 게 겹친다. 인간이 먹는 걸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체온조절을 못 해 물과 그늘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도 돼지가 줄 수 있는 건 고기밖에 없다. 노동수단이나 이동수단으로 전혀 쓸 수 없다. 중동에 사는 사람 중 이런 돼지를 예뻐할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겠는가.
최고의 단백질원 벌레 하지만 최악의 효율성 벌레
이런 논의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벌레다. 최근 들어 미래에는 벌레를 먹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다. 번데기를 먹는 한국인조차 식충을 구역질나는 일로 여기는데, 과연 농담 반 진담 반의 예언은 현실이 될 것인가.
해리스가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를 쓸 1980년대에도 벌레는 이미 최고의 단백질원으로 불렸다. 단백질 함유량으로만 따지면 소든 돼지든 그 어떤 동물도 벌레와 비교할 수 없다. 해리스식으로 생각하면 이런 벌레를 안 먹을 이유가 없다. 소나 돼지처럼 밥을 많이 줄 필요도 없고 공간도 많이 차지하지 않는다. 배변량도 많지 않고 전 세계 어디에나 있으며 수천수만 종이 존재해 멸종될 위험도 적다. 그런데 왜 인류는 벌레를 먹지 않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해리스가 제시한 음식문화의 네 가지 규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 고기로서의 효용이 크면 음식으로 사용한다.
2) 고기로서의 효용이 커도 다른 효용이 크면 음식으로의 사용이 제한된다.
3) 고기로서의 효용이 적고 다른 효용이 크면 음식으로의 사용이 기피된다.
4) 고기로서의 효용이 적고 다른 효용도 적으면 혐오된다.
국내에서 식용 벌레를 넣어 만든 과자 등을 파는 한 회사의 상품들. 팔기 쉽고 사기 쉬운 게 먹기 쉬운 게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도 언젠가는 벌레를 삼겹살 먹듯 먹게 되지 않을까?벌레로서는 1번 대접을 받아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4번으로 취급당하니 억울할 일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해리스는 본인의 유물론적 문화인류학을 활용해 훌륭하게 답을 내린다. 간단히 말해 벌레는 단백질 함유량이 월등히 뛰어나지만 벌레 한 마리가 제공하는 단백질의 절대량 자체가 워낙 적으므로 오히려 고기로서의 효용이 적다는 것이다. 1일 단백질 섭취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벌레 수백 마리를 잡아야 하는데, 이럴 바에는 야생에서 사슴이나 닭 따위를 한 마리 잡는 게 오히려 신체 에너지 활용에 효율적이라는 얘기다. 해리스는 이를 ‘최적 먹이 찾기 이론’이라고 부른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벌레든 사슴이든 잡으러 뛰어다닐 일은 없다. 하지만 오히려 과거보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발달한 오늘날 모든 게 비용과 효용의 논리에 꽉 묶여 있다. 팔기 좋은 것, 사기 좋은 것이 먹기 좋은 것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은 여전히 가치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