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강한 중국, 인재를 키우고 원자탄을 개발하다
현대중국을 만든 사람들 그 끝없는 이야기
“고개를 들어라.
내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면 그때는 고개를 숙여라.”
동아시아가 뜨겁다. 후진타오(胡錦濤) 시대 대국굴기(大國굴起)를 표방하며 군 현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한 중국이 어느덧 항공모함을 두 척이나 보유하게 되었다. 미국은 급격한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맞대응해 항모전단을 아시아로 전개시켰고, 이에 맞서 중국은 항모 킬러라 불리는 둥펑-21D 미사일을 열병식에서 공개했다. 21세기 이전만 해도 중국군의 이미지는 ‘인해전술’이었다. ‘질’보다는 ‘양’이었다. 그런 중국이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미국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 이야기』 제6권에서는 중국 ‘대국굴기’의 핵심인 군사력의 원천이 담겨 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제1장은 중일전쟁 당시 임시수도였던 충칭의 풍경, 제2장은 타이완과 중국의 갈등, 제3장은 중국 4대가족이라 불리는 천씨 가문의 천궈푸, 천리푸 형제 이야기, 제4장은 중국 건국 세대의 스승이라 불리는 5대원로(五大元老) 그리고 마지막 제5장은 중국의 철도, 자동차, 항공모함, 로켓, 핵 기술 개발 과정이 담겨 있다. 이 다섯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공통분모는 ‘인재’다.
중국은 오랫동안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 속에서 살아왔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자했다. 인재를 키우고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다. 최근 북한의 핵문제를 이해하려면 중국의 핵무기 개발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중국은 핵무기를 개발해 미국과의 데탕트 분위기를 이끌어냈으며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켜 아시아의 맹호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많은 전문가가 50여 년 전 중국과 같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린다고 진단한다. 우리가 북한의 핵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중국의 핵무기 개발사를 알아야만 하는 이유다.
목차
1 길고 긴 저항
저항의 근거지
불타의 구세정신
2 해방의 황혼
폭력 흔적 없는 강간사건
2월 28일, 분노의 날
전쟁의 그림자
3 희생양이 된 형제들
4대 가족의 마지막 생존자
선생과 왕
4 윗사람의 몸가짐
중국인의 낙타
학발동안鶴髮童顔 노당익장老當益壯
5 부유한 나라, 강한 군대
두 개의 고궁박물원
인재의 조건
중국 철도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자동차
함대 사령관의 꿈
미사일과 로켓의 왕
원자탄이라는 괴물
참고문헌
저자
김명호
출판사리뷰
전쟁통에도 수업은 계속된다
중일전쟁 임시수도 충칭의 풍경
“충칭의 중앙대학은 전시 중국의 최고 학부였다. 1948년, 미국의 프린스턴대학이 세계 우수 대학 순위를 발표했다. 중앙대학이 도쿄대학을 누르고 아시아 1위를 차지했다.”_33쪽
전시 수도 충칭 시절의 국립중앙대학 임시교사. 체육시간도 난징 시절과 별 차이가 없었다._29쪽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군이 중국 동북(東北) 지역을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이 시작됐다. 중국은 일본군의 침략에 맞서 수도를 난징(南京)에서 충칭(重慶)으로 옮기며 장기전을 준비한다. 일본군의 공격은 거셌다. 특히 일본 폭격기의 공습이 위협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임시 수도 충칭에는 5년간 폭탄 2만 1,593발이 쏟아졌다. 충칭 대공습이라 불리는 일본군의 무차별적 폭격에서 만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놀라운 점은 이렇게 격렬한 전쟁통에서도 교육은 계속 이어졌다는 점이다. 난징의 국립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수도 이전과 함께 충칭으로 옮겼다. 총장 뤄자룬(羅家倫)은 “교육에 필요한 물건들이다. 학생들이 뜯어보고 조립할 항공기 3대와 해부용 시신 24구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충칭으로 옮겨야 한다”며 교육자재까지 충칭으로 옮겼다. 학생들은 일본군 공습이 벌어지는 밤이면 횃불을 들어 시민을 격려했고, 공습이 잠잠해지면 학업에 매진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중앙대학은 전쟁이 끝난 후인 1948년, 도쿄대학을 누르고 아시아 최고 대학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인재가 없으면 혁명도 없다
타이완 2·28사건
“수재들의 반역은 성공한 적이 없다. 말이나 계획만 그럴듯할 뿐 결국엔 실패로 끝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험과 용기가 부족하고 무장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_97쪽
타이완에서 철수하는 국민당군. 1946년 2월, 지룽(基隆). 1년 후, 2·28사건이 발생했다._89쪽일제 패망 후 타이완에 장제스의 중화민국 군대가 주둔한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중화민국의 타이완 통치 방식은 일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이에 분노한 타이완인들이 들고일어났다. 2·28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시작은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정부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았다는 이유로 한 여인이 단속반에게 구타를 당했다. 이 여인은 단속반에게 잘못을 빌었지만 단속반은 이 여인을 피범벅으로 만들었다. 중화민국 정부에게 불만이었던 타이완인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2월 28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국 본토에서 군대가 파견된다. 진압은 신속하고 무자비했다. 저항은 무기력했다. 구심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타이완인들은 경험과 용기가 부족했다. 무엇보다 타이완인을 제대로 이끌 수 있는 ‘인재’가 없었다. 한 달 만에 사태는 진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버려진 인재, 국민당 천씨 형제
선생과 왕, 쓰촨 류씨 형제
“형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훌륭한 교육자였다.”_171쪽
1928년 5월, 국민당 제1군이 베이징 인근 바오딩(保定)을 점령하자 북양정부는 경악했다. 천리푸(왼쪽 둘째)도 북벌군 총사령부 특별당부 상무위원 자격으로 참전했다. 1928년 5월 28일, 바오딩._148쪽제3장은 장제스의 최측근으로서 국민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는 데 일조한 천씨 형제와 장제스와 대립했던 쓰촨의 류씨 형제 이야기다.
국민당 천씨 형제는 장(蔣)씨(장제스), 쿵(孔)씨(쿵샹시), 쑹(宋)씨(쑹쯔원)와 함께 중국 4대 가족이라 불렸던 천(陳)씨로 천궈푸·천리푸를 말한다. 이들은 장제스 권력의 핵심 인사로 그에게 자금을 대주면서 장제스가 군권을 장악하는 데 물불 가리지 않고 큰 힘을 보탠다. 그러나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자 장제스는 천씨 형제를 속죄양으로 삼는다. 인재는 때론 이렇게 한순간에 버려지기도 한다.
쓰촨 류씨 형제란 쓰촨의 왕이라 불렸던 류원차이와 그의 동생 류원후이를 일컫는다. 이들은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면서 권력을 잃었고, 사후 문화대혁명 때 악덕지주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훗날 류씨 형제, 특히 류원차이가 재평가된다. 그가 ‘교육’에 힘썼기 때문이다. 책읽기를 좋아한 그는 원차이중학(文彩中學)을 설립했다. 교사의 봉급은 일반 학교의 두 배였지만 학생들의 학비는 받지 않았다. 학교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학생이 지방 관리의 마름에게 조롱당했다는 말에 마름을 잡아다 두들겨 패고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복을 입게 했다.
신중국의 어른들
적당히 황당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만든 새로운 역사
“나는 한 명의 전사(戰士)일 뿐, 쓸모 있는 노병(老兵)이 소원이다.”_247쪽
옌안 5로는 한자리에 모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화가 우산밍(吳山明)이 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_226쪽제4장은 신중국 건국세대 런비스와 건국세대의 스승인 옌안 5로에 대한 이야기다. 런비스는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오쩌둥,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중공 5대 영수다. 그는 모범적인 정치가의 전형이었다. 아랫사람 잘 챙기고 윗사람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중국인들은 이런 그를 평생 무거운 짐을 진 채 어려운 길만 걸었다 하여 ‘중국인의 낙타’라고 했다.
옌안 5로는 중공 5대 영수를 비롯한 건국세대의 스승들이다. 쉬터리(徐特立), 셰줴짜이(謝覺哉), 둥비우(董必武), 린보취(林伯渠), 우위장(吳玉章)이 이들로, 마오쩌둥의 대장정이 끝난 후 공산당 중앙위원회 소재지가 옌안이었는데 이 시절에 활약한 인물들이라 옌안 5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부국강병을 위하여
중국의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사
“우리를 무시하고 공격하면 우리는 방어하고 반격해야 한다. 그것도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방어라야 한다. 그러려면 어제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_363쪽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제1차 핵실험 성공을 보고하는 장아이핑(오른쪽). 1964년 10월 16일 오후, 신장 위구르 자치구 뤄부보._368쪽제5장은 중국이 육성한 인재와 그 인재들이 키우고 개발한 중국의 근대산업 및 핵무기에 관한 이야기다. 중국은 항일전쟁 시기에도 인재를 육성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중공 근거지 옌안은 거대한 교육장으로 변했는데, 마오쩌둥은 이곳에 간부교육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그렇게 교육받은 이들은 1949년 신중국 건국 후 각 부문으로 흩어져 산업 발전에 공을 세웠다.
마오쩌둥은 총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총은 싫어했다. 평생 총을 가까이 두지 않았다. 하지만 절세의 군사가답게 무기를 매우 중요시했다. 무기 개발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정권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단정했을 정도로 중국 역사상 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장 먼저, 그것도 가장 심각하게 인식했다.
그런 마오쩌둥에게 미사일은 없어선 안 될 핵심 무기였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일찍이 국공내전 때부터 우수한 이공계 학생들을 선발해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신중국 건국 후 그들을 모두 불러들여 산업 발전과 무기 개발에 앞장섰다. 그중 칼텍에서 미사일을 연구하던 첸쉐썬(錢學森)의 활약이 컸다. 미사일 기밀을 알고 있는 그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미국과 그를 데려오려는 중국은 힘든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중국의 핵무기 개발은 10년이 걸렸다.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첫 번째 핵실험 성공에 환호하는 과학자들._360쪽핵무기 역시 마오쩌둥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고 소련이 1차 핵실험에 성공하자 그는 저우언라이를 불러 핵개발을 재촉했다. 소련에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해 완전히 독자적으로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 책임을 맡은 국방과학위원회 부주임 장아이핑(張愛萍)이 “감자 키우는 일이라면 모를까, 원자탄에 관해 아는 게 없다”며 난색을 표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간 육성한 중국 과학자들의 실력을 확인한 후 곧 10년 이내에 핵실험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표했다. 그의 말대로 중국은 1964년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에 마오쩌둥의 반응이 매우 흥미롭다. “어차피 써먹지 못할 물건이다. 미국이나 소련이 우리가 핵보유국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된다.” 지금까지 핵무기 개발을 독촉해온 그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지만, 핵개발에 집착하는 북한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