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
여해 강원용
강원용 목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이자 기독교 사회운동의 선구자다. 1917년 함경도 산골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기독교에 입문했으며 18세에 북간도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해 수학하며 꿈을 키웠다.
해방 후 청년 대표로 좌우합작운동에 참가했으며, 김재준 목사와 함께 경동교회를 설립했고 아시아의 진보 교단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에도 공헌했다.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라인홀드 니버와 폴 틸리히에게 신학을 배운 뒤 귀국하여 세계 신학계의 흐름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세계교회협의회(WCC)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계 교회와 아시아 교회, 한국 교회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제3세계가 서구사회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는 ‘교육과 실천’을 위해 1965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인간화를 이루고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광범위한 대화운동을 펼쳤다. 1970년대에 운영한 ‘중간집단교육 프로그램’은 사회 갈등의 조정과 통합을 매개로 한 인간화운동으로 지금까지도 사회운동의 모범적인 모델로 평가받는다.
말년에는 ‘평화포럼’을 주도하며 한반도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公義)가 이 땅에서 이뤄지길 소망하며, 신앙인으로, 시대의 스승으로,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로 평생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2006년에 서세(逝世)했다.
모란장(1969), 동백장(1972), 청룡장(1988), 한신상(1997), 니와노평화상(2000), 만해평화상(2002), 국민훈장 무궁화장(2006)을 받았다.
『강원용 인간화의 길 평화의 길』은 강원용 목사가 주창한 사상적 개념인 ‘인간화’ ‘사이 너 머’ ‘대화운동’ 등을 분석하며 그가 평생 펼친 평화와 상생 운동의 뿌리를 따라간다.
목차
여해 강원용 평전을 발간하면서
두 눈으로 바라보다ㅣ머리말
대립을 넘어 화해와 상생으로ㅣ서론
1. 신앙 신학, 사회참여
2. 출생과 자각
3. 해방의 격동에서
4. 인간, 전쟁, 하나님
5. 대탈출과 대비약
6. 두 개의 혁명 그리고 더 작은 악
7. 제3지대에서 그리고 두 눈으로
8. 대화운동
9. 인간화, 중간집단, 아케데미사건
10. 군부독재와 민주화
11. 두 눈으로 본 통일과 남북관계
12. 메세지 : 화해와 평화의 길로
대출항과 대귀환의 삶, 대화와 상생의 철학 ㅣ 맺는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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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박명림
출판사리뷰
‘여해 강원용 평전’은 한국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종교지도자이자 평화운동가 여해(如海) 강원용(姜元龍) 목사(1917~2006)의 삶과 사상을 다룬 책이다. 전 3권으로 기획된 이번 평전은 강원용 목사의 활동을 각각 ‘목회’ ‘사회’ ‘방송’ 분야로 나눠 더욱 깊이 있는 분석을 시도했다.
목회 분야 저자인 박근원 박사는 청소년기부터 강원용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자란 한국의 대표 신학자로 한신대학교 학장을 지냈다. 2016년 강원용 목사 서세(逝世) 10주기 때 발간된 설교선집 『돌들이 소리치리라』의 편저자이기도 하다.
사회 분야 저자는 박명림·장훈각 연세대학교 교수로 한국정치를 전공한 진보적이고 유능한 정치학자다. 이 둘은 기독교신자이기는 하나 다른 저서의 저자들과 달리 강원용 목사님과는 개인적 친분이 없다.
방송 분야 저자는 이경자 전 경희대학교 부총장, 강대인 전 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장, 정윤식 강원대학교 교수, 홍기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로 홍기선 교수가 4인 공동저자 간의 좌장 역할을 맡았다.
한길사와 ‘(재)여해와 함께’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평전은 2017년 올해가 강원용 목사 탄신 100주년, 종교혁명 500주년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더한다.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
여해 강원용
강원용 목사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이자 기독교 사회운동의 선구자다. 1917년 함경도 산골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나 15세에 기독교에 입문했으며 18세에 북간도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해 수학하며 꿈을 키웠다.
해방 후 청년 대표로 좌우합작운동에 참가했으며, 김재준 목사와 함께 경동교회를 설립했고 아시아의 진보 교단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장로회 창립에도 공헌했다.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서 라인홀드 니버와 폴 틸리히에게 신학을 배운 뒤 귀국하여 세계 신학계의 흐름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세계교회협의회(WCC)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계 교회와 아시아 교회, 한국 교회를 잇는 가교 역할을 했다.
제3세계가 서구사회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는 ‘교육과 실천’을 위해 1965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설립하여 인간화를 이루고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한 광범위한 대화운동을 펼쳤다. 1970년대에 운영한 ‘중간집단교육 프로그램’은 사회 갈등의 조정과 통합을 매개로 한 인간화운동으로 지금까지도 사회운동의 모범적인 모델로 평가받는다.
말년에는 ‘평화포럼’을 주도하며 한반도 위기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公義)가 이 땅에서 이뤄지길 소망하며, 신앙인으로, 시대의 스승으로,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로 평생 노력하는 삶을 살다가, 2006년에 서세(逝世)했다.
모란장(1969), 동백장(1972), 청룡장(1988), 한신상(1997), 니와노평화상(2000), 만해평화상(2002), 국민훈장 무궁화장(2006)을 받았다.
“격동의 시대를 산 복음 증언의 선두주자”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 한국 교회와 사회를 향하다
『여해 강원용 목사 평전』 _ 박근원 지음
경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강원용 목사의 목회 활동을 다룬 『여해 강원용 목사 평전』은 그의 기독교 신앙의 뿌리와 목회 현장의 역동성을 다뤘다.
강원용 목사는 세상을 선하다고 보지는 않는다. 세상을 ‘이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전투하러 가야 할 곳이요, 선교의 장이다. 그리스도인은 악한 세상을 정복하거나 승리하기 위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가는 것이다.
강원용 목사의 세상을 향한 설교 역시 철저히 성서 말씀에서 찾은 원리에서 온 것이고, 또한 그것으로 풀어간다. 그는 우리 근대사의 실패들을 수평적인 요소들, 곧 인간적이고, 세상의 정치 경제나 학문이 아닌 ‘해방의 제1원리’의 망각에서 찾는다. ‘해방의 제1원리’란 바로 모세가 사막에서 만난 야훼 하나님의 뜻이다. 수직적 차원의 성찰과 삶이 없는 까닭에 우리의 근대사의 가능성들은 다 실패로 돌아갔다.
나아가 강원용 목사는 설교를 성서의 원리로 신학화한다. 이 신학화는 그의 성서해석학이기도 하다. 성서와 신학은 그의 신학사상만이 아니라 설교에도 적용된다.
- 제5부「경동교회의 강단 설교」, 271쪽
기독교는 오직 ‘사랑’ 외에 다른 강령을 가지고 있지 않다. 믿음으로 사는 길은 “하나님의 길은 인간의 길과는 다른 것”(「이사야」 55장 6~9절)임을 깨닫고 우리와는 다른 하나님의 길을 알기 위해 조용히 기다리며, 겸손과 부단한 회개를 통해 늘 열린 자세로 사는 것이다. 이럴 때만 서로 폭넓은 대화를 하게 되고, 대화 속에서 서로를 받아들일 때 민주주의도 실현되고 통일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역사를 망치는 것은 인간의 약함 때문이 아니라 강함 때문이다. 강원용 목사는 인간의 혁명이 아니라 성령의 혁명으로 설교를 맺는다.
“성령의 역사는 진공 지대에 바람이 불어오듯이 우리의 마음이 비어 있는 약한 곳에 불어온다. 확신을 품고 성급하게 혁명적으로 행동할 때 창조하는 힘이 아니라 파괴하는 힘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마도 윤여준이 강원용 목사의 실천노선과 그 노선의 토대를 가장 정확히 전해주지 않나 생각된다. 그의 강 목사에 대한 이해는 이렇다. 강원용 목사는 한국사회의 변혁을 추구한 혁명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추구한 방식은 비혁명적이었다. 변혁을 추구한 혁명가도 대단하지만, 그 변혁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성취해갔다는 것이 더 위대하다. 혁명은 보통 폭력적인 방법으로 기존체제를 뒤엎는 것인데, 이런 면에서 강원용 목사는 철저한 개혁주의자다.
- 제6부「한국교회와 사회의 빈들에서」, 400~401쪽
강원용 목사만의 독특성과 위대성이 있다. 그것은 자기화시킨 신학사상을 행동으로 구현한다는 점이다. 이런 면에서 그는 기독교 윤리학자이지만 ‘응용신학자’요, 딱히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Doing Theologian’라고 할 수 있다. 강원용의 신학사상은 그의 신학이론이 아니라 그의 실천에서 찾는 것이 중요하다. 강원용 목사의 행동 속에 니버나 틸리히의 신학사상이 육화(肉化)되었고, 그 육화된 실천은 그의 지도력으로 나타나 격동기의 우리 현대사에서 화해와 평화 그리고 생명의 열매들을 맺었다. 강원용 목사는 양극을 넘나든 지도자였다.
정권이 악하다고 해서 거리를 두고 방관하거나 무조건 반대하지 않았다. 반면에 악에 저항한다고 해서 그 저항 세력에 무조건 동조하지도 않았다. 강 목사는 악을 분명히 직시하고 그에 저항하는 삶의 정당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양극의 극단적 대립은 사태의 해결이 아니라 더 큰 희생만 불러오기 때문에 강 목사는 부당한 정권과도 대화하면서 정당한 정의를 점진적으로, 부드럽게 성취해간다.
- 제8부「비범한 지도자」, 496~497쪽
“대출향과 대귀환의 삶, 대화와 상생의 철학”
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between & beyond) 제3지대의 삶을 꿈꾸다
『강원용 인간화의 길 평화의 길』 _ 박명림, 장훈각 지음
『강원용 인간화의 길 평화의 길』은 강원용 목사가 주창한 사상적 개념인 ‘인간화’ ‘사이 너 머’ ‘대화운동’ 등을 분석하며 그가 평생 펼친 평화와 상생 운동의 뿌리를 따라간다.
강원용은 평생 한 번도 급진주의적 운동에 참여하거나 보수주의로 회귀하지 않았다. 그가 이 두 극단으로부터 수없이 비난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생각을 실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가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는 인간의 해방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그의 믿음에 기인한다. 예수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악의 영으로부터의 해방, 모든 고난으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했다. 여기에는 가난하고, 짓눌리고, 좌절하고, 죄책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정치적?경제적 해방도 물론 포함된다. 그리고 해방될 대상은 핍박받는 억울한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었다.
햇빛이 모든 인간에게 비추듯이 하나님의 사랑 역시 특정한 일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미치는 그런 사랑이었다. 강원용은 기독교인이라면 인간들의 해방을 위해 정치?경제?사회?종교적 모든 행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실천은 신앙의 연장선에 있었다. 복수(復讐)로는 예수의 해방선언을 이룰 수 없었다.
강원용은 핍박받는 사람들이 다시 빼앗는 자의 지위에 오르는 세상은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그조차 넘어서서 화해와 재결합, 상생의 길을 열어 성서에서 말하는 근본악을 극복하는 세상을 꿈꿨다. 이는 강원용 신학과 철학의 요체였다. 그는 예수가 땅에서 이루고자 했던 해방에 대해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길을 제시하고 있다.
- 제1장「신앙, 신학, 사회참여」, 41쪽
강원용이 사회참여활동을 하면서도 놓지 않으려 했던 기본적인 원칙들이 있다. Between and Beyond(중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제3지대, 근사적 접근(approximately approach) 등이다. 이 바탕에는 강원용의 화해의 신학이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Between and Beyond’는 니버의 저작에서 얻은 통찰을 이론화하는데 기준이 되었던 원칙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스스로 ‘경계선상’의 신학이라고 했던 것과도 닮아 있다. 박종화가 명쾌하게 언명하고 있듯이 강원용의 삶의 지평은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었다. 강원용은 현실 속에서 양극단을 화해시키려 부단히 노력했으며 이 둘을 뛰어넘는 가치관을 제시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강원용에게 전자는 ‘Between’이었으며, 후자는 ‘Beyond’였다. 강원용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평생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시도하며 살아왔다. 나는 이상주의자도 될 수 없었고 낭만주의자로 살 수도 없었다. 또 허무주의자로도 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모든 것이 대립과 양극화된 상황 속에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 사회적으로 일관되게 내가 지켜온 자리는 양극의 어느 쪽도 아니고 그렇다고 중간도 아닌, 대립된 양쪽을 넘어선 제3지대였다.”
제3지대는 현실정치에서는 균형의 길로 나타났다. 자신만이 옳다는 믿음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이 길에 설 수 없었다. 강원용은 인간의 모든 결정, 전제, 행동은 항상 잘못이 있으며 제한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강원용은 스스로 절대적인 선(善)이라고 생각하는 보수파와 급진파의 길에 몸을 두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보수와 혁신을 화해시키면서도, 제3의 길 또는 제3지대에서 양심과 타협하지 않고 싸워나가는 길을 선택했다. ‘보수적 사고의 굳어버린 비생명(非生命)을 타개하면서, 또한 개혁 속에 숨겨져 있는 개악의 요소를 지적’함으로써 새로운 사회발전의 길을 찾는 것이 곧 강원용의 제3의 길이었다.
때문에 강원용은 항상 고뇌했다. 박정희정권이 유신체제를 선포하여 저항운동이 한국사회를 휩쓸고 지나갈 때에도 그는 저항의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체제에 순응할 수도 없었고 산속으로 피해 달아날 수도 없었으며, 체제를 전복하고 신체제를 구축하려는 급진적 저항세력에 동조할 수도 없었다. 강원용은 중간집단을 육성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체제변화와 개혁의 원동력이 민중 속에서, 민중에 의해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근사적 접근이었다.
- 제1장「신앙, 신학, 사회참여」, 43~44쪽
강원용에게 화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비롯한 개념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십자가의 구원과 해방을 통해 사랑에 기반한 인간관계를 의미했다. 미움을 미움으로, 악을 악으로, 복수를 복수로 갚지 않는 것, 그리하여 서로 이해하며 사랑함으로써 공존하는 것이 화해였다. 화해는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강원용의 이상이 응축된 개념이었다. 중간집단에게 부여된 가장 중요한 의무도 대화를 통해 사회 내에서 화해를 실현해내는 일이었다.
- 제9장「인간화, 중간집단, 아카데미사건」, 238쪽
“방송의 공공성이라는 불씨를 마지막까지 수호한 사람”
제4차 산업혁명 시대, 방송은 문화매체라는 강원용 목사의 방송철학은 유효하다
『강원용과 한국 방송』 _ 이경자, 강대인, 정윤식, 홍기선 지음
『강원용과 한국 방송』은 강원용 목사가 제도권 방송과 대화한 기록이다. 강원용 목사는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1962~67), 방송위원회 위원장(1988~91), 방송개혁위원회 위원장(1998~99) 등 방송기구의 수장을 세 번이나 맡았는데 방송이 사회구성원의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 명의 저자는 시기별로 강원용 목사의 방송철학과 활동을 시대상황 분석과 아울러 정리했으며, 민간 싱크탱크인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진행한 방송대화모임의 주제와 영향력 등에 대해서도 함께 분석했다.
강원용은 전파는 특정 정권이나 이해집단의 것이 아닌 오로지 국민(시청자)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방송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그러려면 정치권력을 포함한 모든 이해집단의 영향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철저한 공영론자다. 그가 꿈꿨던 ‘좋은 방송’은 인간의 존엄을 구현하는 ‘인간화’를 위한 방송이다. 그것을 위해 방송내용의 품격과 질이 중요하고, 정치권력을 비롯해 자본, 다양한 이해집단의 이해에서 독립해야 한다는 소리를 한결같이 외쳤다. 한국 방송에 대한 강원용의 목표는 이상적이었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방법은 현실적이고 실천적이었다. 좌절을 거듭하면서도 다시 방송계로 돌아온 그의 모습에서 혁명적 과업을 실천하려는 전사의 면모가 보인다. 한국 방송에서 그는 이상주의자인 동시에 전사였다.
- 제1부「강원용과 방송윤리위원회: 도전과 좌절의 시작」, 59~60쪽
1988년 7월부터 1991년 3월까지 방송위원장으로 재임하면서 강원용이 펼쳐보려던 방송철학은 정치적·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방송의 공공성과 공익성, 공정성을 붙잡고 나아갔던 그의 행동은 시종여일했다고 볼 수 있다. 2년 7개월간 방송법이 바뀌고 방송위원회의 위상과 조직이 조금씩 변하고, 정치권력과 상업자본의 방송개입이 더욱 노골화되는 상황에서도 방송의 질적 가치와 품격을 지켜내기 위해 공적 책무를 중시한 그의 방송철학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방송위원장 재임 시 부단히 노력했는데도 결국 권력 때문에 물러났던 강원용은 1993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어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이를 반기면서 「권력으로부터 방송을 구출하라」는 제언하에 다음 글을 내놓았다.
“30년간의 군사통치가 끝나고 문민정치가 시작된다. 문민정치는 국민이 힘을 갖는 시대다. 나는 이 일을 해낼 주역은 방송이라고 생각한다. 군사통치 시대의 방송은 정권의 홍보물로 국민을 일방적으로 설득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문민정치 시대는 정권의 소유물이던 방송이 전파의 소유주인 국민의 방송으로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제도적인 변화가 긴급히 일어나야 한다.”
- 제2부「강원용과 방송위원회」, 97~98쪽
방송개혁위원회는 그 성과와 한계가 분명하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한 사회적 평가를 받았다. 다양한 이해집단이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으며 지난한 논의과정에서도 구성원 간 화합과 타협의 정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강원용과 방송개혁위원회를 통해 공보처 폐지와 방송위원회 출범이라는 방송민주화를 이루고 위성방송을 도입하는 등 방송산업화의 초석도 다졌다.
- 제3부「강원용과 방송개혁위원회」, 128~129쪽
강원용이 40여 년에 걸쳐 방송대화모임을 주선한 것도 권력의 하부 구조로 종속되었던 방송을 열린 대화마당(공개성)으로 끌어내 지적이고 합리적인 논의를 거쳐 의견을 수렴하려는(공통성)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가 실제로 가능했던 것은 그의 진취성과 강한 리더십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사심 없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던 강원용의 몸가짐이 좌우 어디에서도 비난받지 않고 방송대화모임을 지켜준 울타리가 된 것 같다.
오늘날의 방송은 강원용이 방송대화모임을 시작하던 50년 전과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상당히 달라졌다. 40년간의 방송대화모임을 돌이켜 보면 이러한 변화가 일부 반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강원용이 현재 방송계에서 벌어지는 시장쟁탈전을 본다면 못마땅해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동안 방송시장은 공급자 위주에서 수용자 위주로 중심축이 변했다. 그래서 방송산업론자들은 시청자의 선택과 판단에 최종적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소피스트의 궤변 같다. 마치 황사로 오염된 공기보다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을 탓하는 것 같다.
- 제4부「강원용과 크리스챤아카데미」, 187~188쪽
2017년
강원용을 다시 만나다
제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로봇 등 현대사회는 큰 변화의 파고를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강원용 목사의 삶과 사상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각 권의 주제를 살펴봄으로써 답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해 강원용 평전’은 “격동의 시대를 산 복음 증언의 선두주자 강원용” “대화와 상생의 철학을 주창한 강원용” “방송 공공성의 불씨를 지킨 강원용”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마치 숨쉬기를 멈추지 않듯 강원용 목사가 평생 놓지 않았던 이 주제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여전히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대화를 멈추고 극단적인 편 가르기로 서로를 헐뜯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방송의 공공성 실현은 ‘정치적 카드’로 남발될 뿐 여전히 요원한 과제다. 사회적 갈등과 문제를 대화로 해결해 상생의 가치를 실현하고, 종교인들에게는 참복음의 증언을 요청한 강원용 목사의 목소리가 그리운 이유다.
강원용 목사는 생전 자신을 종교인도 사회개혁가도 정치가도 아닌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다. 아무도 없는 ‘빈 들’에서 외치는 이는 선지자다. 남보다 한발 앞서 살펴보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논쟁적이고 고독하다.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 ‘빈 들’은 ‘옥토’가 되었다. 수많은 사람이 빈 들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을 듣고 모였다. 농부가 빈 땅에 씨를 뿌려 열매를 수확하듯 격동의 현대사에 자신의 몸을 던진 강원용 목사를 따라 ‘들을 귀 있는’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이다. 그들은 강원용 목사의 유지를 이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계속해서 고민하고 대화한다. 새 씨앗이 싹트는 데 ‘여해 강원용 평전’이 조금이나마 일조했으면 한다.
여해 강원용 연보
1917년 7월 3일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다보골), 유교 가정의 장손으로 출생
1940년 김명주(金明珠)와 결혼, 1남 2녀의 자녀와 1남 6녀의 손자녀를 둠
2006년 8월 17일 소천
학력
1931년 기독교에 입교하고 차호공립보통학교 졸업
1935년 농업에 종사하여 8인의 가족을 부양
1940년 일본 도쿄 메이지 학원 영문학부
1948년 한신대학교 신학 학사
1956년 미국 뉴욕 유니언 신학교 대학원 기독교사회윤리학 석사
1956년 미국 뉴스쿨 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박사 과정 수학
1962년 캐나다 매니토바 대학교 명예 신학 박사
1994년 원광대학교 철학 명예박사
1995년 이화여자대학교 문학 명예박사
주요 경력
1958년~1986년 경동교회 담임목사
1961년~1983년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중앙위원
1962년~1967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
1963년 크리스챤아카데미(구 대화문화아카데미/ 현 재단법인 여해와 함께) 원장, 명예이사장
1986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회장, 명예회장
1986년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회장
1987년~1988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문화예술행사추진위원회 위원장
1988년 방송위원회 위원장
1994년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공동의장, 명예의장
1997년 제27회 세계연극제(ITI) 대회장
1998년 통일부 통일고문회의 의장
1998년 방송개혁위원회 위원장
1998년 실업극복국민운동위원회 공동위원장
2000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
2000년 사단법인 평화포럼 이사장
2004년 재단법인 실업극복국민재단 이사장
주요 저서
『새시대의 건설자』
『폐허에의 호소』
『자유케 하는 진리』
『인생과 종교』
『Zwischen Tiger und Schlange』
『강원용과의 대화』
『여해 강원용 전집』
『믿는 나 믿음 없는 나』
『빈 들에서』
『강원용 나의 현대사-젊은이에게 들려주는 나의 현대사 체험』
상훈
모란장(사회교육 공로) 1969
동백장(사회교육 공로) 1972
청룡장(올림픽 공헌) 1988
한신상 1997
니와노평화상(일본) 2000
만해평화상 2002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