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단 한 번도 더듬어보지 않는다.”
사실 더듬어본다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살고 있는 곳은 현실과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그 성격이 일상생활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11쪽)
삶은 스쳐지나간 기억들로 구성되고, 기억은 찰나의 느낌들이 켜켜이 쌓이며 만들어진다. 그러나 기억은 사람들에게 의식되지 못한 채 무의식 속에 잠겨 있다. 기억은 찰나의 느낌이기에 이성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고, 특별하기보다는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억한다는 것은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느낌들을 의식으로 꺼내는 행위이며, 스쳐지나간 찰나를 붙잡아 삶을 이어나가는 행위다.
상하이 대표 여류작가 왕안이(王安憶)는 자전적 에세이 『상하이, 여자의 향기』(원제: 남자와 여자, 여자와 도시男人與女人, 女人與城市)에서 일상에 녹아든 찰나의 느낌들을 의식으로 꺼내 오랫동안 자신이 살아온 상하이를 재구성한다. 그렇게 재구성된 상하이에서 그녀는 삶을 잇는다.
목차
제1부
상하이를 찾아서
상하이와 베이징
바다 위의 번화함
거리 풍경
상하이 서양식 주택
타이캉로 1958
주인의 하늘
석양
가로등 아래
집 안과 집 밖
과거의 생활
피곤한 도시인
상하이는 코미디다
상하이와 소설
상하이 음식
성황묘의 구경거리와 주전부리
도처의 농민공들
창강의 지류에서
영원히 용속해지지 말자
더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제2부
남자와 여자, 여자와 도시
여성의 얼굴
여성 작가의 자아
물질의 세계
상하이의 여성
생사와 이별, 모든 것을 당신과 함께
복숭아를 던져주기에 옥구슬로 보답했지요
우울한 봄
공간은 시간 속을 흐른다
천사창 아래서
구체적이고 사소한 사물들의 집합체로서의 상하이 ? 옮긴이의 말
저자
왕안이
출판사리뷰
섬세하고 감각적인 상하이 풍경
2부로 구성된 『상하이, 여자의 향기』에서 제1부는 상하이에 대한 일상적 기억들이 펼쳐진다. 왕안이는 거리 풍경, 음식, 주택 등과 이곳 사람들의 표정, 말투, 성격 등을 감각적인 문체로 묘사하며 상하이 풍경을 한 편의 그림 같은 글에 담아낸다. 풍경 속 상하이는 때론 거칠고 때론 순하다. 특히 「상하이와 베이징」에서 상하이를 베이징과 대비시키며 자연 환경, 도시 분위기, 사람 성격 등을 세밀하게 서술한다.
바람의 계절이 돌아오면 베이징의 하늘을 거대한 바람이 호호탕탕 거친 기세로 행군하지만, 눈으로는 바람이 있는지 없는지 구별이 되지 않는다. ……반면 상하이의 바람은 훨씬 가늘고 귀엽다. 상하이의 바람은 아주 좁은 거리와 골목 구석구석을 뚫고 다니다가 손바닥만 한 공터에서 회오리를 일으켜 종잇조각이나 낙엽을 날려 이리저리 떠돌게 한다. (38쪽)
베이징은 감성적이다. 베이징에서 어느 장소를 찾아가려면 지명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환경의 특징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이에 비해 상하이 택시 기사들은 개괄적으로 추리하는 능력이 있다. 그들은 지명만 가지고도 손님이 가고자 하는 곳까지 무사히 데려다준다. (43쪽)
베이징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인 기질이 있어 입을 열었다 하면 훌륭한 글이 된다. ……그에 비하면 상하이 사람들은 몹시 거친 편이다. ……그들은 현실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고 효율을 중시하며 일의 성패로 영웅을 논한다. (42쪽)
감각을 통해 펼쳐지는 상하이 풍경은 ‘모던’과 ‘보수’로 특징지을 수 있다. 모던은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일이십 년 만에 동양의 파리라는 별칭을 얻게 된 상하이의 현대성이고, 보수는 급속도로 도시화된 상하이에 남아 있는 옛 모습이다. 이는 「도처의 농민공들」에서 명료하게 나타난다. 왕안이는 특히 사람들을 관찰하여 모던과 보수의 교차점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이를 유려하게 드러낸다.
이 도시 사방에는 농민공(農民工, 농촌에서 도시로 온 노동자)이 가득하고 그들이 흘리는 땀 냄새와 시골 방언 억양이 떠다니고 있다. ……크고 작은 거리와 골목의 담장 아래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도 눈에 띈다. 이런 모습들은 이 도시가 갖고 있는 부르주아적 풍격을 거칠고 조악하게 바꿔놓는다. (121쪽)
이처럼 제1부에서는 상하이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풍경으로 그리지만 제2부에서는 사람과 도시 나아가 삶 자체로 뻗어나간다.
남자와 여자, 여자와 도시
왕안이는 먼저 여성에 주목한다. 모던과 보수가 어우러지는 도시 상하이에서 보수에는 남자가 모던에는 여자가 있다. 그러나 왕안이는 남성에 의존적인 전통적 여성상에 대해 특별한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 대신 여성의 특성을 발견하고 이를 사람으로, 도시에서의 삶으로 차례차례 확장시킨다.
「여성 작가의 자아」에서 왕안이는 집단의식이 강한 남성 작가의 글에 비해 여성 작가의 글에는 ‘자아’가 중요한 창작 요소라고 말한다.
여성 작가들에게는 자아가 가장 중요한 창작 요소였고, 자신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었다. ……중국의 여인들이 다른 나라의 여인들보다 더 오랫동안 좁은 천지 안에 갇혀 살아온 반면, 중국의 남자들은 다른 나라의 남자들보다 정치와 도덕에 대해 좀더 큰 인생의 이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 여인들의 자아의식은 더욱 강렬해지고 남성들은 집단의식을 더욱 강화했던 것이다. (166쪽)
이어지는 「물질의 세계」 「상하이의 여성」에서 여성의 자아의식은 강인함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 강인함은 모던과 보수가 어우러지는 상하이에서 성별에 따른 이분법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분투(奮鬪)라고 표현할 정도로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는 도시에서 결국에는 삶 그 자체만 남기 때문이다.
상하이라는 이 단단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곧고 강직한 성격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영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얼마간이라도 이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도시의 여자들이 강인하게 자신들의 존재와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78쪽)
상하이 여성들은 어느 정도 남성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 상하이 남자들도 그녀들을 완벽하게 여성으로만 보지 않는다. 분투노력해야 하는 임무도 항상 똑같이 주어진다. 그래야 남녀 모두 그 빽빽한 건물 지붕 꼭대기에서 발붙일 곳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181쪽)
이렇게 도시 풍경에서 자아로, 자아에서 강인함으로 이어지는 글은 강인함에서 다시 도시로 되돌아가 모던과 보수가 공존하는 상하이를 생존을 위한 분투의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렇게 재구성된 상하이에서 왕안이는 자신의 삶을 기억해낸다.
삶을 잇는 기억의 편린들
1954년 중국 난징에서 태어나 다음 해 상하이로 이주한 후부터 지금까지 그곳에서 살고 있는 왕안이에게 상하이는 무수한 기억의 편린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녀는 기억의 편린들을 조직화하지 않는다. 다만 기억해낸다. 어렸을 때 살았던 집, 그 집에 있던 가구들, 문화대혁명 때 분위기에 휩싸여 ‘야만적인 장난꾸러기’ 짓을 하던 아이들, 그리고 어느 봄날 내리쬔 햇살이 주는 느낌들……. 이토록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기억들은 스쳐지나간 찰나의 모습 그대로 충실히 재현된다.
그 시절(문화대혁명)에는 세상이 온통 어지러웠다. 도처에 깃발이 나부꼈고 어디든지 싸움이 벌어졌다. (221쪽)
내게는 봄날 오후가 항상 우울하고 서글프다. 봄의 햇살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처연한 느낌도 더 강해져 점차 우울함으로 바뀐다. (236쪽)
기억한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낸다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다.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삶에 직접 맞닿아 있는 기억들은 이처럼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안이는 그 편린들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럼으로써 삶을 조금씩 잇는다.
그녀는 왜 이토록 ‘기억한다’는 지난한 과정을 해내려는 것일까. 그것이 분투하는 삶을 이어가는 강인함의 원천이기 때문일까. 사소하게 보이는 그 기억의 편린들이 말이다.
195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역사에 속해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정말 만족스럽다. 이 시대는 내가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게 해주었고, 충실하게 나의 사상을 개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다음, 나를 아주 힘든 곤경으로 밀어 넣어 계속 학습하고 인식하며 실천하고 경험하게 했다. (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