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평범한 노동소득만으로는 ‘돈이 돈을 버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구조, 생활인은 모두 알고 있지만 경제학자들만 애써 외면하고 침묵하는 현실. 이러한 경제 현실에 대해 경제학이 줄 수 있는 답을 찾기 위해 주류경제학자 주상영과 비주류경제학자 류동민이 머리를 맞댔다. 이들의 관심사가 수렴된 것은 부쩍 어려워진 자영업자들의 처지 그리고 ‘삼포’니 ‘오포’니 하는 젊은 세대의 우울한 전망을 깨닫고 함께 고민하면서부터다. 때마침 2014년 대중적으로도 크게 화제가 된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은 이들에게 강렬한 지적 자극을 주었다.
한 사회에서 어느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많은 소득을 얻는 이유는 무엇인가, 소득분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화하는가, 성장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가, 불평등은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등이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다. 즉, 경제학이 분배 그리고 성장의 문제에 대해 어떤 논의를 해왔는지 살핀다. 별다른 근거나 대책 없이 자기주장만 반복하는 웅변도, 현실과 괴리된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는 이론도 아니다. 한국의 경제학자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학문적으로도 답을 탐구하는 시도를 담은 귀한 책이 드디어 우리를 찾아온다.
목차
서문 두 경제학자의 만남
프롤로그 경제학 역사의 두 장면
1 분배에 관한 몇 가지 이론 능력인가 협상력인가
자본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_자본논쟁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만큼 분배받는다
자본을 물物이 아니라 사회관계다_마르크스의 착취이론
2 정체상태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
인생이라는 도박에서 백지를 뽑은 자들_맬서스
성장의 엔진이 꺼지다_고전학파의 정체상태
이윤율의 하락
인터미션 분배이론에서 성장이론으로
3 성장인가 정체인가 성장이론의 역사
인류의 미래, 정체상태
20세기 성장이론
21세기에도 성장은 지속될까
4 피케티의 등장 저성장 속의 불평등
피케티의 발견
피케티 모델_자본의 귀환
5 불평등을 넘어 평등한 성장은 가능한가
불평등은 왜 성장을 제약하는가
불평등과 금융위기
임금주도 성장인가 이윤주도 성장인가
불평등은 해소할 수 있는가
저자
류동민
출판사리뷰
“도대체 경제는 어떻게 성장하며 그 과정에서 분배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스미스가 이미 1776년에 [국부론]에서 던졌던 물음에 어떤 식으로든 대답하지 않는다면, 경제학은 제아무리 복잡한 고등수학이나 통계학 기법으로 치장하더라도 결국엔 지적 유희, 더 나쁘게는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신념의 표명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만다.”(?경제학 역사의 두 장면?, 31쪽)
“도대체 경제는 어떻게 성장하며 그 과정에서 분배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스미스가 이미 1776년에 [국부론]에서 던졌던 물음에 어떤 식으로든 대답하지 않는다면, 경제학은 제아무리 복잡한 고등수학이나 통계학 기법으로 치장하더라도 결국엔 지적 유희, 더 나쁘게는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신념의 표명에 지나지 않게 되고 만다.”(?경제학 역사의 두 장면?, 31쪽)
평행선에 서 있던 주류경제학자와 비주류경제학자가 만나다
주류경제학과 비주류경제학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넘기 어려운 소통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대학 시절부터 친구인 지은이 류동민과 주상영은 같은 경제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데도 전문적인 연구자로서 활동한 지난 20여 년 동안, 적어도 이 책을 구상할 무렵까지 경제 관련 세미나나 학회에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경제학계의 이런 ‘불통’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일본의 경제학자 모리시마 미치오는 40여 년 전 일본 경제학계의 현실을 두고 한쪽은 다른 쪽을 반동이라 부르고 그 반대쪽은 상대방을 아이큐가 낮은 집단이라고 여기며 전혀 생산적으로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고 비꼰 적이 있다. 지금 우리 상황이 더 안 좋은 것은 한국 경제학계를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미국 경제학이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시장근본주의 성향을 훨씬 더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에 안타깝게도 경제학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경제학이 묻고 답해줄 것이라 기대하는 문제, 특히 분배의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침묵해왔다.
지은이들도 서로 다른 전공영역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경제학계의 불문율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점점 심각해지는 한국의 양극화 현실을 목도하며 영세 자영업, 비정규직 노동, 부의 대물림 등에 관해 문제의식을 나누게 되었다. 노동소득분배율이나 임금주도 성장, 이윤율 저하 등 여러 경제학 주제를 함께 이야기했다. 하나는 조금 왼쪽으로 다른 하나는 조금 오른쪽으로 움직여 중간지점에서 만났다. 바로 그 지점에서 류동민과 주상영은 몇 가지 공동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고 이 책은 그렇게 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경제학은 애초에 ‘우울한 과학’이었다
지은이 류동민과 주상영은 경제학이 애초에 ‘우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었다고 지적한다. 경제학을 이렇게 부른 사람은 19세기 사상가 칼라일이다. 그때 그가 지적한 ‘우울함’의 실체는 결국 모든 것이 수요ㆍ공급의 논리로 굴러가게 마련이라는 냉담한 주장밖에 하지 못하는 경제학의 어리석음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고전학파 시대 정치경제학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변해갈지 분석하고자 했는데, 대부분 이윤율이 저하하고 성장이 정체하는 우울한 미래를 예견했다. 이런 점도 경제학의 ‘우울함’을 한층 더했다.
대표적인 고전학파 경제학자 맬서스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성공회 목사이면서도 빈민구제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맬서스에게 “인생이란 커다란 도박에서 백지를 뽑은 무산계급의 빈곤”은 어쩔 수 없는 필연적 결과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인구가 증가하면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러한 상황은 성장을 제약한다. 해결 방법은 빈곤계층의 굶주림과 질병, 심지어 살육까지 포함하는 ‘적극적 억제’뿐이다. 그다지 성장도 못하는 상태에서 경제는 끊임없이 이런 비참한 궤도를 맴돌기 때문에 무산계급은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맬서스만큼 극단적이진 않아도 [국부론]의 저자 스미스나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도 성장이 정체하는 암울한 미래를 예측했다.
1870년대 이후 등장한 신고전학파는 고전학파 경제학이 장기 동학(long-run dynamics)에 가졌던 관심을 잃었다. ‘우울함’을 버리고 ‘과학’을 취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한 사회경제의 미래에 대해 치열하게 예측하기를 포기한 대신 개별 경제주체의 미시적 행동에 초점을 맞췄다.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도 이때 경제학으로 바뀌었다. 역설적으로 칼라일이 지적한 또 다른 우울함, 즉 시장 논리로만 현실을 재단하는 경향은 더욱 강화되었다. 경제학의 이런 지배적인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 ‘우울한 과학의 귀환’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은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의 연구에 힘입어 탄생한 점도 있다. 류동민은 마르크스경제학을, 주상영은 화폐이론을 전공한 연구자이지만 두 사람 모두 피케티의 연구 성과를 높이 평가한다. 피케티는 세계를 주목시킨 자신의 대표작 [21세기 자본]에서 현실적 함의를 지닌 강력한 장기 분석을 제시했다. 이 점에서 그는 리카도나 마르크스 등이 추구한 장기 동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류동민과 주상영은 이를 두고 ‘우울한 과학의 귀환’이라 부른다.
경제학이 다루는 핵심 주제는 무엇일까. 피케티는 분배 문제를 파헤치는 데 전념했다. 그에 앞서 맬서스, 리카도, 마르크스 등 19세기 경제학 대가들도 분배 문제를 경제학이 우선적으로 탐구해야 할 문제로 여겼다. 하지만 당시에는 분배 상황에 관한 체계적인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데 그쳤다. 성장과 분배에 관한 웅대한 동학은 과연 무엇일까. 경제학자들의 이 궁금증이 이론적ㆍ사변적인 논의에 그치지 않으려면 역사적 사실과 통계 수치들이 필요하다. 성장이든 분배든 수치를 보고 논해야 한다.
20세기 중반, 러시아 출신의 쿠즈네츠가 결정적인 기여를 남겼다. 그는 스스로 구축한 세밀한 통계 수치를 바탕으로 그 유명한 역U자 가설을 설파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불평등이 심화되지만 산업화가 진전되면 생산성이 증가한다. 많은 사람이 그 과정에 참여하면서 혜택이 확산되고 불평등은 점차 줄어든다. 그의 결론은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우울한 예측을 뒤엎는 것이었고 현대 경제학은 불평등이라는 문제에 눈감을 수 있었다. 피케티는 쿠즈네츠의 가설이 유효한지 의문을 제기하며, 불평등의 역사적 추세는 역U자가 아닌 U자 모양이라고 논증한다. 즉 불평등이 해소되는 듯했던 20세기 중반은 예외적인 기간에 지나지 않으며, 불평등은 계속 심화되고 있다.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가
피케티에게 강렬한 지적 자극을 받은 류동민과 주상영은 한국 경제학자 가운데는 선구적으로 지난해 함께 ‘한국 경제의 피케티 비율’을 계산했다. 그 내용을 [한겨레 21]에 4회에 걸쳐 소개하기도 했다.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은 더 심화된 해설을 덧붙인 ‘한국의 피케티 비율’과 ‘한국의 마르크스 비율’을 부록으로 실었다.
[우울한 경제학의 귀환]은 불평등과 분배, 불평등과 성장의 문제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진다. 왜 불평등이 문제가 되며 불평등이 초래하는 결과는 무엇인가? 불평등이 능력주의와 민주주의 등 사회적 가치를 해친다면 순수하게 경제적 성과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신고전학파의 전통적인 사고처럼 효율과 형평이 상충하는 관계라면,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성장을 해치는 걸까?
류동민과 주상영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 나타난 케인스의 관점, 최근 IMF가 내놓은 연구 등 불평등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를 다양하게 소개한다. 2014년 오스트리와 IMF 동료 경제학자 두 명이 내놓은 논문 ?재분배, 불평등 그리고 성장?에 따르면 재분배와 성장은 상충하지 않는다. 또한 불평등한 사회는 성장 국면으로 접어들더라도 그것이 지속되는 기간이 짧다. 류동민과 주상영은 불평등 악화가 금융위기 발생에도 일조했다고 논증한다. 그뿐 아니라 금융위기를 수습하면서 펼친 각종 규제 완화 정책은 불평등 문제를 또다시 외면한다.
요즘 자주 언급되는 임금주도 성장론이 주장하는 핵심은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분배를 개선해야 한다’는 점이다. 류동민과 주상영은 이러한 메시지에 한국 사회가 귀 기울여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다만 임금주도 성장론이 아직 이론적으로 버텨내야 할 비판이 많으며 유효한 성장 전략으로 실제 적용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며 학문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한다.
류동민과 주상영은 서로의 연구 분야나 관점에 차이가 있는 한국의 두 경제학자다. 이제 그들은 함께 연구하고 함께 외친다.
“성장으로 파이를 키워서 분배한다는 경제 논리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낡고 틀에 박힌 패러다임이다. (…) 어떤 측면을 보아도 불평등이 여기서 더 악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주류경제학과 그 사고에 지배를 받아온 사람들은 분배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하며, 형평을 강조하던 비주류경제학과 그 사고의 지배를 받아온 사람들은 분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대안이 무엇인지 더 깊게 고민해야 한다.”(?불평등은 해소할 수 있는가?, 30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