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집단심성을 다룬 심성사의 첫 걸음을 내디딘 책
“기적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낸 것은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뤼시앵 페브르와 함께 ‘사회경제사 연보’, 이른바 ‘아날’지를 창간했으며, 이후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 ‘봉건사회’를 발표함으로써 사회경제사가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얻은 역사학자이자, 나치에 항거해 50세가 넘는 나이에도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총살형을 당한, 실천적 지식인 마르크 블로크가 쓴 심성사와 역사학적 인류학의 선구적 저서이다. 블로크는 기적의 기원, 발전과 확산, 쇠퇴와 소멸을 차례로 설명하며 중세인의 집단의식 또는 심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했다.
목차
기적을 행하는 왕
기적의 역사와 기적을 믿는 역사 / 박용진
감사의 글
서문
제1부 기원
1 연주창 손대기의 시작
2 국왕 치료능력의 기원: 중세 초의 신성한 왕권
제2부 기적을 행하는 완권의 번성과 변천
1 1세기 말까지의 연주창 손대기와 명성
2 영국 왕권의 두 번째 기적: 치료용 반지
3 연주창 손대기의 기원부터 르네상스까지 신성한 기적의 왕권
4 신앙의 혼동: 성 마르쿨, 프랑스 왕, 그리고 일곱 번? 아들
5 종교전쟁기와 절대왕정기 왕의 기적
6 손대기 치료의 쇠퇴와 소멸
제3부 왕의 기적에 대한 비판적 해석
1 왕의 기적에 대한 비판적 해석
부록
참고문헌
용어 해설
프랑스와 영국 왕 연보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저자
마르크 블로크
출판사리뷰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마르크 블로크의 심성사
오랫동안 사람들은 프랑스 왕과 영국 왕이 연주창이라는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믿었다. 프랑스와 영국 사람들만이 아니라 이웃 나라 사람들까지도 이 왕들에게 찾아가서 연주창이라는 질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왕이 여행 중이라면 쫓아가서 치료를 받으려고 했고, 쫓겨난 왕에게 찾아가기까지 했다. 왕이 치료했다는 연주창은 오늘날의 병명으로는 결핵성 경부 임파선염으로, 목 부위의 임파선에 염증이 생겨 부어오르는 임파선염의 일종이다. 왕은 이 질병을 어떻게 치료했을까. 놀랍게도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 병을 고쳤다고 한다. 기껏해야 민간요법 보감이나 세상의 놀라운 일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기담집에 있을 법한 이야기가 이 책 ‘기적을 행하는 왕’에서 다루는 소재다.
이런 민간요법을 소재로 이처럼 두꺼운 책을 쓴 사람이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라는 것도 의외다. 블로크가 누구인가. 뤼시앵 페브르와 함께 ‘사회경제사 연보’, 이른바 ‘아날’지를 창간했으며, 이후 ‘프랑스 농촌사의 기본성격’ ‘봉건사회’를 발표함으로써 사회경제사가로서 독보적인 지위를 얻은 역사학자다. 또한 나치에 항거해 50세가 넘는 나이에도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총살형을 당한, 실천적 지식인의 상징적 인물이 아닌가. 그동안 블로크는 국내에 중세 봉건제도 전문가로 알려졌다. 물론 아날학파와 심성사가 소개되면서 블로크가 심성사를 앞서 연구했으며 ‘기적을 행하는 왕’이 심성사와 역사학적 인류학의 선구적 저서라는 사실이 알려지기는 했지만 그 책이 어떤 점에서 그런 평가를 받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었다. 이번에 한길그레이트북스 134권으로 출간된 ‘기적을 행하는 왕’는 블로크의 첫 번째 저서로 옮긴이 박용진(서울대 HK 연구교수ㆍ서양사학) 교수가 5년여에 걸쳐 번역한 노작이다.
기적의 역사와 기적을 믿는 역사
블로크는 기적의 기원, 발전과 확산, 쇠퇴와 소멸을 차례로 설명한다. 간단히 말하면 왕이 손을 대서 치료하는 기적은 프랑스에서는 1000년경, 영국에서는 1100년경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지속적이면서도 규칙적으로 이뤄졌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다가 13세기 중반 이후 관습으로 정착된 것이 확실하다.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7월 12일부터 1340년 5월 28일까지 22개월을 약간 웃도는 기간 동안 885명에게 손대기 치료를 했다. 이 숫자는 플랜태지니트 왕조의 기적과 관련된 위신을 높여준다. 이 수치가 가져다준 명성은 수사학적 장식이 아니다. 수많은 군중이 국왕에게 몰려갔고, 어떤 해에는 그 숫자가 1,000명이 넘었다. 1500년에 들어서면서 왕의 손대기 치료는 만개했다. 프랑스의 프랑수와 1세는 1528년에는 최소 1,326명, 1630년에는 최소 1,731명을 치료했다. 이 시기에는 에스파냐 원정대가 조직되어 프랑스로 치료를 받으러 올 정도였고, 왕들은 해외 원정을 가서도 치료를 거행했다.
“브루타뉴 지방의 중심지인 갱강(Guingamp)에서, 툴루즈 근처의 마을에서, 랑그도크 지방에서 오래된 알비 지방에서, 연주창에 걸렸다고 느끼는 불쌍한 사람들이 여행 지팡이를 짚고서, 험난하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길을 지나서 그들의 주군이 있는 일드프랑스나 루아르 강 계곡에 있는 왕의 성채에 도달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1714년 하노버 왕조가 시작되면서 더 이상 손대기 치료를 하지 않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보다 늦은 1825년 샤를 10세가 마지막으로 손대기 치료를 한 뒤 사라지게 되었다.
블로크는 왕의 손대기 치료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하나는 손대기 치료라는 기적을 행하는 것 자체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에 대한 것이다. 자크 르 고프의 표현으로는 ‘기적의 역사’와 ‘기적을 믿는 역사’다.
“왕이 너를 만지고, 신이 너를 치료하노라”
먼저 기적의 역사는 손대기 치료가 어떻게 행해지며, 이 능력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 궁극적으로 이러한 능력과 행위가 정치적 권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룬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치료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블로크는 사료에 근거해 왕이 환자의 환부에 직접 손을 대고 성호를 그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성호를 그으면서 뭔가 말을 했다고 전해지는데, 16세기 이후에는 “왕이 너를 만지고, 신이 너를 치료하노라”라는 문구였음이 확실하다. 사실 어느 사회든 병을 치료하는 주술사가 존재한다. 그 주술사가 환부를 만지며 주문을 외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왕이 치료하는 이 의식이 특별해 보일 것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성호를 긋는다는 것이 이전 시대와는 다른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로베르 2세 때부터, 영국에서는 처음부터 신성한 표시를 했다. 한마디로 이교적 관행에 기독교적 외형을 덧씌운 셈이다. 즉 게르만적 요소와 기독교가 결합하여 중세사회가 탄생하는 과정의 한 모습이다.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는 날, 성스러운 기름을 가지고 올 사제가 군중의 혼잡에 막혀 지각했다. 그러자 한 마리 비둘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프랑크족 군주에게 도유할 향기 나는 성유를 유리병, 즉 작은 병에 담아서 성자 레미에게 갖다주었다.”
프랑스 왕이 환자를 치료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프랑스 왕은 랭스에서 대관식을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랭스 대주교가 해주는 도유식이다. 사실 도유식 자체보다는 도유식에 사용되는 기름, 즉 향유(香油)가 기적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일찍이 클로비스가 랭스에서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모습을 하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이 비둘기는 성스러운 향유가 담긴 유리병을 가지고 내려왔다. 그러므로 기름이야말로 ‘초자연적’인 것이며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것이다. 이 기름으로 도유를 받아야 기적의 능력을 얻게 된다. 여기에 두 번째 의례가 결합되었다.
800년 12월 25일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가 황제라고 선언하면서 머리에 대관을 해주었다. 이 왕관은 틀림없이 비잔티움 황제의 것과 마찬가지로 금으로 장식되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과거에 사용했던 진주와 보석으로 장식된, 천으로 된 머리띠가 있는 왕관이었을 것이다. 즉 대관은 로마적 기원을 갖고 있다. 816년 처음으로 랭스에서 샤를마뉴의 아들인 경건왕 루이가 황제 이름으로 교황 스테파누스 4세에게 왕관을 받고 축성받은 기름으로 도유를 받았다. 그 이후 이 두 행위는 거의 불가분한 것이 되었다. 요컨대 샤를마뉴와 그 후손은 도유와 대관을 핵심으로 하는 축성식을 거쳐 황제이면서 동시에 사제인 존재가 되었다.
왕의 기적과 결합한 민간 속설, 질병치료를 원하는 민중의 열망을 반영하다
왕권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한 것은 기독교나 로마 황제에게 속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았다. 왕권은 민간 속설과도 결합했다. 대표적인 것이 성 마르쿨과 관련된 전설이다. 코르베니라는 곳에서 성 마르쿨이 숭배되었는데, 이 성인은 연주창을 치료하는 성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13세기부터 왕은 랭스에서 축성식이 끝나면 돌아오는 길에 코르베니에 들러서 성 마르쿨에게 예배를 드림으로써 연주창 치료능력을 전달받았다. 물론 왕은 이미 연주창을 치료하고 있었지만, “하느님이 특별히 연주창 치료능력을 부여해주었다고 생각되는 성인에게 예배를 드림으로써 그 이전보다 더 탁월한 치료능력이 자신에게 부여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성 마르쿨의 전설과 더불어 일곱 형제 중 막내아들이 특별한 능력, 특히 질병 치료능력을 가진다는 민간의 속설은 성 마르쿨의 치료능력과 왕의 기적을 선전하는 역할을 했다. 이 일곱째 아들들은 성 마르쿨에게 예배드림으로써 치료능력을 부여받았는데, 이때 국왕이 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처음에는 국왕에게만 있었으나 점차 성인, 나아가 민간주술사에게 확대된 것이다. 이러한 확산은 질병치료를 원하는 민중들의 열망을 반영한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기적을 믿게 되었나
이제 ‘기적을 믿는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이는 사람들이 기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어떻게 해서 기적을 믿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믿지 않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블로크는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도 “그리스도가 과연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고 다시 부활했는지 아는 것은 오늘날의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왜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처형과 부활을 믿는가 하는 점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이 사건이나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살펴볼 것을 강조했다. 가령 정치권력을 설명한다면, 권력을 행사는 쪽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피지배층 관점에서도 설명하려고 했다. 그 당시의 역사연구 흐름에 비춰보면 가히 획기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블로크는 이 책에서도 ‘집단적’(collectif)이라는 형용사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령 ‘집단의 생각’, ‘집단적 의견’, ‘집단적 표상’등이 그것이다. 결국 블로크가 관심 가졌던 것은 ‘집단의식’(conscience collective) 또는 ‘심성’(mentalite)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적을 행하는 왕’은 심성사의 첫걸음을 내디딘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낸 것은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왕이 정말로 연주창을 치료했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문점은 왕이 치료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사람들은 왕이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하는 데 있다.” 그 당시 사람이 되어서 왕의 기적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신이 결핵성 임파선염에 걸렸다고 상상해보라.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서 치료하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주변의 어떤 사람이 왕의 손대기 치료를 받고 나았다고 한다. 연주창은 결핵성이므로 자연적으로 치료되는 경우도 있고, 목에 부풀어 오른 종양이 줄어들기만 해도 병이 나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게다가 치료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어서 증상 호전에 다른 요소가 개입될 여지가 많았다. 가령 왕의 손대기 치료를 받고 나면 궁중 자선담당관에게 자선금을 받는데, 이 자선금으로 영양을 보충해 건강을 회복했을 수도 있다. 또 모든 사람이 다 치료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적은 완쾌되는 환자의 수효에 있지 않았다.
“천사가 일 년에 단 한 차례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와서 물을 휘젓고 나면, 처음으로 그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치료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도들이 모든 병자를 치료하지 않았더라도, 완쾌된 사람에 대해서는 기적을 행한 것이다.”
즉 단 한 명만 치료되어도 그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왕의 손대기 치료를 받고 나서 건강이 회복된다면, 그것은 왕의 치료 덕분이다. 무서운 질병이 왕들의 손과 접촉하고 나면 치료된 것처럼 보이거나 때때로 정말 치료되었는데, 사람들은 거기에 신성함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대를 거듭해 증언이 축적되었고 점점 늘었다. 증언이 경험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반면 치료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환자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의 손대기 치료가 끝나면 생활수칙처럼 지켜야 할 사항을 적은 처방전을 주는데, 이를 지키지 않았을 가능성이 너무나 높다. 이러한 경우에 사람들은 그것을 빨리 잊어버렸다.
이를 블로크는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낸 것은 기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기적을 믿은 것은 ‘집단적 오류’(erreur collective)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블로크는 이러한 오류가 “인간의 역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오류 대부분보다는 위험하지 않은 오류”라고 변호했다.
이성 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사라진 국왕의 초자연적 성격
그렇다면 이러한 믿음은 어떻게 해서 사라지게 되었을까. 오늘날의 합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왕의 손대기 치료는 미신이며, 아무리 양보한다고 해도 ‘초자연적 현상’이나 ‘기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합리성이 커지면서 이에 대한 믿음 역시 사라졌을 것이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종교개혁과 계몽사상의 영향으로 가톨릭에서 인정하는 기적은 배척받았다. 그런데 블로크가 지적하는 참신한 점은 기적을 옹호하려고 시도하면서 오히려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설명에 있다. 이 시기에 사람들이 더 합리적으로 사고하게 됨에 따라 옹호자들은 왕의 치료 기적 역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치료능력이 피를 통해 전달된다거나, 자기 암시를 통해 스스로 회복된다고 하는 설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박되기 일쑤였다. 사실 왕의 기적은 초자연적 현상인데, 이를 이성의 틀 안에 넣으려는 시도, 즉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성공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러한 실패는 ‘국왕의 초자연적 성격’이 이성 중심의 사회와 함께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학자들의 견해와 일반 민중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 영국에서 손대기 치료가 중단된 것은 하노버 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였는데, 그 당시 프랑스로 도망가 있던 스튜어트 왕가 사람들에게 영국 민중이 찾아가곤 했다. 민중의 믿음은 지속적이어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믿음이 없어지지 않았다.
“차디차게 보이는 문서, 그 너머로 역사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인 인간이다”
블로크는 이러한 중세인의 심성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새로운 사료와 대상을 이용했다. 먼저 왕이 시행했던 손대기 치료의 횟수는 영국과 프랑스의 회계장부에서 알아냈다. 회계장부는 겉으로 보기에는 숫자의 나열에 불과한 사료다. 거기에서 추출해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은 경제활동과 관련된 것들이기 쉽다. 그러나 블로크 자신이 말했듯이 “겉으로는 차디차게 보이는 문서, 그 너머로 역사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미지를 사용했다. 오늘날에는 이미지를 분석하는 도상학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블로크가 이 책을 썼을 당시에는 역사 연구에서 이미지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블로크는 왕의 손대기 치료가 행해지는 의례를 도상 자료의 해석을 통해서 보여주었다. 물론 그의 도상학적 방법이 체계적이지는 않은데 이는 선구적 연구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블로크는 ‘표상’(representation)의 중요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클로비스의 성스러운 유리병이나 대관식 이외에도 백합꽃 문장, 화염 군기(오리플람, oriflame), 왕홀(王笏, faisceau), 신체에 나타나는 특별한 표지 등 신성한 상징을 왕들이 어떻게 이용해 스스로의 권력을 강화해나갔는지 보여주었다.
왕권의 초자연적 성격을 통해 드러낸 성과 속의 대립
집단 심성과 인류학적 역사학의 선구적 저작, 표상과 이미지를 통한 연구, 영국과 프랑스의 비교 역사학 등 이 책의 장점은 무수히 많다. 그런데 블로크가 이 책에서 단지 왕이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 밝히려는 것뿐이었을까. 좀더 깊이 보면, 게르만족의 관습인 도유식이 기독교 의례인 축성식으로 통합되고, 여기에 왕관이라는 로마의 유산까지 더해져 카롤링시대에 중세 유럽의 독자성이 성립되는 과정을 읽어낼 수도 있다. 또한 왕권의 초자연적 성격이 점차 쇠퇴하는 과정에서 근대의 이성이 승리하는 역사도 목격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 유럽의 탄생과 근대 이성의 승리라는 이질적인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800년에서 1800년에 이르는 긴 기간을 연구대상으로 삼았을까. 왕권의 초자연적 성격을 통해 드러나는 유럽의 ‘장기 지속’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성(聖)과 속(俗)의 대립일 것이다. 블로크는 프레이저의 연구를 인용해 왕의 초자연적 능력이 다른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서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왕의 사제로서의 능력을 제한하려고 했고, 왕은 사제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11세기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으로 대표되는 성과 속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 왕의 기적은 사라졌고, 성과 속은 분리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레고리우스 7세는 승리를 거둔 셈”이다.
성과 속, 즉 교권과 속권이 분리되어 대립하기도 하고 협조하기도 했던 역사는 서유럽 정치사의 특징이며, 나아가 로마제국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비잔티움제국이나 이슬람 세계의 그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교권과 속권의 관계설정이 첨예한 문제였다. 블로크에게 성과 속의 관계는 지나가버린 과거의 차디찬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현실적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죽은 사람에 관한 연구와 살아 있는 사람에 관한 연구를 결합’하려고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