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문학ㆍ역사ㆍ신화ㆍ철학ㆍ정신분석학 등 여러 영역을 종횡무진하며
다각적으로 조명한 ‘죽음’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
자살과 죽음에 대해 문학, 철학을 넘나들며 저자만의 성찰을 집대성한 책이다. 2009년 古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을 계기로 죽음의 현상과 죽음 자체로 이야기의 진폭을 넓히고 있다. 고대 로마의 검투사,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죽음과 같은 실제의 사례와 기형도, 오르페우스의 에피소드를 인용한 문학에서의 죽음을 폭넓게 다룬다. 이반 일리치와 하이데거 프로이트가 언급했던 죽음에 관한 이론을 서술하면서 죽음을 향한 도정에 있는 인간에게 삶을 견디는 것이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첫 의무, 그리고 현재의 삶과 기쁨의 소중함을 깨닫고 죽음의 준비를 하라고 언급한다. 살아가면서 당장 닥칠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 인문학적인 텍스트와 역사라는 컨텍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1 자살
2 카토, 그리고 노무현
3 검투사
4 기억, 망각, 그리고 역사
5 예술가의 죽음
6 입 속의 검은 잎
7 프로이트의 죽음본능
8 톨스토이의
9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
10 하계
11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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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임철규 저자(글)
출판사리뷰
죽음에 무뎌진 한국사회, ‘나의 죽음’을 대면하다
최근 우리는 언론을 통해 수도 없이 많은 죽음을 접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식들과 함께 목숨을 끊은 비정한 부모,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 성폭행에 저항하다 잔인하게 살해당한 여인, 보험금을 위해 애인을 죽인 남자 등, 눈만 뜨면 새롭고 잔인한 죽음을 접한다. 10년 전이었다면 한 가지 사건만 가지고도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을 일을, 하도 자주 접하다 보니 이제는 그렇게 놀랍지도 않다. 우리사회는 날이 갈수록 죽음에 무뎌지고 있는 것만 같다.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는다. 우리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 그 죽음이 나에게 찾아오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을 맞닥뜨린 사람의 심정을, 코앞의 죽음을 대부분의 우리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채 상대를 잔인하게 괴롭히는 범죄도 갈수록 늘어난다. 상대방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수 있다는 ‘공감’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마침 이런 시점에 출간된 이 책 『죽음』의 의미는 그래서 남다르다. ‘잘 죽는 법’ ‘안 죽는 법’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를 깊이 사유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비로소 자신이 ‘죽음’에 직면해 있다고 짐작했지만, 이 사실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학교시절 논리학에서 배운 ‘게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따라서 게사르도 죽는다’는 삼단논법은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게사르와 다른 ‘내’가 어찌 그와 동일한 범주의 ‘인간’이 되어 죽어야 한다는 것인가? 이반 일리치는 죽음은 “내게 있을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자명한 진리를 알고 있었지만, 이를 추상적으로 느꼈을 뿐,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죽음을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지금 당장 나는 아니다’라는 이런 안도하는 기분을 하이데거 또한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도”라 일컬었다. 그는 죽음을 미래의 사건으로 여기고 지금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인간들을 “죽음 앞에서의 부단한 도피”를 하는 자들,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지는 용기”를 갖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을 “죽음으로 향하는 비본래적인 존재”라고 말했다.(본문 252쪽, 「제9장 하이데거의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 중에서)
노학자의 마지막 작품, 평생에 걸친 ‘죽음’에 대한 성찰
“‘죽음’은 내 삶의 전부를 지배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 내가 목격했던 한 광경은 엄청난 ‘트라우마’로서 내 삶의 거의 전부를 휘감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초등학교 시절, 나는 목이 잘린 채 얼굴은 피로 물들고, 머리카락은 눈썹 아래로 흩어져 내리고, 혀는 입술 아래로 축 늘어져 있는 빨치산과, 잘린 목을 창끝에 꽂은 채 흔들어대며 트럭 위에서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며 지나가던 토벌대의 모습을 무서움에 떨며 지켜보았다. 초등학교 때의 그 경험으로 인해 인간과 삶에 대한 나의 인식은 그날 이후 철저하게 비관주의로 물들게 되었다.”(본문 8~9쪽, 「책머리에」 중에서)
어린 시절 고향에서 눈을 부릅뜬 빨치산의 시체와, 그 죽음을 조롱하며 승전보를 울리는 인간의 잔인한 면모를 보았던 강렬한 경험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는, 저자에게 인간과 삶에 대한 비관적 인식을 가져다 주었다. 여지껏 출간한 저자의 저서들에 ‘죽음’ ‘유토피아’ ‘구원’ ‘애도’ 가 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런 이유라고 그는 고백한다. 저자의 학문세계를 관통하는 것은 어릴적 그 강렬한 ‘죽음’의 기억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다루며 차례차례 발전시켜 『왜 유토피아인가』『우리시대의 리얼리즘』『눈의 역사 눈의 미학』과 『그리스 비극』『귀환』 그리고 마침내, 이 책 『죽음』으로 그의 긴 학문 여정을 마치게 되었다. 연세대학교 영문학과 명예교수인 저자 임철규는 자기만큼 ‘죽음’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대해 집착하고 고찰한 책은 영미권에서도 아직 찾지 못했다고 자신한다. 저자는 ‘죽음’이라는 주제 하나를 가지고 문학ㆍ역사ㆍ신화ㆍ철학ㆍ정신분석학 등 여러 영역을 종횡무진하며 다각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자살에 대한 찬반론에서부터 신념과 죽음, 전투와 전쟁, 학살, 죽음에 대한 공포, 천국과 지옥 등, 저자는 죽음에 대해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논의를 끝낸 듯하다. 노학자가 평생에 걸쳐 사유한 깊이 있는 ‘죽음’에 대한 성찰이 독자들에게 ‘삶’을 돌아보게 한다. 세계 어디에도 이토록 오랫동안 폭넓게 연구한 ‘죽음’은 없었다.
노무현의 죽음, 은퇴한 학자를 깨우다
저자 임철규 명예교수가 ‘죽음’이라는 주제로 이 책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2009년 5월 23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의 자살이었다. 2009년 당시에도 이미 칠순의 나이였던 저자는 봉하마을 영전에서 그를 위한 글을 바치겠노라고 약속하고, 방명록에 “아름다운 죽음”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009년 『귀환』을 끝으로 주제중심의 연구서는 내지 않겠노라고 절필을 선언했던 노교수가 공언마저 깨며 다시 펜을 들게 한 것은, 스스로의 신념과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저자는 노무현을 로마 공화정의 수호자 카토와 비교하며 인간이 죽음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숭고한 죽음도 있음을 이야기한다.
“나는 5월 말 추모기간 중 그의 고향마을 봉하에 찾아가 그의 영전에서 그를 위해 한 편의 글을 바칠 것을 약속했다. 이듬해 문학계간지 『실천문학』 2010년 가을호에 발표한 「카토,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글을 통해 약속을 지켰다. 나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자살’과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산 자가 결코 경험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죽음 자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여겨졌다. 대신 죽음의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본문 7~8쪽, 「책머리에」 중에서)
자살의 찬반론 ― 철학적인 삶이란 죽음을 준비하는 것
자살에 대한 담론이 거의 없던 동양과 달리, 서양의 철학사는 시대마다 자살을 바라보는 시선이 각각 달랐으며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간이 삶에 부여한 가치의 크기에 따라 자살 여부가 결정된다거나 삶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나, 혹은 그 어떠한 이유로라도 신이 내려준 목숨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라는 의견이 충돌했다. 『죽음』의 제1장에서는 자살에 대한 찬반의 역사를 고대에서 현대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단순히 자살이 나쁘다, 좋다의 문제가 아닌, 인간이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기원을 살펴볼 수 있다.
17세기 중엽까지도 자살은 큰 죄로 인식되었다. 교회법은 자살자에게 기독교식 매장을 거부했다. 자살자의 친척에게는 재산 상속권을 박탈했다. ……장례가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산도 몰수당했다. 사체는 발가벗겨져 말뚝에 찔린 채 수레에 실려 거리의 끝에서 끝으로 끌려다녔다.…… 소설가 디포는 “그 애비가 자살했다는 이유로 자식들이 굶어죽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본문 38~39쪽, 「제1장 자살―그 찬반의 역사」 중에서)
카뮈는 우리에게 ‘오직 단 하나의 진정한 철학적인 문제’는 ‘자살’이라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또는 없는지를 판단하여 자살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를 선택하라 했다. …… 자살은 교통사고에 의한 죽음과 마찬가지로 일상의 진부한 사건의 하나로 전락하고 있다. 이것은 더 이상 ‘공감’과 ‘논의’의 대상인 ‘인간’의 문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본문 59~62쪽, 「제1장 자살―그 찬반의 역사」 중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올바른 실행은 죽음의 준비’라고 말했다. 철학적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육체나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육체 또는 육체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된 영혼에 의지해서 ‘이성적’으로 사유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로부터의 영혼의 분리가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면, 철학적으로 산다는 것은 죽음의 준비를 한다는 것, 죽음을 가까이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본문 73~74쪽, 「제2장 카토, 그리고 노무현」중에서)
죽음은 선인가, 악인가
우리는 오랜 병을 앓거나 어느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 어른의 빈소에서, ‘호상’이라며 위로한다. 한편으로는 기형도처럼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요절’했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과연 언제 어떻게 죽는 것이 옳은 것인가. 얼마나 살면 충분히 산 것인가. 어떤 죽음이 선이 되고 어떤 죽음이 악이 되는 것인가.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죽음이 과연 선인가 악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리스본 대지진에서처럼,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그렇게 죽어갈 때, 그의 존재와 삶, 희망, 모든 가능성을 송두리째 빼앗는 때이른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신의 뜻이라며 이런 죽음을 ‘악’에서 배제시켜야 하는가? 죽음이 ‘악’이라면, 그것은 이 조건을 박탈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태어나자마자 병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연사’에 이를 때까지 절망의 삶을 포기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가 뒤따른다.
한편 솔론은 그 사람의 “최후를 보기”까지, 즉 “죽기까지는 어떠한 사람도 행복하다고 일컬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삶의 결과가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인 인간의 조건하에서 살아있을 동안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일컬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카스토리아디스가 지적했듯, “오직 죽은 후에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분명하고, 역설적이고, 그리고 비극적인 결론”은 “누구든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이 어찌 ‘악’이라 규정될 수 있는가.(본문 343~346쪽, 「제11장 죽음」 중에서)
죽음을 통해 삶을 말하다
우리의 삶이 덧없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무가치한 것도 아니고, 소중하지 않은 것도,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며, 빛나지 않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빛나는 것은 영원성, 무시간성에서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로이트는 우리에게 사물의 ‘소멸성’을 껴안기를 요구한다. 프로이트에게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삶의 한계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또한 분명 죽음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최종적인 구성요소가 없다면, 삶에 대한 사랑은 불완전한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에게 죽음은 삶의 적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삶이 덧없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 덧없음이 가치의 조건이므로 ‘고통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런 “삶을 견디는 것이 결국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첫 의무다”라고 말한다. ‘애도를 미리 맛보기’ 전에 현재의 삶, 현재의 기쁨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기를 요구한다. 그런 다음 “죽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한다.(본문 210~212쪽, 「제7장 프로이트의 죽음본능」 중에서)
이 책을 관통하는 내용은 ‘죽어라’ ‘살아라’ 라는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다. ‘죽음’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이토록 다채로운 인간의 사유가 녹아들 수 있다는 것. 이렇게 다양한 시각으로 죽음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저자는 그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인간이 죽음에게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 하는 것은, 결국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 하는 역설을 갖는다.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한 자는 또한 타인의 삶에도 그만큼의 가치를 둔다. 긴 삶의 여정은 결국 ‘죽음’으로 완성되고, 삶의 온전한 평가 역시 ‘죽음’을 통해서야 이루어진다.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이 어우러져 현재의 삶과 현재의 기쁨을 누릴 때에야, 진정으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죽음을 원하는가?’라는 말은 결국 ‘어떤 삶을 보내길 원하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말이 된다. 이번 가을, ‘죽음’을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