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한옥으로 풍경놀이 가자
옛 선조들의 삶터인 한옥은 주위 환경과의 조화를 강조하여 자연을 벗삼고, 자연과 어우러진 채로 자연 속에 지어졌다. 건축 양식의 아름다움은 차치하더라도 자연과의 조화를 미덕으로 삼았던 조상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것이 바로 한옥인 것이다. 건축 저술가 임석재 교수는 이러한 한옥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것도 창을 통해 풍경화를 그리는 한옥 이야기를.
한옥에 앉아서 창을 통해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옥이 왜 자연을 벗삼은 집인지 알 수 있다. 저자는 창을 통해서 보이는 풍경이 마치 한 폭의 풍경화 같다고 말하면서 이것을 한옥에서 즐기는 풍경놀이라고 말한다. 창은 건물에 있어서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통로와 같다. 우리는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을 창을 통해 우리를 보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우리 곁에 남아있는 한옥들을 답사하면서 조상들의 풍경놀이를 소개하는 이 책은 옛 선조들이 자연과 소통하던 그 발자취를 걷게 해 준다. 책을 읽으면서 일석이조로 사진으로나마 풍경놀이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목차
창으로 그리는 무한한 풍경화|책머리에 부치는 말
프롤로그 풍경작용으로 즐기는 한옥
1부 풍경의 탄생
1장 차경借景 창을 조작해 풍경을 차용하다
2장 장경場景 풍경을 무대처럼 꾸미다
3장 자경自景 집 안에 앉아 내 집을 보다
2부 풍경의 겹침
4장 중첩 공간이 개입해서 액자를 겹치다
5장 족자 창 스스로 풍경이 되다
6장 거울작용 창과 풍경이 하나 되다
3부 풍경의 절정
7장 몽타주 조각난 장면을 상상으로 복원하다
8장 콜라주 서로 다른 조각들이 하나를 암시하다
9장 바로크 규칙을 최소화하고 분산을 즐기다
한옥 찾아보기
저자
임석재 (지은이)
출판사리뷰
탁월한 건축 저술가 임석재,
한옥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다
한옥은 검고 어둡다. 채와 채는 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 두껍게 겹치며, 건물의 골조는 밖으로 그대로 드러나 울퉁불퉁한 거친 면(面)을 형성한다. 이런 한옥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겁고 부담스러운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한옥과 쉬이 어울리지 못하고 그저 ‘전통을 알아야 한다’는 식의 약간의 의무감으로 잠깐 둘러보고는 그만이다.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는 이런 선입견을 깨기 위해 ‘놀이’라는 관점을 도입한다. 저자 임석재는 창을 일종의 ‘액자’로 보고 이것을 “마치 재미있는 장난감”(43쪽)을 다루듯이 다양하게 조작하며 논다. 이때 물리적으로는 창을 조작하는 것이지만 실제적으로는 풍경이 변하기 때문에, 풍경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차경·장경·자경·중첩·족자·거울작용·병풍작용·몽타주·콜라주·바로크 등 그야말로 다양한 풍경작용들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각각의 풍경작용들마다 그 뜻, 발생하는 조건, 구체적 예시, 사상적 맥락 등이 세밀하게 검토된다. 나아가 시대를 초월한 한옥의 보편적 장점을 추려내 ‘아파트’라는 천편일률적인 주거양식을 극복할 개념적 토대를 마련한다.
저자는 건축분야에서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구를 해왔으며 독보적인 저술 성과를 이뤄왔다. 풍부한 인문학적 식견 위에 깊은 전공지식을 바탕으로 저자가 이번에는 한옥의 건축미학을 체계적으로 분석했다. 독자들은 단순한 풍경작용에서 복합적인 풍경작용으로 차근차근 안내받을 것이다. 프로이트, 증자, 포스트모더니즘, 대승불교 등 다양한 사상적 배경이 한옥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20년 넘게 이어온 저자의 전통건축 답사는 이 책을 매우 체험적이고 실제적으로 만들었다. 문화적 가치와 미학성이 뛰어난 한옥 유구 39기를 망라해 직접 찍은 사진 160컷을 책에 담은 것은 물론, 분석적인 개념어들 사이로 간간이 삐져나오는 생생한 문장들은 저자의 풍부한 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는 ‘왜 한옥이 좋은 건축물인지’ ‘다양성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등에 대해 꼼꼼히 일러주며, 한옥은 ‘교양’이 아니라 해 지는 줄 모르는 ‘놀이’라는 점을 조용히 웅변한다.
한옥은 풍경을 담아내는 액자
한옥의 풍경은 말로 표현하기는 부족할 정도로 다양하다. 창을 액자로 보는 형식적 가정과 풍경작용이라는 개념을 핵심매개로 하여 한옥의 다양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액자는 도처에 널려 있다. 여기를 봐도 액자, 저기를 봐도 액자, 그리고 액자 속에도 액자가 있다. 3차원 공간을 회화적 액자에 시시각각 담아낸다는 발상은 한옥의 창과 문, 기둥, 보, 서까래, 심지어 건물 골격 자체에까지도 스며있다. 액자에는 풍경이 담기므로 액자의 다양성은 그만큼 풍경작용이 다양하다는 말과 통한다. 결과적으로 풍경작용과 액자의 형태?크기?위치, 관찰자의 시선 등이 결합될 때, 한옥의 다양성은 말 그대로 ‘무한’해진다.
더구나 한옥에서는 단지 풍경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게 아니라, 놀이하듯 창을 ‘조작해’ 능동적으로 풍경을 만들어낸다. 가령, 여닫이문과 미닫이문을 간단히 조작해 풍경을 순식간에 장경(場景)으로 만들어내는 설명을 보자.
여닫이문을 반쯤 열면 두 장의 문짝이 일소점 투시도 작용을 일으켜 액자가 공간깊이를 갖게 된다. 관찰자와 풍경요소 사이에 공간 켜가 하나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여기에 미닫이문까지 가세해서 여닫이문을 양쪽 끝에서 조금씩 먹고 들어오면, 틀이 하나 더 추가되면서 액자는 완전히 무대세트로 변한다. (83쪽)
이렇게 만들어지는 다양한 풍경작용들은 쓸모가 많다. 시각적 즐거움은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섬세한 심리와 조응하며 집을 집답게 만든다. 이를테면 마음을 고요하게 다스리고 싶거나 소소한 감상에 젖고 싶은 날이면, 수목과 꽃을 눈앞에 잡힐 것 같은 ‘차경’으로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가부장으로서 집안 구성원들 앞에서 권위를 내세울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랑채 대청에 앉아 집 안 전체에 대한 ‘장경’을 형성시켜 본다. 장경은 풍경을 마치 연극무대에 올려놓은 것처럼 만들며 관찰자와 집안 구성원들 사이를 갈라놓을 것이다.
아파트와 전통 한옥, 모두를 넘어서
한옥은 결코 무겁지 않다. 인간의 섬세한 심리에 맞추어 자신을 자유자재로 변화시킨다. 그 어떤 건축물보다 유연하고 빠르다. 되레 현대성을 상징하는 아파트가 지나치게 효율적인 공간구성으로 사람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실제로 이른바 ‘닭장’ 혹은 ‘군부대 막사’로 아파트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추세를 반영해 이 분야 출판 카테고리에서는 ‘한옥 짓기’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 다수 출판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더 근본적인 반성을 선행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방향을 잘못 잡고 뛰기 시작하면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느니만 못하다. 『나는 한옥에서 풍경놀이를 즐긴다』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한옥의 아름다움을 개념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옥을 실제로 짓기 이전에, 한옥의 장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러한 장점은 어디서 비롯되는지, 어떤 환경 조건이 수반되어야 하는지, 그 사상적 의미는 무엇인지 등이 두루 고찰되어야 한다. 그래야 실제 한옥 건축 현장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과 융통성을 부려도 될 영역 간의 구분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저자는 요즘 부쩍 활발해진 한옥 건축이 ‘경직된’ 또는 ‘몰상식한’ 이유는 한옥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요컨대 이 책은 아파트를 넘어서되 전통 한옥도 넘어서는, 현대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한옥의 미학을 정립하려는 시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