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로마인 이야기’는 지력, 체력, 경제력, 기술력 모든 면에서 주변 민족보다 열세에 있었던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고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천 년 넘게 경영한 비결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추적해가는 흥미진진한 로마 통사다.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때부터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에 이르는 역사시기를, 제1권~제5권까지의 ‘융성기’, 제6권~제10권까지의 ‘안정기’, 그리고 제11권~제15권까지의 ‘쇠퇴에서 멸망’ 세 단계로 나누고, 역사의 흥망성쇠 속에 촘촘히 스며있는 로마인들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바탕을 두었으되 역사적 기술로부터 벗어나 있고, 사료가 채워주지 못한 부분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했으되 픽션에 빠지지도 않는, 독창적 글은 ‘로마인 이야기’만의 매력이다.
목차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2권 한니발 전쟁
제3권 승자의 혼미
제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제5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하
제6권 팍스 로마나
제7권 악명높은 황제들
제8권 위기와 극복
제9권 현제의 세기
제10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제11권 종말의 시작
제12권 위기로 치닫는 제국
제13권 최후의 노력
제14권 그리스도의 승리
제15권 로마 세계의 종언
저자
시오노 나나미 (지은이), 김석희 (옮긴이)
출판사리뷰
‘로마인 이야기’는 출간될 때마다 수만 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10년 넘게 전권이 고루 독자들에게 꾸준히 읽혀온 스테디셀러다. 국내 처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5년 9월,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와 제2권 『한니발 전쟁』이 동시 출간되면서부터다. 당시 한국의 인문교양도서 장르나 시장도 크게 형성되지 않았고, 어려운 서양역사, 그것도 로마사를 다룬 책의 출간은 모험이었다. 그러나 몸젠이나 기번의 저작처럼 학술적인 역사서가 아니라, 이야기와 해설, 비평이 조화를 이룬, 일컬어 ‘역사평설’이라는 독창적인 서술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반 독자들의 관심과 함께 사회 각계 지식인층에도 폭넓게 영향을 주면서, 제3권은 95년 11월, 재4권은 96년 3월, 제5권은 96년 8월에 잇달아 발매되었다. 다시 제6권부터는 일본어판을 뒤쫓아 해마다 한 권씩 간행되어, 마지막 권 『로마 세계의 종언』을 맞이한 것이다.
시오노의 다른 저작들로는, 『바다의 도시 이야기』『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르네상스의 여인들』 등 르네상스 관련 저작, 『남자들에게』『침묵하는 소수』『사랑의 풍경』 등 에세이 관련 저작 등을 포함해 현재 16종 22권이 한길사에서 번역출간되었다. ‘로마인 이야기’의 집필은 르네상스를 주제로 한 그의 많은 책들이 기본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것도 중세가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고, 그리스도교로 잘 안 된다면 그리스도교가 없던 시대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시오노는 자연스럽게 고대 로마로 탐구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을 ‘로마인 이야기’ 완성에 바쳤다.
‘로마인 이야기’는 지력, 체력, 경제력, 기술력 모든 면에서 주변 민족보다 열세에 있었던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제패하고 중근동,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천 년 넘게 경영한 비결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추적해가는 흥미진진한 로마 통사다. 기원전 753년 전설의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때부터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에 이르는 역사시기를, 제1권~제5권까지의 ‘융성기’, 제6권~제10권까지의 ‘안정기’, 그리고 제11권~제15권까지의 ‘쇠퇴에서 멸망’ 세 단계로 나누고, 역사의 흥망성쇠 속에 촘촘히 스며있는 로마인들의 희로애락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철저한 고증과 사료에 바탕을 두었으되 역사적 기술로부터 벗어나 있고, 사료가 채워주지 못한 부분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했으되 픽션에 빠지지도 않는, 독창적 글은 ‘로마인 이야기’만의 매력이다.
1. “로마는 위대한 순간도 없이 스러져갔다”
■ 제15권『로마 세계의 종언』보도자료
탄생, 성장, 죽음 … ‘왜’보다 ‘어떻게’ 쇠망했나
‘로마인 이야기’ 제15권 『로마 세계의 종언』은 전체 시리즈의 종결이자, ‘쇠망’(11~15권)의 결론부라는 점에 방점을 찍을 수 있다. 작가 시오노의 말처럼 “로마의 쇠망을 논한 역사서나 연구서는 바닷가 모래알만큼 많다.” 왜 모두들 ‘쇠망’에만 관심을 가질까에 대한 이 작은 의문이 시오노가 방대한 분량의 ‘로마인 이야기’를 쓰게 된 동인이 되었다. 한 사람의 전모를 알려면 탄생에서 성장, 죽음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추적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라는 것이다.
또 시오노는 “융성은 당사자들의 정신이 건전했기 때문이고, 쇠퇴는 정신이 타락했기 때문”이라는 식의 추상적인 단순논법을 거부했다. 그보다는 철저히 당시 로마인들의 입장에서 물질적?제도적 측면과 그 운용, 대처방식, 거기에 담긴 로마인들의 사고방식과 태도가 어떠했는가에 초점을 맞춰 현실적으로 서술한다. 시오노에게 로마의 멸망은 ‘왜’보다는 ‘어떻게’ 신국판/양장본/536쪽/값 14,000원 쇠망했느냐가 관심사였다.
제국 멸망 이후 7세기까지 … 국가의 종말이 아니라 문명의 종말을 그리다
마지막 권은 제1부 최후의 로마인(서기 395~410년), 제2부 로마 제국의 멸망(서기 410~476년), 제3부 제국 이후(서기 476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로마 역사의 끝으로 본다. 하지만 시오노는 『로마 세계의 종언』에서, 거기서 더 나아가 ‘포스트 임페리움’(Post Imperium), 즉 제국 멸망 이후 7세기까지를 다룬다. 한 국가의 종말이 아니라 ‘문명의 종말’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즉 로마 세계 수평선상에 이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때다. 서기 613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예언자 무하마드가 포교활동을 시작하며, 636년 시리아의 이슬람화, 642년 이집트의 이슬람화, 650년 아랍인이 소아시아를 침공하고 한때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육박, 670년 북아프리카 이슬람화, 698년 북아프리카의 요충인 카르타고가 이슬람교도에게 함락. 그러면서 지중해가 더 이상 “로마 세계의 ‘내해’(內海)가 아니라 양쪽을 갈라놓는 경계선으로 변했을 때 로마세계는 사라져버렸다.”
야만족의 ‘로마 겁탈’ … 그러나 제국 말기에도 인재는 있었다
제15권은 로마 제국 전역에 몰아닥친 야만족들의 유린상을 상세히 다루며 로마가 어떻게 멸망해갔는지를 상세히 추적한다. 제국 말기 갈리아에는 로마 황제의 힘이 미치지 못했고, 대여섯 야만족들이 패권을 다투면서 뒤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410년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 455년 겐세리크가 이끄는 반달족의 침입은 ‘로마겁탈’로 명명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초래했다. 이 대대적인 야만족들의 이동은 그들도 두려워한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진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기독교 사람들은 훈족을 ‘신의 채찍’이라는 별명을 부르며 무서워 떨었다. 아무튼 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393년부터 사실상 동서로 분리되었고, ‘국가’를 방위하는 책무를 맡은 사람이라는 뜻의 ‘임페라토르’라는 황제 호칭은 더 이상 붙일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그의 아들인 아르카디우스(동로마 제국, 395~408)와 호노리우스(서로마 제국, 395~432)는 전쟁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제국 최후의 1세기를 역사가들은 황제를 대신한 장군들이 중요했던 ‘군사령관들의 세기’라고 불렀다. 한편, 심약한 어린 황제들을 대신해 여자들(어머니와 누나, 아내)이 참견하는 ‘섭정’은 역량과 재능의 한계를 드러냈고, ‘최후의 로마인’이라 칭하는 스틸리코를 비롯해 보나파키우스, 아이티우스와 같은 역량 있는 군사령관들, 황제로서는 오른팔에 해당하는 인재를 스스로 잘라내는 일도 자행했다. 심지어 황녀 호노리아는 훈족의 우두머리 아틸라에게 자기와 결혼하면 지참금으로 서로마 제국 영토의 절반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편지도 보낸 실정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제국 말기에도 인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다만 그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몰랐을 뿐이라고 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무언가 달랐다
혹자는 1453년 동로마 제국 멸망을 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오노는 “로마라는 도시가 없는 로마 제국은 있을 수 없다. 로마인은 로마가 아무리 철저히 파괴된 뒤에도 로마에서 다른 곳으로 수도를 옮기는 데 완강히 반대했던 민족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수도인 나라는 이미 로마 제국이 아니다”라고 쓰면서, 그런 의미의 로마 제국은 역시 서기 476년에 멸망했다고 보는 것이다.
또 로마의 멸망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적고 있다. 첫째, 야만족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장렬하게 죽은 것도 아니고, 처절한 아비규환도 없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버렸다는 것. 자진해서 제위에 오른 것도, 다른 누군가를 제위에 앉힌 것도 아닌, 말 그대로 “아무도 황제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둘째, 역사상 다른 제국들과 비교해보면, 식민지가 차례로 독립하면서 제국이 해체되었지만, 로마만은 속주가 등을 돌렸기 때문에 제국이 해체된 것이 아닌 점. 시오노는 “본국과 속주 사람들이 같은 공동운명체에 속한다고 생각한 로마인의 제국관은 그들이 제국을 ‘Familia’라고 부른 데에도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두 가지 의미에서 시오노는 로마 제국의 멸망은 다른 모든 ‘번성한 자’와는 격이 다르게, “언제인지도 모르게, 그래서 ‘위대한 순간’도 없이, 그렇게 스러져갔다”고 말한다.
2. “나는 진심으로 로마인을 알았다”|시오노 나나미
■ 『로마인 이야기』의 모든 집필을 끝내며
왜 로마사를, 그것도 열다섯 권씩이나 썼느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역사를 쓰는 법’이나 ‘현세에 대한 문제의식’과는 전혀 관계없이, ‘소박한 의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발단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사라고 말하면 ‘쇠망’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그것이 지금까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의 영향이 아닐까 싶지만, 내 첫번째 의문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쇠망했다면 그 전에 우선 융성했어야 할 텐데, 왜 융성기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쇠퇴기만 문제 삼는가 하는 의문이었으니까.
그래서 우선 로마는 왜, 어떻게 해서 융성했는가를 알고 싶어졌다. 이 시기를 다룬 부분은 제1권부터 제5권까지인데, 이 다섯 권에서 묘사된 로마는 전쟁만 하면서 지내지만, 그렇기 때문에 로마사에서는 ‘고도성장기’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왕정이지만 그후 오랫동안 공화정 체제로 일관한 시대이기 때문인지, 이 ‘공화정 로마’를 다룬 근현대의 역사서와 연구서는 방대한 수량에 이른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인지, 근현대의 역사가와 연구자들은 공화정 시대의 로마를 선호하는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하자마자 일반 독자용 역사책에서 학술 연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격감한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보았는데, 제정 로마 시대는 정치사의 통념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왕정에 이어 귀족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거친 뒤에는 민주정으로 나아가는 것이 정치사의 통념인데, 원수정이나 군주정이 되어버린 로마는 역사의 역행―바꿔 말하면 보수 반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 이데올로기의 무력함을 알아버린 시대의 사람이다. 정치사의 통념 따위는 무시하고, 일반 사람들에게 선정이었느냐 악정이었느냐만 문제 삼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원수정인 제정 시대를 지금처럼 소홀히 다루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는 융성기에 얻은 열매를 오랫동안 널리 맛보았다는 의미에서 로마 역사상 ‘안정성장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나타났다 사라져간 국가들은 대부분 융성한 뒤에는 곧 쇠퇴하기 시작한다. 융성기와 쇠퇴기 중간에 오랜 안정성장기까지 가질 수 있었던 나라는 드물다. 그 때문인지 장수를 누린 국가는 어김없이 안정성장기를 갖고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 공화국도, 고대 로마 제국도.
제정 로마의 두번째 특색은 ‘팍스’(평화)를 달성했다는 것이다. ‘팍스 로마나’는 ‘로마에 의한 국제 질서’였다. 게다가 로마가 주도하는 이 평화는 오랫동안 넓은 제국 전역에 걸쳐 유지되었으니까 대단하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200년 동안 전쟁이 없었다니, 그후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이 ‘팍스’가 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아는 것이 목적인 이상, 정치체제가 제정이라도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기에 빛을 비춘 것이 제6권부터 제10권까지 다섯 권이다. 다만 ‘로마에 의한 국제 질서’의 ‘아이디어 맨’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이기 때문에, 그를 따로 떼어놓고는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는다. 로마 제정을 알려면 카이사르를 다룬 제4권과 제5권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카이사르는 로마사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즉 ‘고도성장기’에서 ‘안정성장기’로 이행하는 과정을 엮어낸 ‘연출자’였기 때문이다. 로마인들 자신도 사실상 최초의 로마 황제는 카이사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에토니우스의 『황제 열전』도 카이사르부터 시작된다.
마지막 3분의 1은 제11권부터 시작하여 제15권으로 끝나는 시대인데, 여기서 비로소 로마사라면 반드시 머리에 떠오르는 쇠망의 시대에 다다른다.
로마의 쇠망을 논한 역사서나 연구서는 그야말로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많지만, 황당무계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제외하면 그 모든 것이 다소는 옳다. 그것들을 주워 모으면 로마가 쇠망한 요인을 손쉽게 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한 번뿐인 인생을 남의 업적이나 주워 모으는 작업에 소비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마지막 다섯 권에서는 특히 ‘왜’보다 ‘어떻게’ 쇠망해갔느냐에 중점을 두어 쓰기로 했다.
한 나라의 역사도 한 사람의 생애와 비슷하다. 어떤 사람을 철저히 알고 싶으면 그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평생을 더듬어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내가 탄생에서 사망까지를 추적하는 이른바 통사(通史)를 쓴 것은 두번째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라는 제목의 ‘베네치아 공화국 역사’가 첫번째였고, 이 『로마인 이야기』가 두번째다. 하지만 이 두 나라의 역사는 1천 년이 넘는 장수를 누렸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나라나 후세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다르다. 『바다의 도시 이야기』는 두 권으로 끝낼 수 있었는데 『로마인 이야기』는 열다섯 권이나 되어버린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아니, 적어도 열다섯 권은 쓰지 않으면 로마 역사를 쓸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이 로마인을 알고 싶다는 생각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썼다. 다 쓰고 난 지금은 진심으로 ‘로마인을 알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자들도 다 읽고 나서 ‘알겠다’고 생각해준다면, 나에게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책이란 저자가 쓰고 출판사가 만들고 그것을 독자가 읽어야만 비로소 성립되는 매체지만, 이 삼자를 연결하는 붉은 선이 바로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니까.
2006년 가을, 로마에서
시오노 나나미
3. 로마인 이야기와 나|김석희
■『로마인 이야기』제15권 옮긴이의 덧붙임
마침내 끝났습니다.
처음 출발할 때만 해도, 끝이 보이기는커녕 그 끝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곳에 정말 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기도 했던, 그 멀고 오랜 길이 이제는 다 끝나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입니다.
15년에 걸친 대장정의 고난과 성취, 그 빛나는 영광은 물론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 선생의 몫입니다. 나는 그저 책이 나올 때마다 한 달 남짓 번역에 매달리면서, 선생이 닦아놓은 길을 따라 고대 로마 세계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그 시공을 넘나든 여행을 마친 기분을 표현하자면, ‘임페라토르’ 카이사르를 따라 갈리아 전선을 누비고 다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어느 시골에 정착한 로마 병사의 기분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흔히 ‘시원섭섭하다’고 말합니다. 그 오랜 작업에 보람도 있고 미련도 남아 있겠지만, 이제는 그 고달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을 테니까요.
나도 그런가 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로마인 이야기』와 함께 한 세월이 언제나 신났고,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로마인 이야기』와는 첫 만남부터가 운명적이었습니다. 1995년 봄에 한길사에서는 ‘시오노 나나미 저작집’을 준비하면서 세 사람에게 검토를 요청했습니다. 오정환 선생과 정도영 선생 그리고 나. 당시 시오노 나나미는 우리나라에 생소한 이름이었고, ‘일본의 여류 아마추어 저술가’에 대한 출판계 일각의 회의적인 견해도 없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검토자들은 그의 책들이 아주 재미있으며, 출판해볼 만하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런 평가에 책임을 지듯 책을 하나씩 맡아 번역하게 되었는데, 오정환 선생은 마키아벨리(『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정도영 선생은 베네치아(『바다의 도시 이야기』)를 맡았고, 나에게 로마가 주어진 것은 순전히 젊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15년 작업을 수행하려면 그만큼 젊어야 하니까). 그렇게 해서 『로마인 이야기』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인데, 그것은 실로 행운이었고, 그 인연을 나는 고맙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나는 책에도 나름의 유전(流轉)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책은 그렇게 자신의 바퀴를 굴리며 팔자를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저자의 품에서 태어나 편집자의 손에서 행색을 갖추어도, 독자들의 보살핌이 없으면 책은 성장을 멈추고 맙니다. 심한 경우, 태어나자마자 죽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독자들―1995년 가을 시독회(試讀會)를 가졌을 때 참석하여 좋은 의견을 내준 독자들부터, 책이 나오고 나면 벌써 다음 책이 언제 나오느냐고 성화(?)를 부렸던 열성 독자들까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독자들 중에는 역자인 나에게 직접 성원과 질책을 주신 분들도 있습니다.
첫 권이 나온 직후인데, 어느 나이 지긋한 독자께서는 전화로, ‘로마인’이 아니라 ‘로마 사람’이라고 해야 우리말 어법에 맞다고 지적해주었습니다. 일면 수긍을 하면서, 책제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설명드렸지만, 『로마인 이야기』 번역을 마칠 때까지 내내 그분의 매서운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둔 채, 우리말다운 번역이 되도록 늘 조심하고 노력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는 햇수와 권수를 더해갈수록 독자의 폭과 층이 넓어지고 깊어졌지만, 처음엔 일반 독자들보다 재계 쪽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마 천년 제국을 경영했던 로마인들의 지혜가 당시 우리나라에 구호처럼 던져진 ‘세계화’ 담론에 단서를 제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컨대, 어느 기업체 사장은 역자와 발행인을 근사한 식당에 초대하여 『로마인 이야기』의 번역 출간을 기뻐해주었는데, 보이든 보이지 않든 이런 격려와 성원은 번역에 최선을 다하도록 나에게 힘을 보태주었습니다.
중·고등학생을 상대로 실시한 독후감 모집에서 수상자로 뽑힌 아이들이 한길사 회의실에 모였을 때, 그 열띤 표정이며 초롱초롱한 눈빛들도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 앞에서 심사 소감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은 여러분은 앞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시야에서 벗어나 좀더 넓고 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테니까. 이런 체험과 세계관이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는 여러분이 대학에 들어간 뒤, 그리고 사회에 나아간 뒤에 더욱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 책을 집어든 청소년 독자가 있다면 그에게도 같은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로마인 이야기』는 리더십의 문제를 제기하여, 제대로 된 지도자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시대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시오노 선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진 강연회도 청소년을 상대로 한 ‘지도자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로마인 이야기』가 그렇게 인기를 얻은 이유에 대해서 한 친구는, 우리도 ‘카이사르 같은 지도자’를 한번 가져보고 싶다는 국민적 열망의 반영이 아니겠느냐고 설명하더군요. 참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무릎을 친 적이 있는데, 리더십 문제는 이제 우리 앞에 더욱 중대하고도 피할 수 없는 현안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하던 1995년 무렵에 나는, 번역은 조강지처 같고 창작은 애인 같다는 소리를 하면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창작의 어려움 때문에 소설을 그만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나에게 용기와 명분을 준 것이 『로마인 이야기』였습니다. 시시한 소설 쓰느니 좋은 번역을 하는 게 훨씬 뜻있고 수지맞는 사업임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과감히 애인과 헤어지고 아내한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선택과 전향을 나는 지금도 다행으로 여기고 있고, 그런 만큼 번역은 나에게 소중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보통 가을이면 나오던 원서가 제10권부터는 12월 중순에 출간되었고, 그때 책을 받아 번역에 들어가면 연말연시의 흥겨움을 즐기거나 송구영신의 기분으로 어디 여행 한번 다녀올 여유도 없이 지내곤 했는데, 이런 고역도 이젠 끝이구나 생각하면 굴레를 벗어난 듯 가뿐한 것도 같지만, 해마다 그렇게 몸살을 앓듯 몸과 마음을 다잡으며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이하곤 했던 일은 이제 독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다 알다시피 시오노 선생은 1992년에 『로마인 이야기』 제1권을 내면서, 2006년까지 해마다 한 권씩 발표하여 전15권으로 완결지을 예정이라고 공언한 바 있습니다. 그 책 끝에 덧붙인 ‘역자 후기’에서 나는 이렇게 썼습니다. “선생의 비장한 각오와 부단한 노고에 찬탄과 경의를 표하면서, 이 책의 번역 작업에 나 또한 끝까지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옷깃을 여민다.”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반쯤 더 변하는 동안, 50대 중반이었던 시오노 선생은 이제 칠십 고개를 넘었습니다. 완간에 즈음하여 가진 인터뷰에서 선생은, 병원에 가면 의사가 여기저기 아픈 데를 찾아내어 입원시킬까봐 아예 병원엔 가보지도 않았다고 말했더군요. 그런 열정과 책임감 앞에 누구인들 고개가 숙여지지 않겠습니까. 선생의 노익장에 새삼 경의를 표하면서, 또한 번역 작업에 끝까지 참여할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하면서, 선생의 건강하고 행복한 노년을 축원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옷깃을 여밉니다.
2007년 1월
김석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