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백성욱 박사 전집 6]
한국 근현대 불교의 선지식 백성욱에 대한 최초 본격 일대기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독일 철학박사, 건국 운동가이자 내무부장관, 동국대 총장이자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금강산의 수행자이자 활불(活佛). 백성욱을 일컫는 말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반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나 연구, 기록은 많지 않다. 대중적으로도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강설한 《금강경 강화》, 제자들이 전하는 일화와 법문 일부가 책으로 엮여 있고, 불교학 연구자들이 그의 금강산 수도 시절을 중심으로 논문을 몇 편 발표한 정도다.
이 책은 《백성욱 박사 전집(전6권)》 출판 기획에 따라 준비된 백성욱의 일대기를 다룬 최초 본격 전기이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출생과 성장, 청년기, 금강산 수도 시절, 소사 백성목장 시절 등을 인터뷰와 역사 자료, 편지와 기사, 취재 등을 통해 발굴·정리하였다. 동시에 그동안 잘못 알려진 채 인용되고 있던 내용도 수정·보강하였다. 기록을 하나하나 비교하여, 보다 정확하게 연보와 생애를 꿰어맞추고, 백성욱의 깨달음과 가르침의 방향을 법문과 학인들의 수행기를 통해 명확하고 풍성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성욱 박사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금강산 수도 생활 시절’, 그중에서도 안양암에서의 단신 수도 생활을 가장 의의 있고 보람 있던 때로 말하고 있다.
목차
서문 : 백성욱 박사의 전기를 엮으며
1부. 이인(理人)을 꿈꾸며
1. 한용운의 부름
2. 지혜는 곧 생명력
3. 상해임시정부를 오가며
4. 독일 철학박사가 되다
2부. 금강산의 수행자
5. 갈팡질팡하누나
6. 숙세의 인연, 일엽을 만나다
7. 나는 가서 없어져야 한다
8. 백성욱의 선지식
9. 안양암의 활불
10. 금강산에 모여든 500 화엄성중
3부. 한국 불교 교육의 중흥조
11. 돈암동 선방에서의 보림
12. 치악산의 백로선생
13. 해방-나라다운 나라를 위한 선택
14. 종로 네거리에 내려온 철인
15. 정치를 떠나 교육으로
16. 백성욱 특강
17. 5·16으로 대학을 떠나다
4부. 미륵존여래불
18. 응작여시관
19. 왜 ‘미륵존여래불’인가
20. 백성목장 사람들
21. 어느 부처님 회상
22. 다 바쳐라
화보
백성욱 박사 연보
감사의 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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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백성욱, 고세규 (지은이)
출판사리뷰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최초의 독일 철학박사, 건국 운동가이자 내무부장관, 동국대 총장이자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금강산의 수행자이자 활불(活佛)이라 불린
한국 근현대 불교의 선지식 백성욱에 대한 최초 본격 일대기
“한용운의 명을 받고 독립선언서를 경성 시내와 지방에 배포한 자”(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가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2일 작성한 3·1운동 계보도에서), 상해임시정부와 국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이어가고 [독립신문] 제작에 기자로 참여한 인물, 1921년 충정공 민영환의 두 아들 민범식·민장식의 집사 역할로 유학길에 오른 뒤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원 철학과에서 [불교순전철학]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인준받은 한국 최초 독일 철학박사, 1929년 가을 불교전수학교(동국대학교 전신) 철학과 강사직을 버리고 금강산에 입산하여 10년 동안 정진한 안양암의 수도자, 해방과 함께 민중계몽운동과 건국 운동을 실천한 내무부장관, 동국대의 기틀을 세운 동국대학교 총장,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그리고 1962년 65세에 경기도 부천군 소사의 야트막한 산을 개간하여 ‘백성목장(白性牧場)’을 경영하면서 20년 가까이 《금강경》을 강화(講話)하고 인연 있는 후학을 지도한 선지식, 3세에 아버지 5세에 어머니를 여읜 뒤 12세에 출가하여 나는 바도 없고 죽는 바도 없다는 듯 태어난 바로 그날(음력 8월 19일) 입적한 시대의 활불(活佛)이라 불린 인물.
백성욱을 일컫는 말은 다양하고 특별하다. 반면 그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나 연구, 기록은 많지 않다. 대중적으로도 그다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강설한 《금강경 강화》, 제자들이 전하는 일화와 법문 일부가 책으로 엮여 있고, 불교학 연구자들이 그의 금강산 수도 시절을 중심으로 논문을 몇 편 발표한 정도다.
이 책은 《백성욱 박사 전집(전6권)》 출판 기획에 따라 준비된 백성욱의 일대기를 다룬 최초 본격 전기이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출생과 성장, 청년기, 금강산 수도 시절, 소사 백성목장 시절 등을 인터뷰와 역사 자료, 편지와 기사, 취재 등을 통해 발굴·정리하였다. 동시에 그동안 잘못 알려진 채 인용되고 있던 내용도 수정, 보강하였다. 기록을 하나하나 비교하여, 보다 정확하게 연보와 생애를 꿰어맞추고, 백성욱의 깨달음과 가르침의 방향을 법문과 학인들의 수행기를 통해 명확하고 풍성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백성욱 박사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금강산 수도 생활 시절’, 그중에서도 안양암에서의 단신 수도 생활을 가장 의의 있고 보람 있던 때로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앙불교전수학교의 교수로 취임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직을 사임하고 금강산 안양암에 들어가 단신 수도를 하였습니다. 그곳에 들어가 수도를 한 것은 내 자신이 좀 더 부처님 속에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멀리하고는 무엇인가 허전하여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 3년 동안은 오직 혼자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던 해가 되자, 금강산에 들어와 수도하는 많은 종중(從衆)이 같이 있기를 간청하는 바람에 그들의 뜻을 물리칠 수 없어 지장암으로 옮겼습니다. 이때부터는 여러 수도자와 같이 기도하면서 그들을 지도하는 데 온갖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안양암에서 3년, 지장암에서 7년, 그래서 이 기도는 만일(萬日)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기도가 끝나는 1938년 어느 날, 일본 경찰이 나를 체포하러 왔습니다.
(…) 지금 회고해보면, 내 생애의 전반에 걸쳐 금강산 수도 생활의 시절보다 의의롭고 보람 있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안양암의 단신 수도 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때의 신심은 불이 붙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기도는 석가모니불 앞에서의 본존불(本尊佛) 정진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부처님 앞에 바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부처님 곁을 떠나는 날이 없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그리고 나의 생활 속에는 항상 부처님이 계십니다. 나의 이러한 신앙심은 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날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변함이 없습니다. _p. 353
지인과 학인들의 회고, 각종 역사와 언론 자료를 토대로 정리한 백성욱 박사의 생애와 세계
“저 사람들 점심은 내가 가져다줄 테니 다른 대중은 나서지 마시게.”(p. 113) 조계종 초대 종정에 추대된 근대 한국 불교계의 대표 스님인 방한암 선사의 말이다. 백성욱이 스승이자 도반인 혜정 손석재 보살과 함께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정진을 이어가자, 당시 오대산 상원사에 주석하던 방한암 선사는 백성욱을 ‘큰사람 백성욱’이라 칭송하며, 그의 공부를 위해 친히 끼니를 나르며 격려하였다. 약초 연구가 인산 김일훈이 남긴 일화를 보면, 당시 주요 인사들의 백성욱에 대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방도인(方道人)으로 불린 형님이 한 분 있었다. 그 형님이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음에 다다르자 임종을 지키던 많은 독립운동가는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떠나시면 어찌 될까요? 선생님 같은 이인(異人)이 과연 또다시 나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니, ‘모르는 소리…, 나보다 월등한 재주들이 많지. 해방 이틀 이후 묘향산의 김운룡이 몽양 집으로 올 걸세. 그리고 금강산 중 백성욱이 있지 않은가. 모두 천하의 기재(奇才)들이니 나라에 큰일이 있거든 나이를 관계치 말고 물어서 의견을 듣도록 하게나.’” _p. 168
“수개월 전에 나는 금강산에서 백성욱 사(師)를 만나서 3, 4일간 설법을 들을 기회를 얻었소.”[이광수, 《문장》(1939년 9월)] 춘원 이광수는 백성욱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금강산까지 백성욱을 찾아와 마음을 털어놓고 갔다. 재혼한 부인 허영숙과 크게 다툰 뒤면 어김없이 백성욱에게 달려와 푸념을 늘어놓곤 하였다. 사상적인 갈등을 거듭하고 병약한 체질이 겹쳐 실로 위안받을 데가 없을 때에도 불원천리 백성욱을 스승으로 모시고 찾아갔다.(pp. 166-167)
소설가 이병주의 [백로선생]이라는 작품은 1944년 치악산에서 백성욱을 스승으로 동굴 수행을 하던 청년 셋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KBS [TV 문학관]에 단막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하였다.(pp. 186-187)
한편 시인 서정주는 “한반도 5,000년 역사 가운데 여자로서는 선덕여왕이 가장 매력적이고, 남자로서는 백성욱 총장이 가장 매력적인 남자”라고 백성욱 박사를 회고하였다.(p. 243)
이 책은 백성욱에 대한 다양한 인사의 기억과 일화, 평가를 함께 담아 그를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소사 백성목장 시절, 바로 그의 곁에서 수행의 길을 걸었던 제자들의 생생한 기억은 백성욱의 가르침과 세계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무슨 일을 바라볼 때면, 내 안에 백 선생님이 들어앉아 계심을 느낀다. 백 선생님께서는 무슨 일을 두고 ‘왜’라는 말을 쓰지 않으셨다. ‘너는 왜…?’ 하면, 그건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를 가리는 말이 될 텐데, 그러지 않으시고 ‘너는 그렇게 해야 했더냐? 그게 좋아 보이더냐?’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시비 경계를 짓는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런 데서, 백 선생님의 법문을 듣고 공부하거나 백 선생님의 말씀을 책으로 읽어 공부한 사람하고, 백 선생님의 체취를 곁에서 느끼며 공부한 사람하고 차이가 난다. (…) 곁에서 모시고 공부하면 스승이 그대로 딱 들어오기 때문이다.”_학인 김강유(p. 9)
“소사에서 학인들이 무언가를 사러 가게 될 경우, (백 선생님은) 예상되는 가격의 두 배 정도 되는 돈을 건네주었다. 돈이 이렇게나 많이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면, ‘그래도 혹시 모르니 헛걸음하지 않도록 일단 풍족하게 갖고 나가봐라’ 하였다. 학인들은 늘 넉넉하고 풍요로운 마음으로 길을 나설 수 있었고 돌아올 때도 같은 마음이었다. 물건을 사는 과정에서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는 으레 흥정이나 에누리 과정이 꼭 있던 시절이었다. ‘판매자와 흥정하되, 물건값을 너무 많이 깎지 마라. 팔 때는 사는 사람도 잘 샀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고, 살 때는 파는 사람도 손해를 보지 않게 해야 한다.’ (…) 누구도 손해 보았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한 것이다.”_학인 이선우(p. 333)
“타인 때문에 괴롭다고 말하자, (백 선생님은) 이렇게 법문하였다. ‘제 마음속에 있는 분별을 제 마음이 아니라고 한다든지, 또 남의 마음이라고 한다든지,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됐다든지 이런 생각들, 또 그건 옳지 못한 생각이라든지, 그건 또 좋은 생각이겠다든지, 이런 분별을 낸다면 영원히 그 마음을 항복받기 어렵다. 자기 마음속의 전부는 자기 것이지 남의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도 아무개 때문에 내가 속이 상했다고? 제 마음이 약하니까 속상하고 괴롭지 왜 아무개 때문에 상하겠는가? 그러니까 자기 마음속에는 자타(自他)가 전연 없는 줄 알아야 마음이 닦아지지, 자타가 있다면 마음은 닦아질 수 없을 것이다.’”_학인 정천구(pp. 330-331)
이 밖에도 백성욱을 만나고 함께했던 명사와 학인들의 회고와 인터뷰를 다양한 형태로 소개함으로써 그의 생애를 이해하고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백성욱의 시와 에세이, 편지와 논문, 주요 강의와 법문 등을 집약하여 정리한 일대기
한 권으로 맛보는 백성욱 박사의 문장과 말씀과 삶과 가르침
“이번 길에 내가 다시 살아온다면 무슨 짓을 하거나 무슨 행동으로 세상을 대하거나, 그는 결코 시방 적멸보궁을 찾아가는 빈약하고 더러운 위선자인, 좋은 동기면서도 죄악의 결과만을 가져오는 ‘무호산방(백성욱의 필명)’은 아닐 것이다. 그는 적어도 부처님의 사명으로 중생을 제도하고자 오는 환주장엄(幻住莊嚴, 실제가 아닌 방편의 장엄)의 인물일 것이다. 무호산방은 그의 죄악을 참회하고 그의 환구(幻軀, 덧없는 몸)를 해탈하였으리라. 또 반드시 그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나로서는 이 길을 떠나면서 동지에게 아니 전할 수 없는 말이다. 이는 사실인 까닭이다. 동지여, 이 더러운 나를 보낸다고 섭섭해하지 말라. 나는 당연히 가서 없어져야 한다. 앞길이 망망한 나인지라. 이 말로 여러분을 작별한다. 제위여! 보중(保重)하라. 나는 당신들의 죄를 갖다가 불전에 동시에 참회하겠노라.” _백성욱, [다시 적멸궁을 찾아가면서]에서(pp. 104-105)
금강산 출가를 단행하면서 남긴 백성욱의 글이다. 백성욱은, 이 길에 다시 살아온다면 적어도 부처님의 사명으로 중생을 제도하고자 오는 인물이 되기를 결심하고 발원하였다. 자신에게 용기에 용기를 더하여 떠나는 이 길에서, 부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수없이 눈물을 흘리며, 덧없는 몸을 해탈하기를 참회하고 기도하였다. 이 책은 백성욱이 남긴 글과 말씀을 곳곳에 함께 배치하여 전기 한 권을 통해 백성욱의 작품과 법문을 고루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아래는 철학박사 학위 논문 [불교순전철학]을 쓴 배경에 대한 글이다.
“1924년 2월 이곳 철학 교수 마이어 박사로부터 ‘불교순전철학’이라는 논제를 받아서 그해 5월 2일에 완성한 후 이곳 철학과에 제출하여 박사논문을 인증받은 것은 무슨, 박사나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종사하였다기보다, 이곳 유럽인이 늘 묻는, ‘불교는 어떠합니까?’ ‘당신들의 사상계는 어떠합니까?’ ‘동양철학 역시 그리스철학을 토대 삼는 사상입니까?’와 같은 질문에 졸지에 응답하기 어려웠다는 것이 제일원인이었습니다. 또 우리 스스로가 근대에 와서 이 방면에 대한 새로운 저서를 내놓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이들 유럽인에 비해 그다지 다를 바 없다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세계인들은 보통 불교가 철학이거니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불교철학의 주관(主觀)’ 방향으로는 한 권의 책을 두지 못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현황들은 저자로 하여금 없는 능력과 용기를 내어서 소임을 맡게 하였습니다.” _백성욱, [불교순전철학]에서(pp. 67-69)
아울러 책에 소개한 백성욱의 편지를 통해 당시 그의 형편과 시대적 상황, 내면의 진솔한 고백을 읽을 수 있다. 동시에 그가 작성한 편지는 전기를 작성하는 훌륭한 소재가 되어주었다.
“올해 2월부터 7월까지는 박사논문을 준비하느라고 모든 것을 부채로 살아왔지요. 이와 같이 생활을 계속하는 중에 어디 무엇이 없었으리까? 즉 생으로 하여금 오늘 생명이 있게 하는 힘은 산중에서 획득한 불경의 선문(禪文)이었나이다. 나의 진실한 신앙은 외부의 환경이 험할수록 견고해지더이다.” _1924년 11월 22일 뷔르츠부르크에서 권상로 스님에게 보낸 편지 일부(p. 70)
“이곳 지식 계급들의 생각인즉 벌써 ‘인류’라는 관념하에서 행동합니다. 즉 지식 계급 간에 상조(相助)라는 개념 속에는 국경이나 인종이라는 관념은 없습니다. 그들은 항상 저에게 ‘유럽 생활을 하라’고 권합니다. ‘부분적 문화에 종사하지 말고 세계적으로 하라’고 권하기를 마지아니합니다.” _1924년 12월 10일 자를란트 탄광에서 권상로 스님에게 보낸 편지 일부(p. 71)
이 밖에 책에 담겨 있는 백성욱 박사의 에세이와 강설은 이 세계의 실상과 존재의 참모습을 파악하고 공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동시에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백성욱 박사의 책들을 파악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나’란 무엇일까? (…) 대관절 누가 밥을 먹고, 누가 이야기를 하고, 누가 칭찬을 하면 좋아하였는가? 모든 것은 나이지. 그래 내가 칭찬을 들으면 좋아하지. 그러면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나’란 것은 무엇을 가리켜서 한 말인가?” _백성욱, [‘나’란 무엇일까](p. 82)
“《금강경》 이 자체가 세상에서 얘기하는 소위 ‘종교’라는 것과는 정반대가 됩니다. 유럽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은 ‘최고의 신(神)과 우리를 결부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금강경》)서는 절대로 자기 한마음이 모든 것을 창조한 것이지, 따로 어떤 최고의 신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신이 있다고 하면 자기를 약체화(弱體化)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약체화하면 어떻게 밝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래 《금강경》 얘기하다 보면, 누구든지 ‘불법(佛法)’이라고 하면 불법이 아니다. 왜 그러냐? ‘불법’이라는 관념 하나를 미리 넣어두면 네 마음이 그만큼 컴컴하다, 그러니까 불법이 아니다. 오직 네 마음이 밝아야 되겠다. 또 심지어 어떤 때는 너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형상(形相) 있는 것은 다 아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가린 것이다. 오직 모든 것이 실상이 없는 줄 알 때에 네 마음이 밝을 것이다. 이렇게 알면 곧 밝은 이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아마 이 세상 인류가 탄생한 이래 참 듣기 어려운 말이었고, 앞으로도 그런 말이 없을 것이고, 현재에도 그런 말이 잘 지탱하지 않습니다. 우레가 치고 비가 오면 모두 하느님 장난이라고 하였지 ‘네 마음의 소산이다’라고 말한 이도 없었고, 또 그러려고 하지도 않고 지금 이 시대에도 여러 사람이 그런 거 잘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골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_pp. 252-253
백성욱 박사의 말씀과 생애를 통해 배우는 자유자재한 삶, 해탈과 행복의 길
백성욱은 수행하는 방법을 물어온 어느 사찰의 한 학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금강경》을 독송하고 마음을 바치는 공부법에 대해 이렇게 썼다.
“‘미륵존여래불’을 마음으로 읽고 귀로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든 부처님께 바치도록 연습하십시오. 가지면 병이 되고, 참으면 폭발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으시되, 직접 부처님 앞에서 법문을 듣는 마음으로 하시고, 이를 실행하여 습관이 되도록 하십시오. 몸은 움직여야 건강해지고 마음은 안정함으로써 지혜가 생기니, 육체로는 규칙적으로 일하시고, 정신은 절대로 가만두십시오. 그저 부지런히 《금강경》을 읽으시고 ‘미륵존여래불’ 하여 자꾸 바치십시오. 이와 같이 백 일을 일기(一期)로 대략 10회 되풀이하면 몸뚱이로 인한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장차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것은 아상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렇게 공부하시되 주의하실 일은 ‘공부하겠다’ 하면 탐심이요, ‘공부가 왜 안 되나?’ 하면 진심이요, ‘공부가 잘된다’ 하면 치심이니, 너무 하겠다고 하지 말고 안 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고인(古人)은 “꾸준히 하되 허덕허덕 바쁘게 하지는 말라”라고 했지요. 이렇게 하여 무슨 일을 당하거나 무슨 생각이 나더라도 오로지 절대로 제 마음을 들여다보고 바치면, 이 세상은 그대로 낙원일 것입니다.” _pp. 283-284
소사 백성목장 시절, 백성욱 박사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신통이나 도통을 바라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백성욱은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검은콩 한 가마니에 들어 있는 흰콩 한 알을 골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은 흰콩 한 알을 찾기 위해 검은콩을 마구 헤집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검은콩을 하나하나 주워낼 뿐이다. 주워내다 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흰콩이 나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마음속의 탐심·진심·치심을 제대로 닦지 않으면서 도통하겠다고 욕심만 내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제 속의 탐심·진심·치심을 하나하나 닦아나가면 저절로 밝아지고 자연스럽게 도통한다. 흰콩 한 알을 빨리 찾겠다고 검은콩을 마구 헤집는 마음은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고 단번에 성과를 보겠다는 탐심이다.” _pp. 332-333
어느 날 한 학인이 몸이 성치 않은 걸인을 보았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주머니에 있는 돈을 주고, 소사 백성목장에 돌아와 백성욱에게 좋은 일을 했다며 으스댔다. 백성욱은 그에게 말했다. “불쌍하다는 생각을 갖지 마라. 그럼 네가 불쌍해진다.” 학인은 ‘이게 무슨 말씀인가? 그런 사람을 보고도 측은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하다 이어진 말씀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다. “불쌍하다는 그 마음이 누구 마음이냐? 네 마음 아니냐? 네 마음에 불쌍하다는 것을 징하게 되면, 그 마음의 주인인 네가 불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도와주는 건 도와주는 것이고, 네 마음에 불쌍하다는 생각을 징하면 안 된다.” _pp. 333-334
백성욱의 법문은 그때그때 학인들의 형편과 필요에 꼭 맞게 처방해주는 맞춤 약과 같고, 훗날 생길 일을 미리 알고 처방해주는 상비약이나 백신과도 같았다. 먹지 못할 약을 주어 무엇 하겠으며, 필요할 때 눈앞에 약이 없으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미리 병을 알고 항체를 가졌다면 문제가 생겼을 때 즉시 대응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그의 법문에 대해 어느 학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백 선생님 얘기는 단순히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그 사람 그 사람에게 하는 수기(隨機)설법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재미있어하며 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바로 이때를 염두에 두고 미리 얘기하신 거였구나. 내게 다 필요한 설법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_p. 325
이처럼 밝고 자유로운 삶을 위한 지혜를 말씀하고 있지만, 백성욱은 그 또한 하나의 생각이게 마련이니 그것도 갖지 말라고, 밝고 좋다는 거기에도 사로잡히지 말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팔만사천이나 되는 많은 법문을 하셨다지만 그것은 다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 다만 중생의 무량한 번뇌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무슨 하실 말씀이 있었겠는가. 오직 한마디 ‘나는 밝은 빛이다’라는 정도가 있었을까? 내가 그대들에게 한 이런저런 말 역시 내 소리가 아닌 그때그때 그대들의 업장을 닦고 밝아지는 데 필요했던 그대들의 소리였다. 다른 사람을 대했다면 그이의 업장에 따라 나는 또 달리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갖지 말고 다 바쳐라.” _pp. 355-356